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전봉석 2022. 12. 2. 03:30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욥기 6:25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편 4:8

 

 

자신의 고통이 극심하고 이는 갑작스러워 듣기에 경솔하였을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닥친 갑작스런 재앙을 고려하지 않는 엘리바스의 충고에 대해 그 허황되고 무의미함을 지적한다. 지금 자신의 탄식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고난을 불평하지 말고 순복하라는 데 대한 저의 인과응보적인 사고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 어떤 고통도 남이 속단하거나 재단할 수 없다.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하고 탄식하는 욥의 항변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 중심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2). 그 누구도 서로의 슬픔을 알아주지 못한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3).” 곧 인생에서 무엇으로 위로를 얻을까 하는 것 자체가 맹랑할 따름이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3).”

 

그러나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결국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오직 한 분,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사 49:13).”

 

곧 하나님의 연단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초과하지 않으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분명히 하나님은 인정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이를 인정함으로 우린 하나님을 더욱 의뢰할 수 있다.

 

가령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즉 극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성도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오늘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이 우리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한다는 말씀의 역설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여기서 의외로 주목하게 되는 것이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다’는 것이다. 지금은 귓등으로나 듣던 말을 때가 이르러 그제야 자신들도 들어가겠다고 하여도 그럴 수가 없는 때가 온다는 것이다. 오늘 저마다의 어떤 어려움이 우리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한다. 이를 바울은 그리하여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환난 자체로 누가 무슨 수로 기뻐할 수 있겠나? 하지만 그 환난이 어느새 우리로 인내하게 하고 인내는 어느새 우리를 연단하여 영적 실력이 되게 하고 연단으로 우리로 소망을 알아차린다.

 

그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4).” 연단으로 쌓은 실력이 소망이 되고 그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음 바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 하는 놀라운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이와 같은 사실은 바울도 베드로도 앞서 욥도 깨닫게 되었으니 우린 이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7).” 이를 우리가 알게 되었을 때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이 또한 우리의 일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물론 이는 참 지치는 일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섭리에 응답하는 삶이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이는 우리의 당연한 의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1).” 이를 우리가 명심하고 또한 대비하는 것은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미 3:4).” 한데 점점 더 더욱이 믿는다는 사람으로 심지어 사역을 감당한다고 하면서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어둠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5-6).”

 

나는 종종 이와 같은 말씀에 몸서리를 친다. 나도 나 자신을 바로하지 못하면서 소위 ‘갑질’이 난무라는 곳이 교회 안 사역자들 사이의 일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아무래도 연말연초가 되어 사역자들 사이에 교회 이동이 이루어지곤 한다. 솔직히 나는 한 번도 부교역자로 어디 부임하여 그 역할을 수행한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하다못해 사회적으로 법적 기본 시급 정도도 안 되는 사례로 온갖 잡무는 당연하다는 듯 요구한다. 전임으로 교회 사역을 감당하는 데 있어 가족들 기본 생계도 보장하지 못하면서 월 이백이라니… 것도 수요, 금요예배는 물론 새벽예배에 차량 운행까지. 나는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누가 저들에게 이런 전권을 부여하였는지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교회가 교회 사역자를 책임지지 않으면 어쩌란 소릴까? 상대적으로 담임 목사들의 대우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이다.

 

그렇게 부교역자의 기초적인 생활이 어려운 것을 종종 동기들이나 누구의 이야기로 듣다보면 교회가 더 교회를 섬기는 자를 박대하는 것에 화가 난다. 모순된 처우로 남들에게 잘하면 뭐하나? 듣는 귀를 의심하게 된다. 현실적인 어려움이야 백 번 이해한다지만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10).” 오늘 욥의 발언처럼 이와 같은 답을 강요하는 것인가? 말씀을 거역하지 않는다는 것,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9).” 교회를 섬기는 일이 싸움이 되어서야!

 

물론 오직 주만 바라며 나아가는 수밖에. 말씀으로만 위로를 삼을 수밖에. 우리의 무기력함 속에서 하나님은 일하신다. 오늘 욥의 이어지는 말 속에서,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능력이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13).” 나는 능력이 없으나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있다는 말, 이를 시인의 노래로 들어보면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시 33:18-19).

 

나는 할 수 없다고 두 손 들 때 주가 이를 반기신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34:6).

 

그렇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데 따른 그 이유와 목적은 분명하셨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나는 교회가 교회를 섬기는 자들에게 야박한 이유를 모르겠다. 누가 교회의 주인인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더 슬픈 것은 ‘거기’만 그런 게 아니라, 보통 교회들이 다 그렇다는 데서 할 말이 없다. 같은 사역자로 저들도 그 고초를 겪으며 오늘에 담임이 되고 그랬을 텐데….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7).” 하물며 그러한 데 주의 사역자를 그리 박봉으로 부려먹는다는 것이 나는 도대체 이해가 안 갔다. 그러니 어지간한 교회로는 엄두가 안 나고, 개척을 하자니 실정은 뻔하고… 그렇게 다른 일을 겸하여 하다 정작 무엇이 중심이었는지 그 갈피를 잃는 이도 허다하였다. 친구 누구도 어디 선교사로 나갔다가 국내 후원이 여의치 않아지자 현지에서 어떤 일에 동업하다 오히려 사업가로 변신하였다. 저는 이를 비지니스 선교라 한다는데, 글쎄. 그런 이가 한둘이겠나?

 

또 하나, 나는 어느 동기의 어려움을 들으며 마음이 아팠다. 것도 이제 나이 든 여전도사의 몸으로 사역지를 구하기란 허드렛일 외에 없다는 말에 어안이벙벙했다. 말씀 전하기를 사모하나 잡무에 비상식적인 일까지 도맡아하다 보니, 이 길이 과연 맞나? 싶은 회의가 드는 것은 당연하다. 부르심의 갈피를 잃어버린 저는 의욕이 없었고 믿음의 침체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오늘 욥의 고백이다.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14).” 문득 떠오르는 사이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아닐까?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삼상 20:17).” 오히려 형제나 그 가족은 야박한데, 이를 두고 욥은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욥 6:15).”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 그러므로 지지를 받고 주의 일에 전념하기란 가족에게 가장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 성경은 또한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잠 17:17).” 하셨는데 누구 이야기에서는 안 믿는 자들의 위로가 더 편하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아,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욥 6:25).” 어려움 중의 위로란 가만히 주를 같이 바라는 게 아닐까?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4:1).

 

오직 주만 바라라고 하실 땐 그 수밖에 없다. 가장 가까운 이부터 어려워지는 법이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9).” 사람을 보면 영락없다. 그게 누구든지 저에게 기대하다 저에게 고통당하기 십상이다.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54:8).” 그리하여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2-3).

 

우리가 아무리 궁리하고 여러 모로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들 주의 뜻이 아니시면 모든 게 다 허사라. 애써 수고한 것이 수포로 돌아가기 일쑤이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19-20).” 하나님이 아니라 하시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그러므로 우리가 경건하여야 하는데,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그래서도 행여 우리의 노여움이 우리 영혼을 지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4).

 

그러할 때,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5).

 

길은 하나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그리하여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37:8-9).

 

그러므로 우리 가는 길은 외길이다. 주의 말씀만 의지하며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이를 위하여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2).” 그 가는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4:7-8).

 

그러므로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잠 3:24).” 이에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 3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