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욥기 26:6, 14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시편 24:9-10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가 문장가이고 사상가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책이라 그 의미가 깊고 문장은 수려한 것인지… 보면 그 표현들이 놀라워서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6).” 숨겨지고 가려져 모든 게 알 수 없을 것 같은 거짓인데, 하나님 앞에서는 가림이 없이 다 드러난다. 또한 하나님은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7).” 이 땅덩어리가 어떻게 허공 아무 것에도 매인 게 없이 떠 있을 수 있을까? 이처럼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자연뿐 아니라, 그의 “지혜로 라합을 깨뜨리시며(12).” 저는 이방의 땅 여리고에서 주막을 하며 잔뼈가 굵은 여인인데, 어떻게 그의 마음을 깨뜨리셔서 마음의 문을 열고 주의 백성들을 맞이할 수 있던 것일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처럼 찬송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신기하다. 이어 시편을 찬송하면,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시 24:9-10).
각각 그 글을 쓴 사람도 시대도 다르지만 한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 성경은 이처럼 아름답고 수려하며 일관되다. 빌닷의 말에 욥이 답변하면서 빌닷이 언급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인지능력의 한계를 보란 듯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장엄하고 웅장한 하나님의 세계를 우리 사람이 어찌 다 열거할 수 있을까? 되어지는 일들 속에서 하나님이 계획하고 계시는 바를 우리가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오늘 본문은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되묻게 하신다. 친구들의 쏟아지는 말들 속에서 정작 하나님을 마주할 수 없는 데 대해, 일련의 우리 사회 속에서도 말의 학대처럼 무서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 4:1).”
뉴스 한 장면을 보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들의 슬픔을 정치적으로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이들의 가려진 스올 같은 눈빛을 보다 등골이 서늘해지기도 하였다. 어쩌다 우린 서로의 슬픔조차 정쟁의 도구로 삼게 된 것일까? 확성기를 켜고 막말을 쏟아내는 자들의 속내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는 바란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최소한의 말의 예의가 사라지면 인간의 본색이 짐승만 못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8).”
우리가 힘써야 할 것,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곧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소유함으로 그 신앙의 성숙을 이룬다. 이를 오늘 말씀 5-14절까지 읽으며 느낀다.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바로 아는 길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곧 “그가 꾸짖으신즉 하늘 기둥이 흔들리며 놀라느니라(욥 26:11).” 이를 우리는 느끼고 바로 알아 두려워할 줄 아는 자들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살며, 사랑하며, 주를 더욱 확신하며 사는 삶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이를 바라고 소유하면서 한 생을 다하는 일… 우리의 죽음은 과거가 되었다. 생명은 감추어졌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하늘 우편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1).”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 3:17).” 사회가 어느 때보다 어지러운 이 시기에 행여 믿음이 떨어질까 주의해야 한다. 누가 새로운 사역지를 구하느라 여기저기 면접을 보러 다니다 환멸에 빠졌다. 뭘 해도 이만큼 못 벌어먹고 살까? 싶을 정도로 교회마다 부교역자에 대한 사례나 그 처우가 형편없다. 사회는 그렇다 해도 교회는 주의 일을 하는 자를 우선하여 돌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 무슨 기업 운영도 아니고… 또 누군 권사가 돼야 하는데 교회에서 규정된 얼마의 금액이 부담스러워 마음이 어렵다. 안수집사나 장로가 되는데 드는 비용이 아예 정해진 금액에 따라 요구되는 것에 어쩌면 좋겠나, 하고 생각이 많다. 나는 섣불리 말할 수 없어 다만 제도화되고 시스템화 된 교회 운영에 대하여는 반대한다. 것도 최소한 납득이 갈만한 수준이어야지… 어디 부교역자로나 또는 재직자로 서 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저들의 어려움에 대하여 마음만 착잡하였다.
우리는 미리 알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쩜 사회보다 못한 요구로 헌신을 강요하게 된 것일까?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18).” 베드로 사도의 설교에서처럼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무얼까?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이 있기는 한 것일까? 누가 어느 교회 면접을 하고 돌아가는 길에 전화를 하였는데, 나는 속으로 ‘에이, 설마…’ 하는 마음만 들었다. 그래도 교횐데… 같은 사역자로 같이 일할 사역자를 찾고 있는 일인데… 대체 누가 어떤 권한을 저들에게 부여한 것일까? 무슨 권한으로 슬픈 자를 우롱하고 막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면서도 밥벌이를 하고 사는 것일까? 교회나 사회나 분간이 안 가는 마음이어서 덩달아 마음이 어려워졌다.
