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느헤미야 1:11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시편 126:2
에스라서에서 이어지는 느헤미야서는 B. C. 444년 느헤미야야의 귀환과 그 후 진행되는 예루살렘 재건과 연약갱신, 신앙개혁을 두루 다루고 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야 왕 아닥사스다 왕(B. C. 464-425년) 20년 때에 저의 수산궁에 술 맡은 관원장으로 있었다. 예루살렘이 불타 훼파 되었다는 소식에 본국 귀환을 밝힌다. 이를 위해 4-11절까지의 내용은 수일 동안 슬피 울며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기도하는 내용이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였음을 자복하고, 귀환민들이 처한 상황을 고하고, 그것이 죄의 결과임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깨닫지 못하고 죄를 일삼는 것에 회개하며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주시기를 간구한다. 그때에 저의 근거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으로였다.
고레스의 명령으로 포로들을 1차 귀환시켜 왕이 예루살렘 재건을 위해 칙령을 내려, B. C. 537년 때 이스라엘은 성전을 재건하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지대를 세우고는 16년 동안 공사를 중단한 채 방치하고 있었다. 이어 학개와 스가랴가 공사를 재개하여 4년만인 516년에 2차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었다. 이후 이스라엘은 적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성곽을 다시 재건하다 이를 방해하는 상소로 아닥사스다의 지시로 공사는 중단되었다. 이에 재건된 부분까지도 대적에 의해 훼파되었다는 소식을 느헤미야가 들은 것이다. 하나 저는 술관원의 직무를 맡은 자로 임의로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이를 아닥사스다 왕이 허락하여 주기를 간구하는 기도이다.
느헤미야의 부친 하가랴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어둡게 하다.’라는 뜻이다. 느헤미야의 뜻은 ‘여호와의 위로’다. 본문은 느헤미야가 겪은 수기다. 저들의 이름이 가지는 의미와 같이 느헤미야 시대의 이스라엘은 어둠의 때다. 여호와의 역사하심이 간절하던 시기이다. 1차 귀환 후 약 70년이 경과되는 동안 이 지경이 되었고 2차 포로 귀환을 주도한 에스라의 신앙개혁 이후 다시 정치적인 측면에서 팔레스타인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상황은 일개 포로 귀환자들의 오합지졸일 뿐이었다. 이처럼 핍박과 약탈과 고난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은 주의 도우심만이 해결방안이었다.
이를 신약의 역사로 볼 때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로 가셨던 것을 상기하게 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곧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하여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7:13).”
곧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따른 그의 이야기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다윗과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도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야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다. 이때 우리의 사회적 신분도 하나님의 뜻이 반영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 15:13-16).” 곧 이스라엘을 심판이 기근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이루는데 힘쓴 사람이 요셉과 모세처럼 느헤미야도 당시 그 어둠의 시대에 하나님의 역사에 깊숙이 관여하여 쓰임 받는 인물이다. 곧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행 13:22).”
모든 일의 주체는 하나님이셨다. 수술을 잘 마친 친구가 그 휴가 기간에 인천으로 왔다. 저는 요즘 ‘다니엘 기도회’에 참석 중이다. 그 모든 게 주의 선하심인 것을,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저는 퇴원 후 하루이틀 고통을 호소하다 기도회 시작하는 날부터 움직일만하고 활동할 수 있었다며 이를 우연처럼 말하였다. 나는 그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설명하느라 잠시 성경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말해주었다. 우리의 삶이란 궁극적으로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느헤미야의 바람과 같이 ‘우리의 본향’을 바란다.
곧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1-2).” 죽음을 두려워하며 어떡하든지 하루라도 더 살려고 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느헤미야 아무리 팔레스타인에서 술관원으로 높은 위치에 있다 해도 거기 사람이 아닌 것처럼, 우린 여기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 그러므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 다만 주신 날 동안 건강하게 자신을 관리하며 맡기신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이 우리의 달란트다.
그러나 늘 그렇듯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는 무리는 있다. 저들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다. 곧 팔레스타인과 같이 마치 이스라엘 위에 굴림하며 저들을 좌지우지하는 것 같으나,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그러니 오늘도 다를 게 없어서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3-24).” 우리로 미혹하게 하는 영이 다양하고 교묘하다.
