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욥기 2:10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 150:6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고 괴로워하던 중에도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1:20-22).” 하는 놀라운 신앙을 보여주었다. 한데 이번에는 저의 육신의 질병으로 심한 고통 중에 놓이고 이를 지켜보다 이내 그의 아내는 견디지 못하고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2:9).” 하고 저의 곁을 지키지 못한다.
이때 욥의 태도는 참으로 놀랍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10).” 는 평소 저의 생활이 어떠하였을까? 하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저의 세 친구들은 눈 앞에 펼쳐진 저의 고통당하는 모습에 망연자실하여 7일간 가까이 가지도 말을 걸지도 못하고 함께 슬픔을 같이 한다.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12-13).”
실제 우리의 고통 중에 더는 꼼짝도 못하게 하는 것이 질병이다. 질병은 몸을 볼모로 잡으면서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영적으로 그렇고 육적으로도 그렇고 사람을 가장 질리게 하는 것이다. 곧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눅 9:39).” 이는 예수께서 저를 명하여 그의 몸에서 나오라하실 때에 끝까지 저항하는 모습이다. 그렇게 하여 “사람의 심령은 그의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잠 18:14).” 곧 우리의 영혼을 장악한다.
이때 그럼 우리의 가장 지혜로운 대처는 무엇일까? 오늘 8절에서 그 단서를 찾으면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8).” 곧 그 가운데 욥이 내려앉았다는 말씀에서, ‘고난으로 가장 낮아진 상태’가 되는 것이다. 저의 모습에서 우리를 대신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질병도 죄의 한 결과이다. 모두가 죄인인데 따른 여러 고통 가운데 육신을 옭아매는 질병은 사람을 그 영혼까지도 피폐하게 한다.
이때에 욥을 또 다른 면모가 주를 인식하는 것이었다. 이를 그의 아내의 모욕적인 발언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그 와중에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는 욥을 대할 수 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9).” 이 모든 일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이에 차라리 욕하고 죽으라, 함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나타낸다. 이를 보면서 우리가 어떠해야 할지를 가늠하게 된다. 곧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 29:11).
곧 우리가 고통 중에 있다 해도 평안을 우리에게 더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사 57:2).” 장모와 같이 생활하면서 저의 노구(老軀)의 고단함이 때론 내게도 가중되는 것 같다. 곧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피할 수 없는 여정이기는 하겠으나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이때의 인내 또한 주가 더하시는 긍휼하심으로 가능하였다.
고통 중에 가장 이기기 힘든 것이 있다면 그 입의 말들이겠다. 은연중에 나오는 부정적인 말은 물론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말의 위력은 끔찍하다. 그래서도 욥의 아내가 이해가 된다. 욥의 무던함은 오랜 기간 연마된 침묵과 고요가 아닌가싶다. 이에 오늘도 구한다.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사 6:7).” 곧 입으로 죄를 짓지 않기란 그만큼 숙련된 신앙이 필요하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141:3).
곧,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39:1).
평소의 우리의 인품은 물론 신앙의 깊이도 말의 무게와 같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늙어서도 한없이 가벼운 신체는 입이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 이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이는 아무리 생각하고 각오하여 결심한다 해도 돌아서기 무섭게 악을 쏟아내기 십상이다.
그런데 오늘 욥의 모습에서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하는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10).” 말이 쉽지 말보다 앞서는 것도 없다. 또 하나는 그 친구들의 모습에서 슬픔을 같이 한다는 데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 더 큰 위로도 없는 것 같다.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12-13).”
슬픔을 같이 하러 온다는 것. 함부로 다가가지도, 뭐라 쉽게 말하지도 않고, 가만히 지켜보며 같이 슬퍼하는 모습이 놀랍다. 이 또한 평소 숙련된 자세에서 나오는 것 같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그래서도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4).” 그리하여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2-3).”
어쩌면 우리의 사명 중 가장 귀한 것이 힘든 자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은 여러 곳에서 함께 하는 의미를 일깨우신다. 이를 아예 계명으로 더하셨으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합심하여 서로 같이 기도한다는 것으로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이에 우리 가운데 주가 함께 계시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20).”
곧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1-4).” 곧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는 일이 성도의 기본이다. 우리가 눈에도 안 보이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그래서도 가끔은 이를 마음에 다진다. 누구를 대할 때, 어떤 말을 연거푸 듣고 또 듣는 일에서, 주님의 마음을 바란다. 내 마음으로 내 의지로는 어림도 없다. 일례로 ‘한 아이’를 대할 때 나는 오히려 주의 이름을 되뇐다. 일반적인 대화도 어렵지만 요즘 무슨 방송을 하면서 저들과 어울리는데 있어 우려를 표하면 이를 듣기 싫어할 뿐 아니라 시무룩해져 표정이나 말투도 달라진다. 병적으로 충동구매를 하는데 입이 쩍, 벌어질 그와 같은 씀씀이에 이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또는 ‘어떤 이’의 같은 고초에 대해 듣다보면 뭐라 이른들 소용이 없는 데서 벽을 느낀다. 저는 분명히 그게 문이라고 하는데… 닫힌 문은 벽과 다름없다. 자기 생각이나 그 틀에서 고집을 부리는 데는 별 수 없다. 그러니 나는 저의 말을 들으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수밖에. 주 앞에 고하고 주가 어찌 좀 해결하여 주시기를 바라면서….
말의 기술은 듣기에서 판가름 난다. 들어주는 것만으로 말의 완수는 다하는 것 같다. ‘참다운 친구는 고생할 때의 친구’라는 말처럼 어려울 때 있는 듯 없는 듯 일심(一心)으로 곁을 같이하는 이가 진짜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하고 주가 물으시는 것 같다(25-37). 이에 나는 하나 더 배우는 것이 주께 아뢰는 일이다. 같이 마주하여 저의 일을 두고 있으면서 주께 아뢰는 것. 특히 가족에게 있어서는 서로 잘 안다는 것으로 이미 말의 효과는 떨어진다. 그런데도 부모라고 해서, 부부라고 해서 뭐라 이르고 탓한들 소용없다. 그러느니 자꾸 주께 고하고, 나에게 한 가지 더 큰 무기는 설교를 통해 말씀으로 증거 하는 것이다.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저가 어찌 받아들이는지는 내 몫이 아니다. 성령이 하실 일이다.
이에 말의 지혜는 주를 찬송하는 데 있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150:6).
주를 찬양하는 동안에는 일체의 말을 삼갈 수 있다. 저는 누구신가? 온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하시고 조성하시며 다스리시는 이시다. 이를 오늘 시편은,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1-2).
권능의 궁창은 우리의 찬송으로 울려 퍼진다.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들과 고관들과
땅의 모든 재판관들이며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148:9-13).
이는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의무이면서도 특권이다.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 19:38).” 결국은 그러하여서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3-14).” 이에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15:4).” 우리의 최종적인 모습이면서 영광이다. 그 어떤 고통도 질병도 우리로 찬송하지 못하게 할 수는 없으니,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150:3-4).
곧 찬송은 주를 의지하는 것이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0:3).
이때에,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150:5).
큰 소리, 모든 고통의 소리를 잠재울 수 있는… 높은 소리, 그 어떤 악다구니보다 높이 더 높이 오를 수 있는 소리는 찬양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51:10-12).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찬송이었다. 곧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곧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6).” 그러므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그러할 때에 가능하였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150: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