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전봉석 2022. 10. 31. 04:59

 

무릇 하늘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하늘의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삼가 행하라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

에스라 7:23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시 122:8

 

 

에스라서는 B. C. 538년 바사 왕 고레스의 포로 귀환으로부터 B. C. 444년 느헤미야 주도의 3차 포로귀환 직전까지의 내용을 다룬다. 선민들의 회복과 재건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에스라 주도의 2차 포로귀환과 신앙개혁은 오늘 저에 대한 소개로 더욱 명확해졌다. 저는 아론의 16대손이다. 학사 겸 제사장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닥사스다 제 7년 B. C. 458년 1월에 출발하여 4개월만인 5월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특히 저에 대한 왕의 남다른 총애와 그 필요를 공급하는데 있어 이 한 구절의 말씀에서 에스라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짐작할 수 있다. 곧 저와 그 백성들을 돌려보낼 때 그 필요에 따라 자신의 곳간에서 모든 것을 공급하는 데 있어, “무릇 하늘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하늘의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삼가 행하라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23).” 하는 저의 칙령을 눈여겨보게 된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교회, 그 삶이라는 것이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다. 이에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마 3:3-4).” 삶을 스스로 절제하고 구별하여 주의 길을 예비한다는 것에는 오늘도 다를 게 없을 것 같다.

 

주의 백성을 바로 세우시는 데 있어 학개와 스가랴를 세우셨던 분이다.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에스라 5:1-2).” 성경은 우리로 왜 오늘 이 자리에 세우셨는지를 분명히 한다.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 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3:4).” 곧 오늘 우리 모두의 사명이 되고 직분이 된다.

 

오늘 본문은 앞서 에스라의 족보를 여러 구절로 나열하며 거슬러 올라 아론의 16대손인 것까지 밝힌다. 곧 이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예로 그 정통과 신앙을 본받아 오늘을 산다. 하여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곧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말 3:16).”

 

곧 오늘 우리의 이야기는 기록된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야기를 전달하신다. 하여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 4:3).” 곧 우리가 함께 생명책에 있다는 것을 서로가 알아보는 것이 복되다. 이는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큰 복 중의 복은 믿음의 계승이다.

 

나는 안 믿는 가정의 아이들을 대할 때 그 영혼의 외로운 싸움을 위해서 더욱 기도한다. 어제도 한 아이와 점심을 먹고 올라와 대화하는 중에 새로 여자 친구를 사귄 모양인데, 세 번째 모두 다 안 믿는 아이였다. 나는 그 믿음의 발판이 어째서 중요한지를 여러 차례 설명하였으나… 우선은 눈에 보이는 외모나 끌림과 올림에 사로잡히는 게 당연하였다. 본인도 온 가족들이 믿지 않는 중에 홀로 신앙을 이어가고 있는데, 늘 약속하기는 좀 더 깊어지는 사이가 되면 같이 교회로, 성경공부도 하는 것으로 당부하지만 실현되기는 쉽지가 않다. 믿음과 신앙의 바탕이 없을 때 모든 것은 맨땅이다. 한 사람의 영혼을 두고 생각하면, 이는 땅을 고르고 개간하여 척박하고 온갖 잡초나 엉겅퀴와 가시덤불이 자라던 것을 다 뽑아내기까지… 하고 그 흙을 드러내어 옥토로 이뤄가는 데 있어 그 수고가 여간이 아니어서! 그러나 나의 당부는 아이의 귀에 그리 크게 다가가지를 않는 것 같다.

 

우리가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엡 6:8).” 그러할 때 늙어서도 이를 떠나지 않는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믿음의 뿌리가 있다는 것은 다소 그 가지나 줄기가 시원찮을 때도 있지만 언제고 다시 살아나기가 용이하다. 그 환경을 우리 하나님은 조성하신다. 그러므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한다는 것은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를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4, 7).” 그러할 때에 자생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긴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이에 대표적인 인물이 성경의 여러 인물들 가운데서 욥이 아닐까?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 1:5).” 저는 항상 주를 경외함으로 그 자녀들의 혹시 모를 일에 대하여도 항상 살피고 또 주를 경외하였다. 바울에게 있어 믿음의 아들도 실은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실제 우리에게는 언제나 신앙의 동료와 지도자가 필요하다. 우리는 결코 유아독존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서로 나누고 배우고, 이를 지도해 줄 스승이 필요하다. 이는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그래서 바울은 항상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당부하기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2).” 배우는 일과 가르치는 일은 같이 간다. 때로 그 삶이 힘에 겨워 목자의 뒤를 잃었을 때,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아 1:8).” 하여 서로가 곁에서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2:10).” 하고 손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0-11).”