그러므로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8).” 우리가 직면한 날은 당대의 이스라엘이 처한 흑암의 때와 같이 암담하다. 이에 우리의 간절함은 느헤미야의 것과 스가랴와 학개의 것과 다르지 않다. 제아무리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요이 1:7-8).”
우리는 교회를 중심으로 산다. 교회가 어지러우면 같이 흔들리고 교회가 온전하지 못하면 슬퍼한다. 교회는 장차 우리가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다. 예레미야는 이에 탄식하였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렘 4:19-20).” 그렇게 또 하박국은 기도한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오늘은 느헤미야가 주께 아뢴다.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느 1:9).”
그리고 마치 하나님을 일깨우듯 우리의 신분을 밝힌다.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10).” 이와 같이 서로의 고통을 자신의 일처럼 주께 간구한다. 이는 우리의 권리이면서 의무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이는 마땅한 것으로 그다지 와 닿지 않고 별로 관심이 없다면 이는 자신의 영혼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전 12:26).”
그저 담낭을 제거하는 단순한 수술이었다고 하나 저는 이제야 알기로, 그런 거보니 같은 수술을 한 누구는 여전히 고통을 호소하며 고통 가운데 있다. 예전에 고관절 수술을 할 때도 자신은 하루 이틀 만에 회복되어 활동하였는데 하루 더 먼저한 같은 병실의 누구는 같은 부위의 수술이었음에도 자신이 퇴원할 때까지도 고통을 호소하며 입원해 있던 것을 생각했다. 앞서 시력을 잃을 뻔하였던 것도… 그렇듯 새삼 주의 은혜가 ‘너의 기도’ 때문이었나보다, 하는 소리를 객쩍은 표정으로 하는 저에게 우리는 모두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한다’는 데서 사랑에 빚진 자들인 것을 말해주었다. 우연으로 치부하면 그저 팔자소관이었으나 그럼 그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가? 뭐 그리 애지중지하며 살 가치가 또 있겠나? 그러나 우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이와 같은 애끓는 심정은 마땅한 것이다.
작금에 처한 상황을 두고 시시비비 서로가 어느 쪽인가 저울질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사 66:10).” 이를 위하여 우리는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삼하 10:12).”
이를 오늘 시편으로 다시 묵상을 더한다면,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126:1).
마치 저 친구와 내가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자주 놀라운 것과 같은 느낌일까? 어제도 그렇게 말하길,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하고 멀리 구름 낀 수면 위를 바라보았다. 오늘 시편에서 ‘웃음’과 ‘기쁨’이란 표현이 다섯 번 반복되어 쓰인다. 우린 믿음 안에서 가능한 꿈을 꾼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렘 29:5-6).” 이 땅에서의 모든 게 일시적일 뿐이라 해도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2).
반드시 우리가 꿈꾸는 나라는 이루어진다. 이를 알기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곧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8).” 그러므로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81:10).
이와 같은 말씀이 내 것으로 들린다면 은혜요 복이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126:3).
우리가 기뻐해도 되는 이유, 지금 상황이 좋아하고 기뻐할 땐가? 하고 누가 말하겠으나 이를 위하여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사 843:4).” 누군가 날 위해 다신하시는, 이를 온전히 지키지 못할 때에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애굽 땅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넘기리니 그가 그 무리를 잡아가며 물건을 노략하며 빼앗아 갈 것이라 이것이 그 군대의 보상이 되리라 그들의 수고는 나를 위하여 함인즉 그 대가로 내가 애굽 땅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29:19-20).” 은혜와 역경이 한 광주리에 담겼다.
다소 예전 말투로 그러다 또한 ‘다 그런 거지 뭐’ 하는 자세 앞에서 나는 우리가 오늘을 사는 이 놀라운 서사를 들려주고 싶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러므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이 놀라운 은혜…….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4).
여전한 ‘나의 속성’이면서 동시에 주를 떠난 자들에 대하여, 우리가 명심할 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그렇게까지 하시고도 오늘도 우리 주님은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먼저는 내가 돌이켜야 하고 다음은 행여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두려워할 줄 아는 게 힘이고 능력이고 주의 놀라우신 은총이다. 이에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 곧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그러므로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 2:7).” 또한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그러므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