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느헤미야 6:15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편 131:1
묵묵히 주어진 일에 충성하는 것, 이를 먼저 다윗의 시로 읽고 오래 그 말씀을 머금어 보면,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1).
곧 오늘 주신 한 날의 수고로 족한 줄 알고 사는 일은 매우 그날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본문에서 느헤미야는 유다 총독으로 12째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였다. 그러는 동안 민족의 와해와 반목을 신앙 안에서 하나 되게 하였고, 이를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알고 방해하고 온갖 거짓과 술수를 일삼는 무리들을 개의치 않고 주만 바란다. 특히 마지막 10-14절로 보면 느헤미야를 음해하려 산발랏이 사주한 스마야의 거짓 예언에도 느헤미야는 목숨을 구하고자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지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저가 주를 의뢰하며 간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느 6:14).”
우리 신앙의 달음질은 장거리 경주와 같고 긴 항해와 같다. 그때에 수시로 우리를 방해하고 그릇 가게 하려는 여러 난관이 찾아든다. 우리 삶에 산발랏과 도비야, 게셈과 같은 일들이 수두룩하다. 그때에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은 저것들의 위협이 아니라 스스로 선 줄로 생각하는 일이다. 이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이를 오늘 시편 다윗의 노래 첫 행에서 그 일을 맞서 견줄 수 있는 것이,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하는 순응과 순종의 마음에 저력이 있다. 때론 보란듯 상대하고 싶을 때도 있다. 이를 참다 화가 또 분이 올라올 때도 있다. 한데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설령 내었다 해도 이를 길게 가져가면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게 된다. 과연 누굴 마음에 두고 미워하면서 주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던가? 이에 바울은 나이 들어서도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곧 우리가 향하는 길은 이 땅에서 그 무엇도 저해가 될 수 없다.
어제는 장모가 진지하게 물었다. 곧 음력 무슨 날인데 아무개의 제사로 이제는 추도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이 일을 두고 아들네에 다녀와도 되겠나?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체 죽은 자에 대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며 추도예배라 하는 것도 그 자녀들이 저를 기억하며 서로 위로하고 주 안에서 경건하고자 하는 의도이지, 죽은 이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때가 되면 아무 날 아무 시에 모여 제사를 변조한 추모예배라 하여 드렸다고 하여 그 일도 그만두는 게 옳다고 말하였다. 장모는 본인이 돌아가시면 누가 제사를 지내주는가, 하고 안 믿는 손자가 묻더라는 말로 우회하여 다시 물었다. 그 날은 형님이나 아내나 저와 자식들이 어머니를 떠올리며 한 자리에 모여 서로 위로하고 주 안에서 교제하고 예배드릴 수 있다, 하고 설명하였다.
말 나온 김에… 우린 누구의 죽음을 두고 ‘명복을 빈다’는 표현도 옳지 않다. 우린 남은 가족들을 위로하고 저들의 슬픔을 같이 하는 데 주의 인자하심으로 마주하는 것이지 죽은 자를 위한 일체의 어떤 의식이나 행위도 옳지 않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 12:27).” 이미 죽은 자는 하나님과 같이 있던가, 더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있던가, 우리 산 자들이 그리로 갈 뿐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여러 곳곳에 문화나 관례라는 미명 아래 너무 많은 우상숭배가 버젓이 자행된다. 교회는 사람들의 마음을 붙들기 위해 더러는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것을 수용하기도 한다. 늙으신 장모는 빠르게 나의 설명을 이해하였고, 자신을 돌아보며 좋아하는 찬송을 흥얼거렸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
(새찬송가 438장).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 곧 우릴 위협하는 것들이 수시로 인다. 이때 우리의 가장 큰 유혹은 타협이다. 적당히 받아들이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자칫 그럴 듯하나 함께 할 때 틈을 노리는 것이 사탄의 전형적인 술수다.
