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111편 / 그의 손이 하는 일

전봉석 2022. 11. 4. 09:26

221106 주일

 

시편 111편

그의 손이 하는 일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10).”

 

 

들어가는 말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사 12:1).”

 

줄곧 느끼는 것이지만 고난 뒤에 노래가 따라온다. 찬송으로 고난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다. 고난으로 노래가 멈출 수 있다. 시편 137편에서,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1-3).” 이는 우롱이다.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그러한 때에 노래한다면,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소다 위에 식초를 부음 같으니라(잠 25:20).” 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끔찍한 일인가?

 

슬픔은 우리에게서 먼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떠나게 한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또한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위로를 왔다가 더는 가까이 갈 수 없게도 한다.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13).” 이와 같은 슬픔과 고난과 괴로운 시간을 겪어보면 안다. 일련의 우리 사회 사건을 보면서 우린 서로를 겨누며 마구 말한다. 슬픔을 마주해야 하는 자들로서는 아연실색한다. 서로가 책임을 전가하고 누구하나 진심어린 사과를 할 줄 모른다. 그러할 때 노래는 또한 우리로 슬픔을 견디게 해준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찬송 중에 <내 평생에 가는 길(새찬송가 413장)>이란 곡이 있다. 이 찬송은 호레이셔 게이츠 스패포드에 의해 지어졌다. 저는 사업가로 그의 공장은 한참 번창하였다. 믿음 안에서 늘 주께 감사하며 교회를 돕고, 헌금하고, 하나님의 일에 후원하기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 그의 공장에 화재가 발생했다. 많은 피해가 생겼고, 이를 잘 수습하느라 아내와 딸들을 당분간 고향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저는 아내와 네 딸을 증기선에 태워 곧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하며 고향으로 보낸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저의 딸들과 아내를 태운 증기선이 바다 한가운데서 여객선과 충돌하면서 침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스패포드는 슬픔을 기도로, 기도가 찬송으로 드려지면서 지은 찬송가이다.

 

내 평생에 가는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영혼 평안해… (하략).

 

이를 베드로 사도는 정의하기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5-6).”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이와 같은 설교는 슬픔이 우리로 노래하게 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우리의 찬송은 그러하여서, ‘산이 흔들려 바다에 빠질지라도’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46:2-3).” ‘배가 뒤집힐 듯 바람이 불고 풍랑이 거세게 몰아친다 해도’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막 4:38).” 우린 슬픔으로 노래를 지어 찬송을 부를 줄 아는 사람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죽음의 공포에 질리는 순간에도’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4-25).” 바울은 오히려 죽음 앞에서 다른 성도들의 슬픔과 근심을 안심시킨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은 이처럼 선하고 아름답고 마땅하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시 147:1).” 실은 오늘의 주제라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찬송이 우리로 주를 더욱 찬양하게 한다.

 

우리에게 닥치는 이러한 현상은 힘이 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데서 숨어 있었던 놀라운 저력이 뿜어져 나온다. 그래서도 우린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곧 슬픔 중에도 깨어있다. 예수님도 이르시기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이사야서 35장에서 잘 나타내주고 있는 슬픔과 고난 그 뒤에 있는 그 노래에 대하여,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사 35:1-2).” 다시 말해서 전혀 그럴 수 없는 상황인데도, 우리를 속량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 앞에 우리를 앉게 한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5-6).”

 

이것이 우리가 부르는 노래의 결말로써,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를 다시 이사야의 고백으로 이어보면,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8-10).”

 

이는 장차 우리가 누릴 찬송의 실체다. 곧 우리가 언어로 또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노래는 더욱 풍성하게 포괄적으로 하게 한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앞서 <찬송이 갖고 있는 다섯 가지의 힘>에 대해서 정리하였다.

 

첫째, 찬송은 우리와 상관없는 자들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시 96:2-4).” 하여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4:18-20).”

 

둘째, 찬송은 우리로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을 더한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할 때에 우리에게 슬픔은 노래하게 한다(막 14:22-26).

 

셋째, 찬송은 얽매였던 것으로부터 놓여나게 한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 16:25-26).”

 

넷째, 찬송은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게 한다.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은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시 67:8).”

 

다섯째, 찬송은 세상 모든 권세를 굴복하게 한다.

“여호와여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할 것은 그들이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시 138:4-5).” 이를 “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를 것이며 여호와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바다에서부터 크게 외치리니 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사 24:14-15).”

 

이상의 다섯 가지 찬송의 놀라운 힘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말씀의 중심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본문이해

 

오늘 시편은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의 노래다. 유월절, 칠칠절, 장막절에 불려진 찬송인데, 절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리며 지키는 날이다. 유월절은 ‘넘어간다’는 뜻으로 출애굽을 기억하고 부른다. 곧 애굽에서의 노예생활과 슬픔과 그 해방의 기쁨을 기념하는 날이다(출 12장, 신 16장). 칠칠절은 맥추절 또는 오순절로 유월절 후 첫 안식일이 지나고 50일째가 되는 날로써 봄의 수확인 보리나 곡식을 추수하여 이를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레 23장, 신 16장). 장막절은 초막절 혹은 수장절이라 하는데 출애굽 후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념하고, 가을에 토지의 소산을 수확하게 하심을 감사하는 날이다(신 16장).

