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욥기 25:5-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6
빌닷과 욥의 변론과 답변이 이어지고 있다. 저는 현세적이고 인과응보적인 사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고 있다. 빌닷의 짧은 주장에서 그 오류가 드러나고 친구들은 논쟁을 멈춘다. 소발은 세 번째 논쟁에서 침묵하고 있다. 저들은 욥과 논쟁할 근거를 잃었다. 우리의 주장은 그 한계가 원론적이다. 욥의 지적과 같이 인과응보적인 시점으로는 악인이 더 잘 되고 강건하게 사는 것에 대해 반박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로우심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근거를 잃는다. 다만 인간의 한계를 말함으로 자신의 주장을 얼버무리는 셈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우리 생각 안에 가두려는 생각 자체가 모순이다. 빌닷은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2).” 하고 말한 뒤 자신의 반론에 한계가 있음을 인식한다. 하나님의 주권, 곧 권능과 그의 다스리심에 대하여 지극히 당연한 말로 공격하려니까 자신의 주장이 그릇됨을 스스로 알 게 된다. 우리의 이해와 상식으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없다는 것. 하나님의 주권을 한정할 수 없다는 데서 더는 주의 통치를 논할 가치가 우리 인간에게 없음을 자인한다.
성경은 밝히시길,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우리의 ‘이럴 것이다.’ 하는 생각을 보기 좋게 뒤틀고 비틀어 전혀 엉뚱한 결과를 이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19-20).” 스스로 안다고 여기다 그 꾀에 빠지는 게 사람이다.
하나님은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 4:35).”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미 있음을 무색하게 하신다. 우리가 그럴 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추측이나 판단을 보기 좋게 흩으신다. 그 위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영광을 채우신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 9:20).”
그러므로 우린 주 앞에서 두려워하는 게 맞다. 마치 광활한 자연 앞에서 경탄을 금치 못하고 어떤 두려움, 경외심이 저절로 일듯이 하물며 이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우리가 주를 인정하는 것이 복의 근원이다. 그러나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늘 앞서 자신의 판단과 기준, 기분에 따라 생각하기는 흐려진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감정도 끈 떨어진 연 같이 허망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 대하여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한 박자 늦추며 주를 생각함이 지혜다. 주께 묻고 주의 답을 바라는 것으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결국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그런데 우린 늘 먼저 두려워하는 게 있으니 당면한 현실이다. 이에 빌닷의 이어지는 주장은 지당하다.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3).”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는 일에 대하여, 돌보시고 함께 하시는 은혜에 대하여 이를 다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어떤 일 앞에서 하나님이 어찌 다루시려는가? 하고 기대하며 호기심을 갖는 것은 마땅하다. 우리에겐 우리를 지키는 주의 군대가 포진되어 있다.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왕하 6:16).” 이를 알고 보고 믿고 산다는 일은 든든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를 따르는 온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대하 32:7).”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현실이 당장 어떻다 해도,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시 27:3).
때론 우리 안에 설명할 수 없는 배짱이 있다. 어찌 설명하기 어려운 뚝심이 있다. 때론 내 의지도 나의 이해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이상하고 희한한 평안이다. 빌닷은 이를 우리 인생들이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신 8:10).” 이를 어찌 머리로는 수용하기가 어렵다. 보고 듣고 자라온 게 그래서가 아니라 본래 우리의 죄성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이다. 고로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행 17:28).” 결국 우리 삶은 신앙이다.
여기서 빌닷의 주장으로 들어보면,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5-6).” 우리의 존재란 게 얼마나 미물과 다를 게 없는지를 알 때,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4).” 누구도 스스로를 깨끗하게 할 수 없다. 이를 앎으로 시편은 온통 주를 찬양한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40:6).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03:14).
그러므로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사 40:15).” 우리가 무엇으로 우리의 주장을 앞세우겠나?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성경은 일관되게 우리의 약하고 보잘것없음을 강조하고 계신다. 이를 귀신들도 알 정도이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2:19).”
우리의 앎이 지극히 모순되고 한계가 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하고 물으시며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눅 6:46-47).” 곧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 이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었다. 오늘 빌닷의 주장은 그리하여 자기주장의 모순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되었다.
이에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시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23:1-2).
이 놀라운 은총을 입고 사는 우리는 얼마나 귀하고 복된 존재인지. 우리는 그의 양이요, 저는 우리의 목자 되심이 참 귀하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보면 늘 어지러운 삶에 휩쓸리는 경우 “이방들이여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떼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렘 31:10).” 이를 말해주고 알려주어도 소용이 없다. 그의 어지러움은 그럴만하다. 스스로의 한계를 알지 못하는 것보다 어려운 인생도 없는 것 같다. 이를 도전하며 산다는 말, 이보다 인본주의적인 생각도 없다. 오히려 주를 인정함으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곧 주를 인정할 때에 참 승리도 보장이 된다.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4:15).”
고로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3).” 주의 인도하심으로 사는 삶이 목적을 이루는 삶이다. 그 어떤 도전보다 모험으로 사는 인생이다. 다들 바람에 휩쓸려가듯 이리저리 헷갈릴 때,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34:10).
이를 누가 알까? 바울은 이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곧 우리는 살며, 사랑하며, 배우는 삶으로 일체의 비결을 아는데,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14).” 그렇다면 이 땅에서 급선무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다들 돈돈거리고 사는 세상에서 족한 줄을 알고 사는 삶보다 부유한 삶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23:3).
주님이 부르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이를 말해주고 이끌려 해도 또한 주가 그리 할 수 있게 그 영혼을 소생시키지 않으시면 별 수 없다. 곁에서 보고 같이 느끼면서도 이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9-10).” 우리가 정상적으로 산다는 것은 주를 통하여 주께로 향함으로 가능하였다. 이는 그의 이름을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 3:15).” 저가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12).” 저는 누구신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14).” 이에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31:3).
이보다 더 확실하게 주께 바라는 기도도 없다. 주의 이름으로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다. 하실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이와 같은 확신으로 사는 삶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 11:38).” 이는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 31:3).”
그 이름으로 사는 삶,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4).
처한 상황은 비록 음침한 골짜기 같아서 더는 헤어나올 길이 없을 것 같다 해도,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16:11).
이를 살면서 사는 동안에 누리고 사는 삶이 천국을 사는 삶이다.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잠 2:20-21).” 아,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사 43:2-3).”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말씀이 말씀으로 이어지며 나를 이끄시는 삶.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23:5).
그럴 때 나 또한 고백하기를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어제도 누구와의 대화에서 나도 모르게 되뇌듯 하던 말이다. 나의 약한 것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그러하다면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54:10).” 하여,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