저의 목적은 하나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더하여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우리 곁에 너무 많다! 저들은 세속화되고 정치화되어 사람들을 선동한다. 그러면서 광명의 천사 같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어느 때보다 우리의 지혜와 분별력이 필요하다. 바울은 이에 대해 아주 강경하였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전 10:21).” 우리가 무심히 쓰는 말, 또는 그 행위 가운데 얼마나 많은 미신적인 것들이 스며들어 있는지 모른다. 운이 좋았다느니, 행운을 빈다느니 하는 예사로운 말부터 서로의 다름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종교적 화합을 꾀하며 이리저리 쓸려 다니듯 사람의 감성과 이해와 판단을 따르는 행위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우리의 기준은 말씀이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5-6).” 그런데 서로가 하나 되는 것을 마치 사람 사는 사회에서 서로의 미덕인 줄 알고 허용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7).”
그러므로 성경은 분명하다. 애매하지 않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그러니 믿는다는 자들이 하다못해 차를 사거나 어디 개업을 할 때도 고사 아닌 고사 같은 예배를 드린다. 나름은 문화고 관례라는 미명 아래 행하는 일일 텐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모두 세상을 좇아 온 것이다. 오늘도 우리 삶에 ‘산발랏과 게셈’이 도사리고 있다! 저들의 방해와 숨은 공격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이에 오늘 시편은 우리의 평안이 어디에 그 출처를 두는지 알게 한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131:1).
이는 오늘 이 시대에 맞지 않다. 얼마나 다양하고 좋은 기회들이 많은지… 예전처럼 농경사회나 유목문화와 달리 너무 많은 기회들이 열려 있다. 이때 오늘 시편은 전편 130편의 시와 연관되어,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130:7).
곧 우리의 숱한 기회와 도전이 자칫 주를 바라는 데 있어 우리의 간절함을 빼앗아 갈 수 있다. 그래서도 시인은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5-6).
하고 앞서 우리의 갈망을 노래한 뒤 이어지는 노래로, 그리하여 우리의 겸손은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게 한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131:1).
이는 오늘날의 도전정신과 정면으로 배치하는 것 같다. 다채로운 문화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 같다. 여기에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더해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눅 22:25-26).” 이는 매우 역설적이고 저항적이기까지 하다. 할 때 우리는 우리 신앙의 근본을 생각하면 된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다시 말해 스스로 높아지려 하면 낮추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이상하지? 한데 성경은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5-16).” 그러므로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10).” 왜 그러는 것일까? 우린 본래 조금만 우쭐해도 여전히 바벨탑을 쌓으려 한다. 스스로 하나님과 견주어 높아지려 한다. 이는 거의 본능적인 죄의 뿌리다. 하여,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75:7).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영광이시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삼상 2:10).” 이는 우리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셨다. 결코 스스로를 넢이지 않으셨고,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이를 우리가 되새길 때 개인적으로 자주 되뇌는 말씀으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세상을 보고 누구를 견주어 생각하면 어느새 오늘 내게 허락하시는 일들이 너무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 같다.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뭔가 이루어 사람들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뿌듯한 자부심을 안겨주고 싶다. 그러나 성경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이 때문에도 나는 선봉에 서려 하는 목사나 ‘나를 따르라’ 하는 식의 주장은 경계한다. 자기변호는 늘어지고 남을 향한 판단은 엄격한 사람들을 주의한다. 그리하여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 10:13).” 하면 이와 같은 평안은 어디서 올까?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131:2).
볼 때마다 눈여겨보는 부분이 그냥 아이가 아니라 젖 뗀 아이다. 나름 자기 의지로 엄마 품에 안김을 의미한다. 그곳이 세상 어디보다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를 나이 든 바울의 또 다른 표현으로 바꾼다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나의 주장과 판단과 기준을 모두 주께 맡김으로 얻는 평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이 놀랍고 통쾌한 메시지가 이 짧은 시에 담겨 오늘을 사는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우리의 눈과 귀와 영혼을 명쾌하게 하는 일, 우리로서는 복잡할 게 없다.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우리가 주 안에 산다는 일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럴 수 있는, 그래야 하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1-3).” 또한 내가 자주 되새기는 말씀으로, ‘위의 것을 생각하라.’ 하심에 대하여,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3).
이 간단명료한 진리 앞에서 자꾸 어지럽고 복잡하고, 그래도 그럴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는 것은 ‘세상을 쫓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지 않던가?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구약의 마지막 성경에서 저 또한 간절히 전하고자 하였던 것은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말 2:15).” 우리가 주를 바람은 이와 같아서,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