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느헤미야 4:4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시 129:2
주의 일에는 집요한 방해요소가 있다. 오늘 본문에서 산발랏과 도비야가 이스라엘의 성을 중건하는 데 있어 조롱과 독설과 온갖 협박을 일삼는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주의 일을 중단하지 않는다. 도비야의 악의적인 조롱과 협박에 무장하고 일을 하는데,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17-18).”
이를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가져오면 먼저는 믿음으로 그 마음의 평안을 잃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하고 이르셨다. 그 대적은 사랑하는 가족일 수 있고 가까웠던 친구나 의지하였던 사람일 수도 있다. 이에 제자들도 가르치기를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어쩌면 우리가 믿음을 지키며 주의 길을 가는 데 있어 이런저런 어려움은 필연적이다. 이를 바울은 한 발 더 나아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하여 우리는 무장해야 한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엡 6:14).” 먼저는 굳게 서야 한다. 서서, 허리에 띠를 띠고 그리스도의 의를 가슴에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15).” 복음의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16).”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7).”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 곧 말씀을 들고 마주해야 한다. 곧 이 싸움은 단순한 게 아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곧 영적전쟁의 시작이다.
또한 이를 홀로 하는 게 아니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곧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듯 나 또한 누군가의 기도가 되고 저의 고난에 함께 해야 한다. 이는 세상 끝날까지의 일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20).” 곧 이 모든 일은 그저 단순하여 어쩌다 없어질 일이 아니다. 누구의 어떤 시련과 역경을 듣는다. 나로서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안타까울 따름인데, 그리 들어주는 것이 위로이고, 함께 있는 것이 사역이며, 저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 큰일이다. 함께 한다는 것은 주 안에서 저를 생각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그의 일을 마음에 두어 이 마음을 주께 아뢰는 일이 중하였다.
그러므로 스스로 악을 갚거나 노여움을 푸는 일을 성경은 금하신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잠 20:22).” 오히려 선으로 갚으려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 나는 내 의지로 그리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우리로 할 수 있다 하신다. 하여,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그러므로 마음에 아직 어떤 노여움, 그와 같은 상처를 가지고 산다는 일은 온전히 주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반드시 주님은 우리로 그것을 가지고 찬송이 되게 하실 것이라 하셨는데, 여전히 내 안에 어떤 상처를 떠안고 산다는 일은 말이다. 나는 종종 누구에게 나의 그런저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들려준다. 만일 그때의 서러움이 또는 원망이 여전하다면 그러지 못할 것인데, 그런 가운데서도 주가 어찌 도우시고 내 편이 되셨는가를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특히 어릴 때 혹은 학창시절의 기억은 때로 지금도 울면서 깰 때도 있다. 그런데 주의 놀라우신 치유의 손길은 먼저 나로 글을 통해 이를 다 풀어내게 하셨고, 오늘에 이르러는 그 모든 게 은혜였음을 인정하게 하신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3대 절기,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을 지켜 이를 기념하였던 것과 같다. 애굽에서의 그 모진 노예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유월절과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선 후 첫 열매를 거두었을 때의 기쁨과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이신 것을 기억하며… 이를 고생스러운 기억으로 한이 맺혀 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감사하는 계기로 삼고 사는 일이었으니….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37:1-2).
이를 통하여 오히려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나의 생애 가운데서 고백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시인은 계속 이어서 노래하기를,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7-10).
이 놀라운 반전이 성도들의 공통된 찬송이다. 나는 이 일을 경험하면서 누구의 슬픔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함부로 답을 하거나 왜? 하고 되묻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기업은 그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시인의 결말이다.
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18).
오늘 본문과 같이 고난을 인내로 이겨내는 사람들이 우리들, 주의 자녀들이다. 저들과 맞서 먼저 공격하지도 않지만 방심하여 안일하게 굴지도 않는다. 우리에겐 성령의 검 말씀이 있고 구원의 투구를 썼다. 그리스도의 의의 흉패를 붙였고, 믿음의 방패를 들었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말 4:1).” 우린 저들의 결말을 안다. 그리고 우리의 결국도 안다. 곧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2).” 이 놀라운 은혜,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그러므로 이와 같은 문제는 우리의 원론적인 부분을 점검하게 한다.
