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
욥기 18:4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6:7-8
욥과 그 친구들 사이에 2차 논쟁이 펼쳐진다. 오늘은 다시 수아 사람 빌닷의 반박이다. 욥이 자기변명을 일삼는 것이라 공격한다.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2).” 친구들의 말이나 심지어 선조들의 조언도 짐승의 말로 받는다며 비난한다.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3).” 비난하는 말 속에는 섬뜩한 표현들도 거침이 없다. 저의 비난은 16장 9절의 욥이 말을 꼬투리로 잡는 듯하다.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적대시 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 결국 그의 삶을 찢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빌닷은 말한다.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4).”
말은 감정에 사로잡히고 감정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물어뜯는 맹수 같다. 우리가 가장 사탄의 닮은꼴을 하는 것은 감정 섞인 언사를 표출하는 것이다. 상대는 물론 자신에게도 무자비하다. 이를 성경은 이르시길, 결국 그것이 재앙을 부른다는 것이다.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사 47:10-11).” 재앙은 결국 파멸을 부를 뿐이다.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것이 이와 같은 정쟁인 것 같다. 정치인들이야 그것으로 먹고 사는 것들이라 본래 그러려니 하지만 이에 진영이 갈려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물어뜯는 것이 예사롭지가 않다. 그러니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렘 8:9).” 그래서 지혜 없는 말과 행동은 술 취한 자의 손에 들린 가시나무 같다. 주정부리며 휘저으니 그 곁에서는 상처뿐이다.
또한 말꼬리를 잡는 까닭은 선입견으로 상대를 짓누르려는 본능적인 처사다. 빌닷의 얕은 언쟁이 말 같잖으나 우리 일상에서 가장 흔한 행동이 아닌가 싶다. 하여 주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4).” 가령 바울을 선입견으로 대하면서 저들의 오판은 스스로 올무에 걸린다. 이에 바울은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하지 않게 함이라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고후 10:9-11).” 저들이 왜 그리 판단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는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7).”
곧 우리가 상대를 대하는 데 있어 한 영혼, 한 성도를 대하는 듯 할 수 있다면 결코 감정적으로 서로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빌닷이 유난히 꼬투리 잡는 것은 욥의 변론에서 자신의 결국을 인과응보라 하는 데 따른 친구들의 지혜 없음을 지적한 것에 대한 분풀이다. “하나님이 나를 악인에게 넘기시며 행악자의 손에 던지셨구나(16:11).” 하던 말이나,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어 깨닫지 못하게 하셨사오니 그들을 높이지 마소서. …너희는 모두 다시 올지니라 내가 너희 중에서 지혜자를 찾을 수 없느니라(17:4, 10).” 결국 자신을 악인으로, 지혜 없는 자로 공격하였다고 여기는 까닭이었다. 실제 이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짐승과 같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 49:20).
우리의 타락하고 부패한 영혼은 그럴 수밖에 없다. 생각은 허망하고 마음은 미련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으로 바꾸기 일쑤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지혜 없음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고 경외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그러니 오늘 날 우리 사회에 혐오스러운 말과 정쟁으로 얼룩지는 것도 당연하다. 서로가 미움에 갇혀 적들보다 서로를 더 적대시하며 막말에 막말을 더하며, 사람들은 쓸려다니는 안개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는 셈이다. 예배는 가벼워지고 교회는 정치화되고 여느 사회단체보다 못한 선을 내세우며 ‘폼 나게 사는 것’을 신앙으로 여긴다.