 

본시는 다음 장으로 이어지는 112장과 연결된다. 저자는 알 수 없다. 두 시는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각 행 첫 머리가 히브리어의 알파벳순서로 시작하였다. 시를 세분하면 3연으로 나뉜다.

 

1연(1-4절)은 여호와께서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심을 찬송한다. 2연(5-9절)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은혜와 그의 행사와 법도를 찬송한다. 3연(10절)은 여호와를 경외할 것과 그의 말씀을 준수할 것을 권면하고 찬송한다. 이를 토대로 세 가지로 본문을 살펴보았다.

 

첫째,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일에 대한 찬미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은혜에 대한 찬송이다. 셋째, 주를 경외하고 말씀을 준수하는 일에 대한 권면과 찬송이다.

 

첫째,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일에 대해 찬송하다.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시 111:1).”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를 준행함으로 찬송하고 감사하는 기쁨의 신앙이다. 정직이란 주 앞에서 사는 일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140:13).” 즉 우리가 주 앞에서 사는 일이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27:4).” 곧 우리 성도의 삶은 교회를 중심으로 말씀 가운데 사는 공동체의 삶이다. 이를 위하여,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시 111:2).” 무엇을 다 기린다는 소리일까? 이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합당하신 뜻을 알고 슬픔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모두 주의 것임을 찬송하는 일이다. 자주 말하지만 찬송이란 자랑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합당하신 뜻을 나타내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뭘 알아야 나타내고 자랑할 것인데,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저는 누구신가? 우리가 이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 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우리가 이를 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된다. 곧 이를 위하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 이에,

 

“그의 행하시는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111:3).” 그에 따른 증거가 우리는 오늘도 알기 때문에 사회적 분란과 진영논리에 휘둘리지 않는다. 극한 슬픔도 이겨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죄의 유혹’ 곧 안 믿는 자들과 같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느라 하늘의 것을 잃지는 않는 일, 이것이 우리 일이고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다시 말해 안 그럴 수 있게 하시려고 예수께서 죽으셨다! 그러니 ‘사람이니까 다들 그렇지 뭐!’ 하고 스스로를 합리화하지 말라.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이를 헛되이 삼지 않으려고,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4).” 오늘 우리의 사명이다. 이것이 우리 찬송의 근간이다. 슬픔 중에 노래한다. 내 입을 열어 주를 찬송한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두신 지상 명령으로,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곧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

 

성경은 초지일관 이를 우리로 알게 하시려고 아담에서 노아로, 노아에서 아브라함으로, 아브라함에서 다윗과 이스라엘의 역사로 굽이굽이 이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의 기적’ 곧 하나님의 창조 역사와 그리스도의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자비’다. 왜 나 같은 것이 뭐라고, 하나님은 맹세까지 하셨다! 이에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은혜을 노래하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그가 그들에게 뭇 나라의 기업을 주사 그가 행하시는 일의 능력을 그들에게 알리셨도다(5-6).”

 

우리로 찬송할 때에 그가 하시는 일,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알게 하신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1).” 결국 주가 내 마음을 주장하게 하는 일, 나의 주권과 의지와 생각을 주께 내어드리는 일이 평강이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곧 우리가 우려하는 현실에 대하여,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2).” 더 좋은 것을 두고 왜 연연하고 낙심하는가, 하는 것이다. 곧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허물과 실수를 사하여 주신 것처럼 우리의 모든 부족함과 연약함을 다 아신다!

 

그리하여 우린 영적인 눈을 든다. 앞으로 영원히 누릴 영광의 땅을 살핀다. 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그래서 수많은 선교사들과 믿음의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면서도 찬송하였다. 아내와 네 딸을 잃고도 찬송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하고 노래할 수 있다.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 51:6).” 이를 오늘 시인은,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7-9).” 하고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주를 경외하고 말씀을 우리가 준수함으로 찬송한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10).”

 

이를 오늘 본문의 핵심으로 삼으며 ‘나오는 말’을 대신하겠다. 이 시편의 마지막 확언은 우리로 믿음 안에서 어찌 말씀을 듣고 기도가 쉬지 않는 삶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한다.

 

지켜 행하라.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신 4:6).”

 

평안이 있고, 구원과 지식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다.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사 33:6).” 곧 주를 경외함이란 이런 놀라운 변화를 우리로 체험하고 확신을 갖게 한다.

 

‘이 같은 마음’이 하나님의 선하심이고 그의 합당하심이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이 같은 마음이란 즉 주가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

 

자기 하나님께 의지하라.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믿는 가정에서 나고 자라고 그 부모가 구원을 받아 믿음이 좋다 해서 그 후손이 덩달아 주의 자녀인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 하나님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의 기념책에 기록된 내용에 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말 3:16).” 결국 우리가 주를 경외함은 ① 주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고, ② 늘 우리 안에 평안이 있어 구원의 지혜와 지식이 풍성하여지는 일이며, ③ 늘 이 같은 마음으로 주를 노래하고, ④ 자기 하나님과 온전히 교제하면서, ⑤ 천국의 삶을 기념하며 기록하는 일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10).”

 

그러므로 우리의 찬송은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 무궁히 계속 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