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고 왕이 내 소청을 허락하시며 내 요구를 시행하시기를 좋게 여기시면 내가 왕과 하만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에 또 오소서 내일은 왕의 말씀대로 하리이다 하니라
에스더 5:8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시편 143:10
에스더는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왕 앞으로 나간다. 금식을 하며 기도한지 3일째 날이다.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그 심정이 어떠하였을지 상상을 해본다. 그런데 주의 역사는 이제부터다.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1-2).” 그때 왕이 그쪽을 보고 있었던 것, 먼저 왕의 눈에 에스더가 띈 것, 그 모습이 ‘매우’ 사랑스러웠던 것….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그러하였고 당장은 두려움으로 앞으로는 염려로 마음이 어려운데, 하나님은 일하신다. 주의 일을 행하는 데 있어서도 두렵고 걱정이 늘 앞서지만 믿음의 용기로 내 발을 내딛을 때,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사 26:7).” 성경은 늘 이를 밝혀준다. 하면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말씀을 떠나지 않게 하고 이를 지켜 행함으로 이러한 일이 가능하였다.
또한 그럴 수 있는 것이 앞서 금식하며 기도하였던 힘이다. 다니엘도,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스데반 집사도,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모두가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오늘 시편의 첫 구절도,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시 143:1).
우리의 기도는 겉으로가 아니라 속으로 한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곧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이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들려주려고 하는 게 아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7).” 또한 우리가 금식할 때도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16-17).” 그러할 때 기도는 내 품으로 돌아온다.
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35:13).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만족하려는 기도나 금식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이를 하나님은 혐오스러워하신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왜 그런가?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사 58:4-5).”
기도는 주께 상달되고 그 소원은 내 품으로 와야 한다. 이에 이사야가 전하여 주는 그 다음 내용을 묵상하며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곧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는 곧 실질적인 삶으로 주가 바라시는 일에 자신을 헌신함으로,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6-10)”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기도를 위한 기도가 아니고, 금식을 위한 금식이 아니라 삶으로의 투신이다. 그러할 때,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11).”
‘메마른 곳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물댄 동산 같은 샘’이 우리 기도의 능력이었다. 운다고 다가 아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행 21:13).” 몸을 던져 승부를 보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누구와의 대화에서 어느 이름 있는 교회에서 ‘창조과학’을 주장하며 말씀을 또한 교회 사역을 행한다는 말을 하였다. 어찌 생각하는가? 하고 묻는 말에 대뜸 드는 생각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는 말씀이 말씀이겠나?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신학이 신학이겠나? 논리적으로 이를 입증할 수 있는 하나님이 더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겠나? 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도, 우리의 신체도 다 알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성경을 또한 하나님을 우리의 지식과 이해로 안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그리 알려 하고 알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바벨탑인 셈이다.
과학적으로나 이성적으로는 우리 신앙이 무모하다. 오늘 에스더의 행동도 그 결단도 한심할 정도로 무모하였다. 이를 안 믿는 시각으로는 ‘운 좋게’, ‘다행스럽게’ 하는 따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그 자체가 불신앙의 이해다. 나는 누구에게 이단이니 아니니 하는 자체가 의미 없다고 말하였다. 희한한 일이지만 그리 여기는 자들은 그리 여겨야 직성이 풀린다. 곧 그 자체, 스스로를 만족하려 하는 것이 성경의 진리와 배치된다.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 마음까지도 주도하신다. 하필, 바로 그때, 아하수에로 왕의 눈에 에스더가 먼저 보였고 그 모습이 매우 또 사랑스럽기까지 하였다!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에 5:2).”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도 감동시키심으로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스 1:1-2).” 이를 어찌 사람의 과학으로나 철학으로 입증하고 논증할 수 있겠나?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바벨에 모여 탑을 쌓던 사람들을 연상케 한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우리 스스로 그 자신의 마음도 다 헤아릴 수 없고 확증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우리가 바랄 것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51:10).
이는,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
(33:15).