나야 늘 들어앉아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주워듣는 형편이라 감히 말을 보탤 자격은 없지만, 교회가 더 악의적이다. 연말이 되고 서로들 부교역자 자리를 옮기는 시기여서 그런가, 듣다보면 최저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례를 받고 무한 봉사를 강요당하는 것 같다. 하긴 희한한 것이 사회복지사나 유치원, 요양사들 같은 경우의 월급이 하다못해 편의점 아르바이트 시급도 안 된다는 소리를 듣고는 놀랐다. 왜들 나서서 희생비용을 자신들이 강요하는 것일까? 지방의 어느 소도시에서 부교역자로 일하는 누구의 소식에서 이는 복음 전하는 자로서의 일보다 차량봉사에 사찰과 다를 바 없는 처우와 그 온 가족이 출석하며 교회에 봉사해야 하는 강요를 당하는 것에 놀랐다. 상대적으로 담임 목사나 당회의 경우는 마치 자신들이 주인인 듯 교회를 좌지우지한다. 한쪽 말만 듣고 뭐라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나 사역자가 사역을 감당하는 데 있어 같은 사역자로부터 부리는 사람처럼 대우 받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빌닷의 단정적인 말에서 저의 어두워진 표현을 보는 듯하다(5-14). 악인의 파멸은 허망한데 그 최후는 하나님의 징계로 끝날 것이다(15-21). 곧 상대를 정죄하는 말 속에 자신이 당할 미래의 모습을 담는 것 같다. 우리가 악을 멀리하는 것은 그 최후를 알고 비참한 결말을 두려워할 줄 알기 때문이겠다. 앞에 욥의 진술에서도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욥 12:6-7).”
곧 저들의 인과응보는 현실에서 찾기 어려운 것 같으나 끝내,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73:16-17).
오늘은 잘 된 것 같으나 그것은 일시적인데,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0).
곧 두려운 날이 이르리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말 4:1).” 하여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1:5-6).
곧 우리가 안다고 여기는 그 앎이 얼마나 가치 없고 표피적일 뿐인지, “맹인이 어두운 데에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하지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리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신 28:29).” 그리 당하면서도 어떤 요행을 바라고 저러는 것인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4:19).” 이내 죽으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눈을 감는 자들이 허다하겠다.
상대적으로 우리는 안다.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21).” 우린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능력대로 우리로 능히 넘치게 하시는 영광을 본다. 곧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7).” 알면 보이고, 보이면 말하여 알려주는 것은 당연하다. 비록 그 힘이 미약한 것 같으나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9-10).”
요즘 부쩍 드는 생각이 우린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간다. 곧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장래를 알고 산다는 일,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37:25-26).
그러므로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5).” 소위 자기 꾀에 배부른 자는 조만간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말 3:16).” 우리가 오늘을 귀히 여기며 주를 더욱 바라는 것은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7-8).”
번번이 또 실패하고 넘어져도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어떤 어려움이 없을 수는 없으나 어려움으로 도리어 우리는 단단하여진다. 이에,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16:1-2).
우리의 복은 하나님으로 다른 무엇도 부수적일 뿐이다. 이를 바울은 정리하기를,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롬 15:8-9).” 곧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자비하신 복음을 주셨고, 그 복음은 긍휼의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였으며, 끼리끼리가 아닌 더불어, 복음에 대한 열망을 갖고, 복음으로 나타나는 교회로, 복음 안에 사는 성도들이 되게 하였다.
고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출 23:25, 마 6:33).” 하면,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3).
세상이 아무리 요동친다 해도 우리는 평안하다. 이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우리의 오늘은 어떠한지? 그러할 때,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이는 우리가 못하여도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9).” 그러므로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7).
곧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2-13).” 하여 나는 교회가 교세를 확장하고 어디에 선을 베풀며 자신들을 드러내는 일보다 말씀 전하는 자들로 충분히 말씀만을 몰두하고 전파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작 우리를 살리는 것은 어떤 선행이나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있지 않다. 말씀으로 살고 말씀으로 죽는다. 목사가, 사역자가 말씀보다 사람 돌보는 일에 전념할 거면 뭐 하러 부교역자를 세우나? 사회복지사나 심리학자를 고용하지? 성경은 분명히 일러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 5:17).”
하여,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8).
곧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6).”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곧,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