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느헤미야 3: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 128:1
느헤미야의 귀환으로 예루살렘이 재건된다. 양문에서 옛문까지, 이곳은 북쪽지역으로 그 공사의 주요명단이 뒤따른다. 북이스라엘과의 접경지역으로 공격에 취약하였고, 그만큼 대제사장의 가문이 주도하여 공사를 이끈다. 심지어 여인들까지 참여하여 옛문에서 분문까지 재건할 때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공사에 참여한다. B. 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던 선민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이 선민의 중심인 성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동체가 참여하고 같이 하였다.
우리의 삶은 일평생 섬기는 삶으로서 예수를 닮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 이를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즉 우리 영혼은 죄로 파괴되어 이 땅을 산다. 이를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보혈로 회복하셨고, 우리는 일생을 이를 재건하며 산다. 우리가 예수를 갈망하며 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즉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의 한 단면을 기록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 영적으로 우리의 성화를 다루는 것으로 다가온다. 곧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3-4).”
우리가 예수를 갈망하는 까닭은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여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그래서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의 이야기로 집약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9).” 이를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살전 5:9).”
앞서 이사야도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사 26:8).” 이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9)” 곧 성경의 이 모든 역사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이 모든 게 구성되었고, 다스려져 왔음을 알게 하신다. 스스로 있는 자, 저는 곧 여호와 하나님이신데 저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곧 말씀은 야훼시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8).” 이 모든 게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이루어졌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시 22:27-28).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이스라엘의 멸망과 재건과 모든 다스리심이,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9-10).” 이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9).”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갈망함은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계 11:15-17).” 이는 장차 이루어질 일이다. 어쩌면 그리 될지 모르는 일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러하였듯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이렇듯 숨가쁘게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벅차오르는 감정으로 저절로 하늘을 우러르게 된다. 곧 도래할 영광을 그리면서 말이다.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사 2:17-19).” 지금은 저들 세상인 듯 마구 모든 권세를 누리는 것 같지만 이는 곧 허상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한데도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하고 성경은 오늘 우리로 힐책하시는 것 같다. 그저 당장의 일로 전전긍긍하며 먹고 사느라 여념이 없는 우리에게 다시금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계 2:26-27).”
겨우 2, 30년의 노년을 위해 중년의 삶을 참고 인내하면서, 길어야 8, 90년의 생을 두고 청소년기 청년의 시절을 모두 투자하면서 하물며 영원한 삶을 위하여 우린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 하는 내용이 나온다. 귀족으로 사는 그 몇 해의 삶을 그리도 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이라니 하물며 영생을 두고 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지. 과연 어느 날,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눅 19:17).” 우린 칭찬을 들을 수 있을까? 이를 위해 무엇을 그처럼 애쓰고 수고하며 살고 있는지…….
우리 주님은 이에 본이 되셨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한데 다들 자기 코가 석 자라, 실제 콧물을 석 자나 흘려대면서 훌쩍거리고 사느라 급급한 삶으로 이와 같은 말씀이 와 닿을 리 없다. 과연 우린 무엇에 투신하고 헌신하며 살고 있을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곧 내가 날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는 일이란, 나의 갈망 그 추구하고자 하는 나의 욕구를 날마다 쳐서 복종시키는 일이겠다. 곧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러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날마다 매순간 자기부인이 없으면 돌아서기 무섭게 나의 욕망이 나를 지배한다. 그러니 늘 내 코가 석 자인 채 사느라 사는 게 아닌 것처럼 사는 것이다. 어느 친구와는 통화할 때마다 죽겠다는 소리만 듣는다. 먹고 사느라 죽겠고, 애새끼들 뒷바라지 하느라 죽겠고, 은퇴하여 새로 맡게 된 어느 지방도시의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하느라 일주일에 몇 번을 서울에서 통영으로 오가며 산다. 그러느라 교회 직분도, 믿는 자로서의 삶도, 장차 곧 도래할 나라에 대한 예비도 모두 관심 밖이 되었다. 예전엔 가장 자주 가장 친밀하게 대화하던 말들이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답하는 정도에서 전부다. 모처럼 통화를 하고 나면 마음 한편이 휑하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16:11).
그리하여 예전의 생활은 죽고 새 삶을 살아야 하는데, 저는 마치 마지막 남은 생의 도전(?)으로 여기며 그와 같은 문화행사에 온 힘을 다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으라 하신 이가 덧붙이시길,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막 8:35-37).” 단지 이 땅에서 전부인 목숨이 아니다. 우리의 갈망이 하나님은 누구신지를 나타내야 한다.
이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인내로써 우리 앞에 남은 경주를 다해야 한다. 우리 영혼의 42.195킬로미터를 완주하기까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나는 오늘 본문에서 저마다의 분배된 역할을 수행하는 저들의 모습과 그 명단을 보면서 어느 훗날 주의 책에 기록되었을 나의 이름과 그 한 일을 상상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 이를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 이어보면 그 의미는 간단하고 명료해진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128:1).
이는 성경의 명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이와 같은 말씀이 얼마나 강렬하게 와 닿는가 하는 것은 저마다의 은혜의 강도가 다른 것이고 이는 자신의 죄인을 인정하는 정도와 비례하며, “…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5:20, 6:1-2).” 곧 우리가 주를 경외함은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 10:2).” 삶의 행적으로 드러난다. 날마다 죽는 옛사람으로 우리는 새사람을 입는다. 하여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에,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2).
이것이 우리의 복이다. 곧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전 5:18-19).” 그러므로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3-4).
이를 다시 지혜자의 진술로 옮겨 보면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전 9:9).” 한데 뭐 그리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고 죽어서 가죽을 남기든 이름을 남기든 그게 뭔 대수라고 다들 그처럼 억척스럽게 사느라고 주를 멀리하고 살다 후회가 또 서러움이 가득한 채 생을 마감하려 하는 것인지…. 듣다보면 참 열심히들 산다. 사느라 살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도 상실한 채 산다. 더러는 이를 버리고 떠나기도 한다.
다시 이사야의 음성을 들어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사 26:8).” 우리는 과연 주의 심판의 날을 기다리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주를 기억하고 사모하며 살고 있는지…….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5-6).
이는 우리 믿는 자들을 위한 축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단해야 한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다들 어쩌고저쩌고 자기 좋을 대로 산다할 때에 우린 우리 자신을 부인하며 주를 따르고 있는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 18:29-30).” 너무 극단적인가? 굳이 그럴 것까지 없을 것 같나? 한데 성경은 일관되게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하면 오늘 나는 무엇을 심을 것인지……. 반드시,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2:27-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