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을 할 수 없느니라
욥기 31:14, 23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시편 29:1-2
욥이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을 살았노라 외친다(1-4). 자신은 불의한 길로 행하지 않았음을(5-8),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않았고(9-12), 종을 학대하지 않았으며(13-15),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자를 외면하지 않았다(16-18). 헐벗고 비궁한 자를 적극 도왔고(19-20), 권세 잡은 자와 같이 억울한 자를 만들지 않았고(21-23), 재물을 탐하지 않았으며(24-25), 사랑과 윤리를 지켰으며(29-30),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였고(31-32), 위선적인 삶을 살지 않았다(33-34).
어쩌면 욥의 회고하는 삶이 우리가 지향하는 성도의 삶이기도 하다. 성도의 경건과 경외는 강요가 아니다. 자원함과 즐거움으로 행한다. 자신이 음행하지 않으려고 눈과 귀에 언약을 세웠다. 이를 바울의 표현으로 바꾸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그는 덧붙이기를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우리로 신앙을 지키며 사는 일이란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할 수 있는 것이겠다. 이와 같은 삶은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하는 마음으로’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0:3).
결국 이러한 삶의 원동력은 ‘주의 권능’으로였다. 우리가 하는 일 같으나 하게 하시는 이의 힘으로, 주의 영으로 우린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할 수 있다. 고로 우리가 세상을 살며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이를 경계하고 주의하려는 의도적인 자세가 필요하였다.
욥은 이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의 전능자께서 주시는 기업이 무엇이겠느냐(1-2).” 곧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것으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이 말이 참 듣기는 좋고 행하기도 쉬울 것 같은데, 평생을 두고 연마해야 하는 일이겠다. 우리 안에 내재된 어떤 앙금이 우리로 송곳처럼 찌른다. 개운하게 풀리지 않은 감정이다. 기억하고 있는 어떤 원망이다. 원망은 탓을 돌려 불평을 품고 미워하는 일이다. 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와 같은 마음이 한 점 없을 수는 없겠으나, 이를 풀지 않고 사는 것이 죄가 된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0).
더욱이 가족 간의 이와 같은 상처는 없을 수 없다. 한데 이를 배설하지 않고 내어놓고 살지 않으면 안으로 잠겨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한다. 그러다 무슨 일이 휘저으면 수족관의 부유물처럼 탁해진다. 어제도 무슨 이야기를 하다 나는 주께 감사하는 것이 글쓰기였다. 나로 하여금 이를 글로 끌어내어 표출하게 하였고, 그러자면 이를 직면하여 관찰자가 되게 한다. 얼마 전 어느 선생이 글쓰기를 하고 싶어하다 이내 한 달 반 만에 포기한 것은 자기를 마주하는 일에서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가령 지금 딸아이와 사이가 극도로 안 좋다, 아이가 귀하고 감사하지만 보기만 하면 화가 난다, 자꾸 간섭하고 억압하며 키웠는데 사춘기가 되면서 아이와의 대치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겉으로는 ‘어떤 일’ 때문인데, 자신도 말하면서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은 아니지만’ 하고 덧붙이곤 했던 것이 그 자신 안에 내재된 감정 때문이었다. 이를 직면하자니 어릴 적 친정엄마와의 관계가 또는 어떤 원망이 커다란 돌덩이처럼 가로놓여 있었고, 이를 굴려 어둠에 묻힌 그 이야기를 마주해야 할 시점에서, 더는 못하겠다고 하며 그만하였다.
이는 아주 흔한 일로 누구나 상처 없이 살아온 삶이 어디 있겠나? 그것이 부모로부터였든지, 친구로부터였던지, 우린 결국 사람이면서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산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들여다보면 실은 이게 하나님과 나의 문제다. ‘너와 나’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과 나의 일이었고, 일찍이 나에게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께 직접 아뢰고, 고하고, 묻고, 원망하였던 것이다. 무엇을 구하고 그것도 들어주지 않으신다면서 하나님과 다투었던 것 같다. 이는 주를 경외하는 데 부정적일 것 같은데 우리 하나님은 이러는 우리를 좋아하신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51:17).
곧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뭔가 의젓하고 거룩한 어떤 ‘제사’를 원하시는 게 아니다. 솔직히 우리가 상한 심령으로 주 앞에 나오면 좋은 소리가 나올까? 어렸던 나는 할 말 못할 말 다 하며 자랐던 것 같다. 이를 기도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마음과 생각으로 또는 혼잣말처럼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따져 묻기도 하고, 때론 친구나 동생 대하듯 함부로 골내고 짜증부리고 했던 것 같다. 가령 누구에게 놀림을 당하거나 뭔가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이건 다 하나님 때문이라며, 어떻게 보고만 있냐면서 투정대고 종주먹을 날리기도 했다. 허공을 후려치기도 하고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니 나를 학대하기도 했었다.
또 하나는 늘 그때마다 내 곁에는 들어주거나 같이 읽어주는 ‘천사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첫사랑 아이도 그래서 나는 저에게 못할 말이 없었고, 저도 내게 자기 안의 어떤 서러움을 미학적으로 글로 표현하며 편지를 쓰곤 했다. 내 기억으로 저는 세상에서 글을 제일 자연스럽게 잘 썼다. 그리고 학창시절엔 선생 두 분이 있는데 이대 국문과를 나온 국어선생은 처음 숙제로 써 낸 작문을 읽고 나를 기억하고는 내내 친구처럼 애인처럼 챙겨주었다. 저 때문에 여느 문학상에 글을 자주 보내었다. 또 한 선생은 말하기를 참 좋아하는 영어선생인데 남자의 수다는 여자의 수다를 능가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저의 가난하였던 시절, 공부밖에는 할 게 없었고 특히 영어가 좋아서 길거리에서 외국인만 보면 따라가서 말을 걸고 돼도 않는 이야기를 한참씩 주고받았다. 저 두 선생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좋아하고 아껴주었다. 결국 저들의 아픔, 솔직한 자기 이야기들이 나로 하여금 내 이야기를 마주하는 데 두려움을 없게 하였다.