 

고통 없는 생이 어디 있겠나? 저마다의 어려움을 호소한다. 그러할 때 누구에게 조언을 구할 것인가? 믿는 자와 안 믿는 자의 시각이 다르다. 좌와 우의 시선이 너무나 다르다. 이를 분별하고 중심을 잃지 않는 이로 주 앞에 세워지기까지, 우리에겐 성도의 교제와 신앙을 이끌어줄 선생도 필요하다. 이를 유독 에스라의 독특한 족보의 나열을 보며 생각하였다. 나의 기도 중 하나도 우리로 이 가정의 믿음이 그 계보를 이어갈 수 있기를. 교회를 이뤄 한 영혼이 뿌리를 내려 하나의 가족으로 주 앞에 바로 세워지기를.

 

그러할 때 오늘 시편에서 그 이유를 얻는다면… 성전을 오르는 데 있어 환난이 우리로 죄의 자리에서 떠나게 하였다면, 곧 곤고함으로 두리번거리며 도움을 찾다 바로 나의 도움의 출처를 알게 되고, 이어서 오는 기쁨이었다. 그러려면,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삼상 7:3).”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122:1).

 

우리로 먼저 떠나게 하시고 갈등 가운데 도움의 출원을 알게 하시면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곧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27:4).

 

이 놀라운 신앙으로의 전환까지 얼마나 숱한 반항과 갈등과 반복되는 거역과 좌절을 맛보았던가? 그래서도 나는 믿는 가정으로의 결혼을 중요하게 여기고, 믿음의 사람을 만나기를 모두를 위해 바랄 뿐이다. 내가 그 외의 길을 에둘러 너무 먼 길을 돌아서 왔고, 지금도 더는 가까이 할 수 없는 어떤 벽을 느낄 때면, 실은 절망하며 주를 부른다. 부부가 같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주를 바라며 주 앞에 서는 것을 보면 부럽다. 그럴 수 없을 때 서로는 외롭다. 이는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다. 사랑하고 안 하고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같이 하지 못하는 길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이는 나나 상대나 같다. 하여,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84:2).

 

그럴 때 이를 같이 할 수 있는 사람과 짝을 이뤄 산다는 것은 생의 큰 축복이고 은혜이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122:2-3).

 

오늘 시인은 조밀한 성읍을 언급하고 있는데, 마치 서로 한 몸이 되어 살면서 다툼보다 괴로운 게 더 있을까?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마 12:25).” 하여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잠 19:13).” 하나님을 같이 알고자 할 때 이를 같이 할 수 없을 때의 암담함에 있어서는,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5-6).” 한 분이신 하나님을 한 몸이 되어 마주할 수 없을 때의 어려운 심경에 대하여,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

 

그러므로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 우리가 살면서 자주 느끼는 고통은 흔들림인데 이럴까, 저럴까 할 때에 같이 이를 나누어 주 앞에 엎드리는 사람들이 성도들이고 교회이며, 믿음의 사람들이다. 해서 서로가 기도도 부탁하고 속엣 얘기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결코 사람을 보고 저를 의지하려는 게 아니다.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9).” 그렇게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7).” 하면,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100:4).

 

감사할 수 있는 것,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이에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4-5).

 

주의 임재의 자리가 돼야 한다. 그리로 가야 한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4).” 거기에 주의 이름이 있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왕상 8:29).”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6-8).

 

형통이란 그저 하는 일이 잘 되고 뜻하던 게 잘 풀리는 것으로 다가 아니다. 그런 경우 영혼은 병들고 곧 침체하기 십상이다. 세상적으로 잘 나가는 때에 주를 온전히 찾기란, 부자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일만큼 또 어렵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바울의 이 의도적인 괴로움은 이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그러니 무턱대로 잘 되고 좋은 일만 있다고 해서 복 받은 게 아니다. 이를 온전하게 감사할 줄 모르면 망하느니만 못하다. 자칫 그의 성공이 돌이킬 수 있는 기호조차 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도,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