우리의 분명한 확신은 무엇인가?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렘 5:24).”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정작 우리 자신이 아닐까? 우리의 잃어버린 기쁨을 찾아야 한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욜 2:23).”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손길에서 나는 산다.
곧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되어진 일이 다가 아니다. 우리의 가는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1).” 혼자 들어앉아 은둔자처럼 살고 있지만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시나니,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욥 26:13-14).”
더러는 누구의 사연에서 또는 어떤 이의 슬픔에서, 나는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 때론 희미하여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고후 3:13).” 곧 우리의 확신은 지나온 날의 은혜 가운데 있다. 누가 감히 그것을 알았을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그리하여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36).”
어지러운 시험의 때에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주님의 세 가지 인격이 있다. 하나는 주의 돌보심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 8:4).
곧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우리가 시험 중에도 이 놀라운 돌보심을 누리고 산다는 것. 또 하나는 주의 덮으심이다.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85:2).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지속하심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그리하여 이미 죽었던 나를 살리셨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우리가 오늘 동안에 겪는 여러 가지 다양하고 한심하고 처량한 현실 가운데서도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이 놀라운 세 가지 인격적인 만남, ‘돌보심’과 ‘덮으심’과 ‘지속하심’으로 산다. 때론 그 지나는 동안에는 알지 못했다가 가까운 훗날 돌아보면 모든 게 다 은혜였다는 것을,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3-14).” 이를 살며, 누리며,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가운데 욥은 오늘 우리가 낙망치 않는 것은 절망적인 순간에도 그 믿음의 굳건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욥 26:14).” 이를 그대로 시편의 호흡으로 읽어보면,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4:1).
‘짐이 곧 국가다.’ 하고 말한 루이 14세처럼 하나님이 곧 세계이고, 세계는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출 19:5, 고전 10:31).”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이를 인정할 때에 오늘의 암담한 현실도 대수로울 게 없는 사소함으로 물러난다.
우리 소유에 대한 바른 지식이 요구된다. 건강도, 남은 생명도, 돈도, 명예도 어느 것도 주의 것이 아닌 게 없다. 그러므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2-3).
오늘 시편은 우리 안에 질문을 던진다. 그러므로 겸손히…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 곧 우리의 이 놀라운 가벼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하는… 누가 동생네 가정의 어려움을 알고 쌀 10킬로그램짜리 30포대를 보냈다. 이를 또 동생은 교회로 보내 어려운 가정을 중심으로 한 포대씩 나누기로 하였다. 그러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다시 또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하는.
9706** 학번으로 나는 신학부에 편입을 했다. 저의 설득은 집요하여서 나로 계속 신학을 하시라 권하는데,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저는 매학기 등록금과 함께 얼마의 책값을 같이 보내왔다. 우린 서로 그럴 사이가 아니다! 그렇게 4학기, 그리고 신대원 한 학기를 끝으로 나는 다시 포기하고 돌아서며 저에게 면목이 없어 사과했다. 그때 저의 대답은 온유하여서 ‘주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나는 돌려드렸을 뿐입니다.’ 하는 정도의 인사가 전부였다. 나는 아둔하였고 어리석었다. 그때는 몰라서 도저히 내가 갈 길이 아니라고 다시 또 포기했던 것이다. 그쯤 되면 하나님도 더는 상관하지 않으셨을 법한데, 기어이 다시 또 0933** 학번으로 신대원으로 이끄셨다. 그때도 모든 게 다 우연같이 매학기 등록금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며 6학기 동안 한 번도 나는 내가 등록금을 마련한 적이 없다. 매번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하고 모든 게 다 거짓말 같이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는 은혜이다.
오늘도 여전하여서,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5-6).
어찌 말로다 설명할 수 없는 모든 사실 앞에서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다만 나는 이제 말씀 앞으로 나를 이끌 뿐이다. 달리 갚을 길 없어,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부디 그러할 수 있기를. 다만 이제 나의 남은 생애는 그러하기를. 더는 미혹의 길로 돌아서지 않기를. 그러므로 이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7-10).
그리하여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그게 늘 나였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부디 나의 남은 날들은 그러하여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