이처럼 요즘 나는 장모 덕분에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그때마다 ‘은혜로다.’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 순간이 많다. 어제도 가정예배 후에 장모와 둘이 무슨 얘길 하다 열다섯 살, 괴뢰군이 서울을 수복하여 부산으로 피난 갔던 일과 부모를 잃고 돌아와 서울 답십리에서 생활하던 이야기를 한참 듣고 앉아 있었다. 그 나이 어릴 적 이야기는 너무 많은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야 할 때였다. 나는 장모에게 죽음 뒤에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있으신가 물었고, 그럴 거라 여기지만 죽어봐야 알지… 하는 말에 구원의 확신이 없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이를 알면서부터 은연중에 이러한 삶이 주의 작정이심을 알 수 있었다. 믿음은 있으나 의외로 구원의 확신이 없는 신자들이 많다. 그러니 삶이 자주 헛발질이라. 믿기는 믿는데 안 믿는 자와 다를 게 없이 그 마음은 요동하는 것이었으니….
오늘 욥의 구연은 단순한 자기 자랑과 의에 빠진 구술이 아니다. 저는 하나님이 의식하고 신뢰하는 사람이다. 오늘 4절에도 보면 “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하고 반문하는 것은 누구에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말이다. 욥은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죄를 멀리하고 자신을 더욱 쳐서 복종시켰던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곧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우릴 살피시고 돌보신다.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으나 죄를 경계하고 멀리하게 하신다. 그 안에 두려움도 두시고 의식하여 멀리하게 하신다. 그래서 욥도 “만일 내가 허위와 함께 동행하고 내 발이 속임수에 빨랐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5-6).” 매순간이 하나님과의 문제였다.
돌아보면 내 안에 어찌 앙금이 없고 원망이 사라졌겠나? 여전히 툭, 하고 건드리면 나의 열등감이 또는 자격지심이 먼저 발동하는 것을 자주 느낀다. 그럼에도 우리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나는 나의 날들을 돌아보면 부끄러움뿐이면서도 동시에 그때마다 좋은 사람을 붙여주심으로 저로 어느 시점 나와 동행하게 하셨다는 것을 잘 안다. 더는 연락할 길도 없는 누구를 생각할 때면 가슴 한쪽은 늘 사랑에 빚진 자라. 나의 한계는 나로 겸손을 알게 하였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일이다. 내가 몇 가지 하나님과 씨름해 본 게 있는데, 절대로 들어주시지 않는 일에 대하여는 두 손 들었다. 그럼에도 그 일 때문에 기도하고 또 바라는 것은 들어주시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그러고 있는 내 마음을 다스려 되돌리게 하신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다. 별 수 없는 건 별 수 없는 것이다. 때론 이해가 안 가도, 어느 훗날 반드시 알려주실 것이다.
저는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이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이가 한 분이 아니시냐?” 하고 되묻는 욥의 독백이 은근한 위안이 된다(15).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35).” 하나님과 친밀한 자의 당당함이다. 이를 이어서 오늘 다윗의 시로 바로 연결하면,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29:1-2).
욥이 의식하고 살았던 삶을 다윗도 의식하고 살았다. 하나님만이 내가 상대하고 경배하고 위로를 얻을 자이다. 성경이 묻는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출 15:11).” 한데도 우린 무엇에 기대하고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고 있는지? 가족도 심지어는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도 아니다. 하나님보다 선호하는 모든 대상은 우상이 될 수 있다. 자식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하다면, 나의 건강과 오늘의 필요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후순위로 밀려난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으신다.
누가 애타게 기도를 부탁한다. 어떤 절박함이 저로 하나님을 찾게 하였다. 한데 그게 그 문제 때문이라면, 굳이 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아니어도 좋은 것이다. ‘행복할 수 있다면 종교 하나쯤 가지고 사는 게 좋지요.’ 하고 아이가 예배에 나오는 것을 굳이 반대하지 않는다던 어느 아이엄마의 말처럼 우리의 무지가 너무 깊다.
오늘 다윗은 매 구절마다 반복적으로 ‘여호와의 소리’를 언급한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4).
이를 우린 살며 사랑하며 듣는다.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5).”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내 것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모든 게 다 주의 뜻대로 있고, 이루어진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요즘 내 곁에 두신 한 영혼은 장모이겠다. 저의 늙고 병듦을 돌보는 일보다 그 영혼을 주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세우시려고… 데려가시기에 앞서 같이 나누는 대화 가운데 나는 저의 구원의 확신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언제 누가 ‘정말 내가 죽으면 나 같은 게 천국 갈 수 있을까요?’ 하고 물을 때의 아찔함! 아, 이거 때문에 나 같이 보잘것없는 자를 곁에 보내셨구나, 하고 생각하였던 날로부터 50여일 우린 우리가 천국 갈 자들임을, 그리 살았어야 하는데 이를 한사코 가벼이 여기며 세상 것에 얽매여 살았던 날들을 돌아보게 하심을…. 그렇게 저는 평안한 마음으로 천국을 사모하며 먼저 들어갔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