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전봉석 2022. 11. 30. 04:43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욥기 4:6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편 2:11

 

 

욥의 탄식어린 독백으로 인하여 친구들 간에 논쟁이 벌어지는 빌미가 된다. 먼저 가장 나이 많은 친구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변론이다. 저는 자신의 경륜과 철학을 가지고 변론을 개시한다. 욥의 탄식에 대한 질책과 단정적인 언사가 틀린 말이 없다. 저는 침착하고 논리적이며 바른 말로 힐책한다. 욥의 탄식은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모두 저를 힐문하는 식이다.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3-5).”

 

이는 종종 내가 내 자신에게 들이대며 되묻곤 하는 말이다.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6).” 이처럼 묵상을 하고 그것을 글로 쓰고 기도하기 무섭게 혹은 설교를 하고 누구에게 바른 말을 하고 난 뒤에 아니나 다를까 그게 도로 나였다. 마치 개가 그 토한 것을 먹고 돼지가 씻은 뒤에 도로 배설물 위에 가서 눕는 것처럼… 우리 속의 엘리바스는 언제든지 자신을 책망하고 추궁하고 궁지에 몰아 의기소침하게 한다. 저의 말은 어디 한 군데 옳지 않은 게 없다. 그런데 성경의 초점과 다르다. 가령 엘리바스와 같은 인과응보적 사고는 현세의 것을 두고 공격적이나 성경은 종말론적인 사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죄의 근본은 수없이 저지르는 우리의 실수와 허물을 두고 일컫는 게 아니라 원죄 곧 영원한 형벌에 따른 문제이다. 어쩌면 그래서 바울은 애타는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설교하였던가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심은 부르심에 대한 소망을 온전히 이루려하심인데, 마음의 눈이 어둡다면 죄의 심각성 곧 세상의 실상을 바로 알지 못한다. 죄의 위력을 모르기 때문에 방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수 있지’ 하고 허용하는 게 는다. 내버려둠으로 자신을 나타하게 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시 114:1-2).

 

곧 영적으로 우린 ‘애굽을 나온 야곱의 집안’이다. 우린 하나님의 성소가 되고 그의 영토가 되었다. 선민의식은 상대적으로 죄의 심각성을 알 때 효력을 발휘한다. 가령 어제 무슨 기사를 읽다 ‘척수성근위측증 치료제 졸겐스마’를 맞은 환자가 7명인데, 그 주사 한 대가 20억이라고 하였다. 이 졸겐스마 정맥 주사 한 대로 병의 진행을 막고 치료할 수 있다고 한다. 이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 그 질병의 심각성을 알면 그 치료나 처방의 위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속해 사는 ‘애굽과 같은 세상’에서 나온다는 일이 그리 간단하고 사소한 게 아님은 그 죄의 심각성을 알면 알수록 크다. 하다못해 고통을 아는 사람은 진통제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첫째, 애굽의 죄악성을 알 때 출애굽의 필요성을 안다. 둘째, 애굽과 같은 세상에 속해 살 때는 죄의 문제가 그리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셋째, 애굽에 있을 때는, 예수님이 이를 위해 십자가 달려 죽기까지 그 속량의 값을 지불하셔야 했다는 것에 별로 와 달지 않았다. 이를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9절에서 그 목적을 알고 우리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던 것과 오늘 엘리바스의 말에서 나는 찔림을 느낀다. 찔림은 무엇을 알았다는 것이다. 알아야 하는 그것, 이를 바울은 첫째, ‘그의 힘의 위력’ 곧 예수의 위대하심을 알았다고 한다. 둘째, 그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기업이 얼마나 귀하고 풍성한 은혜인지를 알았다고 한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크신 능력을 알았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안 것이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주의 은혜의 풍성하심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 힘의 역사에 따라 오늘도 이처럼 말씀 앞에 앉게 하시는 놀라운 능력을 나는 알았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바스는 ‘욥의 염증’을 예견하였던 것처럼 말한다.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욥 4:2).” 여기서 ‘싫증’을 앞서 <개역한글판> 성경으로 다시 읽으면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 날지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곧 ‘염증’으로 표현되었음을 본다. 모진 고난 앞에 장사 없다. 욥은 절망하였고 삶의 ‘싫증’, ‘염증’이 났다. 이런 상황에 누구의 옳은 말인들 그 귀에 들어오겠나?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말이 의미가 없어진다. 신앙이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만큼 사람을 정죄하거나 비난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굴복시키려 하지 않는다. 이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입이 오히려 큰 위로가 된다. 같이 아파하고, 같은 고통을 느끼는 데서 참 위로가 나온다. 이에,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롬 14:1).” 자꾸 뭐라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러니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그래서도 가끔 나는 나를 나무라지 않는다. 자책하지 않는다. 누구의 어떤 죄의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속으로 힘들 때도 있다. 그것이 짓눌려 가슴을 옥죄고 답답하게 하여 숨을 몰아쉬며 주 앞에 고통을 호소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누가 뭐라 하든지 있는 그대로, 어느 소경의 말처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 9:25).”