그러므로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나는 종종 이런 데서도 주의 놀라우신 지혜를 얻는다. 어제 우연처럼 스치듯 지나간 아주 사소한 말이 마음에 남았더니, 오늘 아침 말씀 가운데서 이렇듯 주가 열어 보여주시는 것으로 놀란다. 그러므로 나는 아주 지극히 사소한 일상의 것들도 그의 말씀으로 비추어볼 때 새롭다. 가령 일련의 어지러운 상황 중에 대통령내외의 외교를 두고 이런저런 해석들이 분분한데 그 성과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나는 누구의 모습에서 지극히 혐오스러운 마음으로 역겹기까지 하였다. 가난한 나라의 불쌍한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사진들이 말이다. 대통령실의 기자들이 의도한 것인지 본인이 설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동안 어느 장애인 특수학교를 주말마다 가곤 했었다. 중3 때 교회 학생부 전도사와 함께 갔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종종 여느 기관이나 단체 또는 기업에서 방문을 하는데, 아이들을 그때마다 운동장이나 강당으로 모여야 했고 저들이 후원하는 물품 앞에 서서 억지웃음을 강요당했다. 나 역시 몇 번 어쩌다 아이를 안고 그 앞에 서곤 하였는데, 그럼 원장은 저들과 기념촬영을 하였고 저들은 그런 뒤 아이들과 어떤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은 후에 사라졌다. 아이들을 데리고 각자 방으로 가거나 강당으로 모이면 개개인들에게 나눠주는 과자나 빵을 받고 기쁨도 아닌, 슬픔 같기도 한 미소로 꾸역꾸역 그것을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구겨 삼켰던 기억이 중첩되었다. 몇 년을 자주 드나들다보니 나 역시 그 자리에 있다 그런 경우를 경험하곤 하였는데, 정신이 온전한 아이들 사이에서는 어떤 모멸감으로 치를 떨기도 하였다.
나는 예수님이 왜 그토록 그런 자들을 향해 화를 내셨는지 알 것 같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2).” 내 안에 어떤 각인된 선입견이 설령 오해를 가져온 것이라 해도, 다른 모든 것은 차치하고 그와 같은 모습을 무슨 화보사진처럼 내보이며 마치 저들을 액세서리처럼 인격도 없는 존재로 삼은 것을 보고 혐오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1).” 부디 무언가 의도하여 그리 행한 것이 아니기를… 오죽하니 주님은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눅 14:13).” 이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한데 이것이 어떤 목적을 띈 것이면 더는 뭐라 할 말이 없다. 이처럼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데, 하물며 무슨 얼어 죽을 창조과학이니, 현대신학이니… 우리의 모든 것이 신비다. 가려져 있는 계시의 영역이다. 하나님이 열어 보여주시는 만큼만 안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덴 그래서도 주를 더욱 바로 알기 위함이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3).” 그러니 우리로서는 ‘그의 뜻’을 구하는 게 능사다. 오늘 에스더의 등장과 이를 본 아하수에로의 눈길은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이다.
이를 시편으로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다.
우리의 기도도 그 마음도 그에 따른 금식이니 각오니 결단이니 하는 것들도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할 때 온전하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왕하 20:3).” 우리가 주 앞에서 행하는 그 어떤 일도 우리 스스로의 선이 될 수 없고 의가 될 수 없다. 그리할 수 있게 하심도,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가 주가 행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143:1-2).
우린 모두 죄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 그러므로 우리에게 당연한 것은 심판뿐이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1-22).”
고로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욥 25:4-6).” 이는 욥의 친구 수아 사람 빌닷의 말이다. 그의 말이 옳다.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9:2).” 욥의 말이다. 저들은 서로 다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전 7:20).” 선을 행하는 일이 악을 저지르는 일보다 조심스럽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나를 암흑 속에 두었나이다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2-4).
결국 우리의 씨름은 사람도 아니고 자신도 아닌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그러므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그러니 부디 정신 차리자. 스스로에게 당부하게 되는 아침이다. 그러므로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8,10).
이 땅에 사는 동안 공연히 헛발질 하지 않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2).” 반드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라,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