한때는 이를 스스로 무장하여 훌륭한 사람들을 친구로 두었다. 신기하지만 저들은 애매한 사람들로서 믿는 자들이면서도 안 믿는 자들이었다. 누구는 범신론자도 있어 누구보다 너그럽고 인자하였다. 의사도 있고 기자도 있고 어느 기관의 권세자도 있었다. 그런데 돌아보면 저들의 호의로 나는 주를 더욱 멀리하였고, 돌아오는 길이 더디었다. 저들은 사회적으로나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었고, 아쉬울 때 언제든지 도움을 구할 수 있는 막역한 사이였다. 그런데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곧 하나님을 대신하는 모든 도움은 우상숭배와 다를 게 없는 의존이었고 위로였다. 정작 영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급기야 죽음을 꿈꾸며 남몰래 시들어갈 때 저들에게 그런 나의 모습은 부끄러운 것이고 비난의 이유였다. 심지어 주 앞에 두 손 들고 돌아올 때에 가장 크게 방해하고 말리다 급기야 원수 아닌 원수처럼 등을 돌린 자들도 저들이었다.
이에 예수님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우리를 공격하고 신앙을 저해하는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이었고, 나의 친구요 동료였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오히려 저들과 여전히 적당하고 잘 지내고 있다고 하면 그것이 되레 심각한 일이다. 주를 경외하지 않는 자와 뜻을 같이 할 수 있다? 이는 말도 안 된다. 오히려 환난이 정석이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이와 같은 내용을 오늘 시편은 마치 짝을 이루듯이 같은 주제로 노래한다. 성전을 오르는 노래 열 번째의 것으로,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129:1-2).
어쩌면 이와 같은 고통은 누구나 겪고 안고 짊어지고 사는 일이겠으나 우리는 이를 일찍 알고 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능욕과 박해를 당하면서도 기뻐하며 사는 것,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14:22).” 오히려 이를 통해 믿음 안에서 거할 수 있는 일. 이는 사람으로뿐 아니라 병적으로 유약한 마음과 육신의 약함으로 갖는 괴로움으로도 같다. 이것은 거듭되어 일찍이 어릴 때부터 나를 공격하던 것이었으나,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23:4-5).
이 놀라운 안위와 위로를 주를 가까이 하면 할수록 선명하여진다. 해서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나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도 넘게 넘어지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원망하며 살았다. 한데 내가 의인이란 사실을 알면서 그 모든 것이 그때마다 주가 함께 하심으로 오히려 찬송이 되고 주를 자랑하는 데 있어 ‘남다른 경험’이 되었다. 내가 의인인 까닭은 주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저를 믿음으로 주신, 그리 여겨주심이다. 나의 공로나 의지로는 감히 고개도 들 수 없는 죄인이다. 한데도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10).”
아, 이제 이 말씀이 내 것이 되었다니!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129:3).
이런저런 서러움과 고통으로 치면 억울하고 원망밖에 없으나 그러한 노여움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신다는 놀라운 사실 앞에 나도 가끔은 내가 낯설다. 혼자 그렇게 여행을 자주 가고 어디 가면 망부석이나 된 것처럼 한 곳을 응시하며 꼼짝도 않고 어떤 서러움에 갇혀 있기 일쑤였던 나였다. 한 번은 밤새 바닷가에 앉아 어두운 밤바다를 보면서 어떤 서러움, 억울함, 분노를 곱씹으며 해돋이를 보았다. 오죽하니 그때 한 노인이 새벽 이른 시간에 나와 밥은 먹었는가 물었고, 나 때문에 밤새 잠을 설치며 모래사장을 살폈다고 한다. 마치 금세라도 바닷물로 걸어 들어갈 것 같더라나…. 저는 나를 이끌어 자신의 좁은 방에 데려가 라면에 찬밥을 같이 끓여 주었고 한숨 자라하고 방을 비워주기도 하였다. 거짓말 같은 사실이다. 그땐 그저 우연히 만난 고마운 사람 정도였는데, 저가 내 곁에 오신 하나님이셨겠구나 하는 것을 나중에야 생각하게 되었다.
바울의 신앙처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른다는 일은 이와 같은 것이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내 일도 아닌데, 남의 일로 마음 쓰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이는 베드로의 설교와도 일치한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비록 우리의 고통이 내 등에 고랑을 가는 것 같다 해도,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4-5).
저들의 결국을 우리가 알면서는 부러워할 것도 의지할 것도 없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렘 11:3).” 하여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또는 우리 주께서 임하셨도다(고전 16:22).” 그러니 우리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가? 우리로서 가장 쉬운 일은 주를 사랑하는 것인데, 누구에겐 이 일이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6-8).
저들 보기에는 이런 우리가 부러운 게 아니라 한심하고 처량한 듯 보이겠으나 “그러므로 그 주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사 37:27).” 그러므로 나는 이제 기꺼이 나의 장애도 그 앞서 서러움과 어떤 상처나 마음의 응어리도 보잘것없다. 아무 것도 아니다. 어느 훗날 알게 될 것이다. “가지가 마르면 꺾이나니 여인들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이라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이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이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리라(사 27: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