 

지금 보는 이것, 나는 다시 말씀 앞에 앉았고 나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주 앞에서 절규하며 치를 떨고 그의 도우심을 바랄 뿐이다. 그러할 때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성경은 우리로 ‘하나님께 받는 위로’를 알게 한다. 사람으로, 세상 그 무엇으로 받는 위로는 그때뿐이다. 하나님의 능력, 그 위로하심은 첫째, 죽은 자 가운데서 나를 일으키셨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엡 1:20).” 둘째, 이를 위하여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 셋째, 저는 거기서 날 위해 기도하신다.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이는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히 10:12-13).” 오늘 우리를 공격하는 죄의 속성을 두고 주가 기도하신다. 이처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곧 우리가 애굽 같은 세상에 속해 살 때에는 이를 알지 못했다. 이게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지, 장차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그 후로 영원한 저주와 후회가 있을 줄은 그때에는 몰랐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죽음은 정복당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6-7).”

 

오늘 엘리바스의 말은 죄인은 심판에 이르고 의인은 복을 받는다는 아주 지극히 바른 진리를 알게 한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욥 4:7).” 저의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또한 그것으로 지적하고 찌르고 공격한다 해도, 때로는 이와 같은 찔림이 우리로 돌아보아 주를 알게 한다. 주를 바라게도 한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17).” 사람은 그저 사람이어서 “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20).”

 

새삼 내 안의 엘리바스가 들려주는 말에 귀 기울 필요를 느낀다. 찔림으로 아파하고 돌이켜 다시 탄식하며 주의 긍휼하심 앞에 엎드리게 된다. 나는 번번이 또 그러하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73:2-3).

 

문득 뒤돌아 애굽을 보고 그때의 일이 가끔은 왜곡된 기억으로 그리워하면서… 그러는 내게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우리 삶이 얼마나 덧없고 허무하였는지를,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호 8:7).” 알면서도 또 그러고 있는 자신을 볼 때면 어찌 감당이 안 되는 게 인생이었다. 이에 말씀의 경고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말 4:1).” 그 최후를 우리는 알지만 더불어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해서도,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2).”

 

이를 오늘 시편으로 되새긴다면,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2:1-3).

 

범람하는 세상 물결이 거세면 거셀수록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하시는 주의 영을 우리 안에 심으셨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7:14).” 곧 세상은 헛될 뿐이다. “돌아서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삼상 12:21).”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 6:27).”

 

세상에 있는 동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애굽에 있을 때는 몰랐던 일에 대하여 이제는 그 심각성을 알고 온전히 주를 바라며 출애굽한 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예수님은 위로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곧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후 15:24).”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5-6).

 

이를 우리가 알고 믿고 이제는 구원을 받았으니,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7).

 

곧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2-33).” 하실 때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계 11:15).” 이는 최종적인 것으로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8-9).

 

다시 말하면 내 안의 완고함을 깨뜨리신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그러니 세상 그 무엇이 권세이고 위세이겠나? 돈이든 권력이든 손에 쥔 사막과 같아서 곧 흩어질 뿐이고,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그러므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나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10-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