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그릇들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느헤미야 10:39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시편 135:1
율법을 준수하고 이에 그 언약으로 인봉한 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로부터(1), 제사장들(2-8), 레위인들(9-13), 족장들(14-27)의 명단이다. 총독 느히미야와 시드기야를 제외한 제사장과 족장들 대부분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가문의 이름이다. 이러한 명단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는 성경을 볼 때면 나의 이름이 어디에 기록되어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9장 38절에서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하였느니라.” 하고 오늘 그 명단으로 이어지는데,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그 명단으로 일일이 기록해두는 것이 의미 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스스로 파기하고 그릇 행하여 하나님의 징계가 이르게 된 것까지, 문제의 원인이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잘못이었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금식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분명히 앞서 조상들도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수 7:11).” 하고 자복한다. 오늘 37절 말씀을 연결하면 그리하여 관계 회복의 첫걸음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 돌리는 일,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의 여러 방에 두고 또 우리 산물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산물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그의 은혜로 얻은 것이나 그에 따른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으로 따로 구별하는 데는 그 중심을 알게 한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호 14:2).” 곧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하여 우리로 주 앞에 온전하게 세우는 실행의 척도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데서 십일조의 중심은 신앙의 척도가 된다. 그러할 때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 3:19-21).”
또 하나는 지도자의 솔선수범이다. 명단의 정치 지도자들을 필두로 종교개혁과 그 신앙을 회복하는 데 있어 앞장 선 자들의 명단은 훗날 하나님과 사람 앞의 영광이 된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하는 말씀으로도 오늘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이 어디서부터 뒤틀리고 있는지 알게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여서 누가 그 교회를 다니는데 있어 마음이 어려운 것을 호소할 때에 보면 실제 성도 간의 문제보다 목사나 교사와의 관계에서 불편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하고 엄중히 경고한 바 있다. 바울도 이르기를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롬 2:21-23).” 하고 지도자들을 꾸짖는다.
누구나 신앙이 자라 또 누구에게 본이 돼야 하는 일은 당연하다. 한데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 5:12).” 점점 더 퇴보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실패하기 때문이다. 설령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존경을 받으나 되레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까지 그릇 행하게 하는 자들도 많다.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기를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7-8).”
이에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회복이 바른 드려짐에서 비롯된다면 공동체의 회복은 그 지도자들의 올바른 자세와 삶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보면 교회 공동체의 부패와 타락도 같아서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렘 6:13).” 똑같이 에스라 시대에도 “제사장의 무리 중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는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 그의 형제 마아세야와 엘리에셀과 야립과 그달랴라(에 10:18).” 결코 지도자라 하여 완전할 수는 없다. 사람은 모두 다르지 않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결국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3).” 결국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4).”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우선하는데 그 결행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십일조, 곧 헌물과 헌신의 개혁에서다. 다음은 앞선 자들의 바른 행실과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으로다. 그래서도 바울은 나이가 들어서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는 결코 괜한 각오나 결심으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후 4:1-2).”
여기서 첫째,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은 자신만 안다. 그 양심에 화인 맞은 자는 더 이상 찔림도 없다. 둘째,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이 또한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가려질 수 없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실제 이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다. 좀 더 안다 하여 늘 가르치듯 남을 대하고 비판하려 드는 자가 많다. 하여 넷째,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와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그리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에서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행실과 마음을 바로 하는 것으로, ‘스스로 추천하노라.’ 자원하는 심정이 드러난다.
누구의 고민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그 교회는 담임 목사의 주일 설교로 한 주간 묵상과 교사 성경공부와 아이들 성경공부의 교제로까지 활용하는데, 한 사람이 유독 설교 때마다 혹은 어떤 주제에 대해 그리 반론을 제기하는 모양이다. 저는 모 교회 제자훈련을 받고 교사로 오래 일하였고, 그 교회의 분파로 튕겨 나와 그 교회로 온 사람이었다. 워낙에 공부도 많이 하고 신학도 하여 목사안수만 받지 않았을 뿐 거의 그 성경에 대한 지식은 남다른가 보았다. 그러다보니 저에게는 겸손이 결여되었고, 사사건건 담임목사의 설교에 토를 달고 급기야 어떤 주제로의 설교를 요구하기도 하는 모양인데… 목사는 그 일로 늘 어려움을 겪고 성도들도 마치 또 하나의 목사를 둔 것 같다는 볼멘소리가 튀어나오나 보았다. 어딜 가나 그런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좋겠나? 하고 묻는 이에게 우선은 교회와 주가 세우신 종을 위하여 기도할 것과 저를 대하여는 옳고 그름을 떠나 저의 행실을 보고 배우고 판단하라 말해주었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6-7).” 아가서에 표현된 것을 보면 저와 같은 경우는 ‘작은 여우’ 같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아 2:15).” 헤집고 망치고 뒤를 돌아보며 경계하고 소심하면서도 남의 것을 망가뜨리는 데는 저만큼 속수무책인 것도 없다. 이를 오늘 시편으로 다진다면,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135:1).
곧 우리의 제일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이 말씀은 우리 본질을 가장 잘 나타낸다. 우리 안에는 열망이 있다.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우리는 지음 받았다. 모든 자연이 이에 충실한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이를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서도 자기들 좋을 대로 누군가에게 소원을 빌고 나름의 선을 두고 산다. 하물며 성도들로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103:1-2).
곧 우리의 찬송은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일과 비례한다. 얼마나 자신이 엄청난 죄인이었음을 알면 알수록 겸손은 자동적이고 주를 찬송함은 자연발생적이다.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47:5-6).
곧 우리 성도의 신앙이 어떠한지, 스스로를 점검할 수 있는 척도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곧 조금만 주를 알고 저를 두려워할 줄 안다면,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이는 우리 구원이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그래서 스스로를 알고 누가 어떠하면 저의 처사로 알 수 있다.
그래서도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 그런 거 보면 가장 무서운 사람은 우매한 자이다. 자기 고집으로 자기 스스로도 자신을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놓인 사람들… 그런 자들이 정치인으로 있고, 교회 지도자로 있다면 그야말로 그 나라와 그 교회는 반목과 분란이 끝이 없다.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135:2-3).
오늘 시편은 오늘 우리의 정화운동 곧 온전한 회복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게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린다. 곧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3-24).” 그리하여 주의 말씀 앞에 자신을 앉히는 일, 그의 말씀에 눈길을 두는 것,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0-12).” 그러므로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
(5).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8-29).” 나는 종종 왜 하필 나 같이 부족하고 연약하며 보잘것없는 자로 주의 일을 행하게 하시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이 말씀을 입안가득 머금는다. 그러다보면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6).
아, 하고 어떤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곧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이로써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심인 것을 알면 알수록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나의 기쁨의 출처가 밝혀진다. 그렇게 하여,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 대대에 이르리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
(13-14).
왜?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살후 1:5).” 하여 오늘의 이런저런 어려움도 다 그 이유와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오늘을 좌지우지 하는 데 재물이고, 이는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15)
그리하여서도,
예루살렘에 계시는 여호와는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할렐루야
(21).
덩달아 세상을 추구하는 데 대하여,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84:8-11).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온전히 회복한다면,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32:11, 150: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