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에스라 5:5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시 120:1
다리오 왕 2년에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일어나 성전재건을 촉구한다.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공사가 중단되고 저들의 신앙은 무사안일주의로 나태해져 있었다. 단순히 건축물의 하나로 성전건축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9).” 곧 이는 그리스도의 도래를 나타내어준다.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슥 4:9).”
본문은 그에 따른 것으로 닷드내의 반대와 재조사로 16년 동안 중지되었다가 다시 재건되는 성전 건축이 다가 좌초 위기에 놓이지만, 결국 이를 다리오에게 묻고 이들의 공사 자체는 중단시키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로 성경은 기록한다. 학개와 스가랴는 저들의 반대에도 하나님을 믿고 재건을 독려하였다. 당시 문제는 반대하는 세력이 아니라 이에 부딪힌 백성들의 무력감이었다. 무려 16년이나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미루기만하고 있던 일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학 1:2).”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현실적인 문제 그 너머를 보는 신앙의 눈이 필요했다.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4-5).”
곧 백성들의 안일함을 그 어떤 죄악들보다 무겁게 다루시고 안타깝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9).” 이에 따른 경고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10-11).” 우리에게 미치는 환난이 주된 목적은 돌이켜 주의 뜻을 살피는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슥 8:2).”
어쩌면 당대에 두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함께 하였다는 것만으로도 어떤 시대보다 복되다. 하나님의 선민으로 안일무사에 빠져 그 무력감으로 시달리는 것보다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것도 없다. 일련의 사건을 느끼면서 우리 생활을 요동치게 하는 목적은 흔들어 깨워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의 잃어버린 사명이 무엇인지를 바로 아는 것이다. 우리의 은밀한 죄악,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엡 5:13).” 이를 돌아보게 하심이 말씀의 이유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살전 5:11).” 훗날에 바울 사도의 전언이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14).”
단도직입적으로 지금의 어떤 어려움도 그냥 어쩌다 생긴 일이 아니다. 우리로 돌이켜 주를 알게 하시려고, 이를 위해 자신을 돌아보아 한 걸음 더 주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장래에 대한 경고다.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 3:7).” 이는 가벼운 일이 아니다. 구르지 않는 돌에는 이끼가 낀다. 파도로 쓸리지 않는 몽돌은 없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6:17-19).”
하여 우리는 선지자, 선견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지정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왕하 17:13).” 곧 우리는 살면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곧 학개와 스가랴의 일이 오늘 우리의 사명이면서 동시에 저들의 독려와 권면은 안이한 우리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말씀이다. 자신은 물론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 한 영혼을 두고 주 앞에 빌어야 하는 이유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 3:17).”
일차적으로는 목사로서의 사명이면서 일반적으로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역할이고 의무이고 권세이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혹은 어느 주방의 설거지 그릇을 헹구는 작은 손의 역할이다.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이와 같은 사명을 잃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다. 세상 말들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늘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실에서 정치적 진영논리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지 말씀을 따라 선한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깨어 있는 것이 필요하였다.
학개는 하나님을 받들어 이를 말하였다. 예언하고 책망하였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학 1:8).” 스가랴 역시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1:3).” 그러니까 우리가 성전을 재건한다는 일은 단순히 건축물을 고치고 세우고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성전 된 자신을 다시금 바로 세우는 일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그리하여 우리가 안일할 때 혹은 낙심하여 침체되어 있을 때, 하나님은 시련과 역경을 동원하신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말씀이 함께 온다.
어제는 필리핀 동생을 인천으로 불렀다. 같이 저수지에 앉아 이런저런 상황과 그간의 일들을 들었다. 우리 모두는 이런저런 자기고집과 아집의 산물이다. 스스로 옳다 여기는 것이 독이 될 수 있다. 성전 재건이 다시 좌초된 것은 저들의 무사주의, 안일주의 때문인 것을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는 우리 영혼을 돌보는 일로 주 앞에서 바로 세워가는 일이다. 그때에,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시 119:98).
곧 어떤 재능보다, 심지어 그 사명감보다 더욱 절실하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이다. 말씀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을 잃으면 모든 것은 헛되다. 그 취지나 목적이 어떻든지 말씀을 기초로 하지 않으면 우린 모두 헛될 뿐이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2-3).” 결국 내 영혼을 소생시키심은,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19:25).
말씀 없이 답은 없다. 성격도, 취향도, 조건도, 나이도, 자격도 한낱 지나가는 바람과 같아서 그것으로 우리가 무엇을 이룬들? 수면 위를 흔들고 세찬 바람이 지나는가 싶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유리처럼 잔잔한 수면 위로 산그늘이 그려져 있었다. 곧 우리로 온전한 길로 인도하는 것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이로써 우리의 그 어떤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오늘 시편은 이에 우리가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첫 편의 노래다. 성전 순례의 시편으로 134편까지 이어진다. 이는 오늘 에스라 본문의 시대적 배경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구환 후의 독려와 권면의 노래이다. 우리로 진정 주를 찬송하게 하는 것은 형통함으로가 아니라 환난 속에서이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120:1).
환난의 장점은 부르짖을 기회에 응답의 놀라운 체험에 있다. 환난 자체로는 솔직히 무슨 일이고 환난이 없는 게 있던가? 다들 번지르르하게 하고 살지만 그 속은 다들 어디가 병들고 틀어지고 외면당하면서 산다. 누구도 평온할 수 없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로 마치 저수지에 가 앉아 있으면 수면 위로 지나는 바람이 들려주는 말 같다. 하나님은 우리로 환난 가운데 두시는 덴 다 이유와 목적이 있었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곧 우리의 택하심이 극적인 이유는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하고’ 이에 하고 순응하는 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119:71).
말씀과 말씀이 이처럼 서로가 연결되어 우리로 주 앞에 세운다. 그러할 때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5-6).” 모두가 어떤 어려움 속에서 결국은 좌초되고 다시 또 신음하며 무사안일하게 빠져들지 않도록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 곧 우리에게만 주신 이 놀라우신 능력,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6).” 즉 ‘능력’ 가운데서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환난이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18:6).
환난이 주는 선물이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118:5).
물결이 출렁거리고 저만치 찌가 요동을 치는 것을 보면서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이는 우리 삶의 가장 명쾌한 답이다. 그러므로 아뢴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2).
나의 것으로나 남의 것으로나 우린 이를 주의 해야 할 것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하여 그 어떤 조언보다 귀한 충언은 무언일 거였다. 말없음으로 말이 힘이 되는, 낚시에서 나는 종종 이를 배우고 온다.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6).” 하여,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39:1).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가?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잠 25:23).” 본래 우리 속의 것이 말로 튀어나와 상대를 할퀴고 지나가면 말한 이는 금세 잊어도 들은 이의 마음에는 멍이 들게 돼 있다. 그러나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0).
살면서 어떤 시기라도 상처 없이 살 수 있는 날이 있을까? 행복하다, 하고 여기던 순간이 도리어 더 큰 고통을 안기기 일쑤인데,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사 9:3).” 이와 같은 우리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가려니까…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3-4).
이를 참으로 알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지혜이고, 주를 경외하는 것이었으며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이에,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5-6).
그것이 누구든지, 어디에서든지, 이로써 주를 가까이 하게 하시는 데 있어 환난은 유익하였고 그 열매는 온전한 것이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1-2).
곧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사 52:11).” 결국은 떠나야 올 수 있다. 우리의 환난은 그리하여 성전을 향해 길을 나서게 한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그러므로 더는 이와 같은 수모를 겪지 않을 것이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