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전봉석 2022. 12. 28. 04:59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욥기 32:8-9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편 30:4-5

 

 

 

새로운 논객 엘리후의 등장이다. 엘리후의 등장은 갑작스럽다. 앞서 등장인물로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만한 나오고 그 세 사람이 멀리서 문안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욥 인근에 살던 혈연관계이거나 이웃하고 있던 친구가 아닐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 욥과 그 세 친구들은 각자 자신들의 주장만 하다만 셈이 되었다. 문제는 이렇게 끝나는 대화의 결론은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는 결론인데, 그래서 급기야 엘리후의 등장이 이야기 속에 비치면서 하나님을 옹호하는 개입이 된다.

 

엘리후의 등장에 대한 언급이다.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1-3).”

 

흔히 우리의 선입견은 누가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판단한다. 무엇 때문이라 단죄하기 십상이다. 그렇게 욥을 공격하던 친구들의 주장이 그쳤다. 혹은 그만두다, 실패하다로 읽힌다. 생각처럼 욥의 고난이 욥의 죄로 인한 게 아니라는 결론으로 더는 반박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인과응보로 정리하려니 앞뒤가 안 맞는다. 예수님의 고난으로도 알듯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결국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가 어찌 다 헤아려 알 수 있을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

 

어떤 목적, 하나님의 계획 그 섭리를 우리는 호기심을 갖고 주목한다. 호기심은 좋은 의도의 마음(好奇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고난을 죄의 결과로 보는 시각은 편협하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한다. 자칫 남을 정죄하고 자신을 자책할 수 있다. 어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누가 감히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 14:4).”

 

우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누가 감히 단정할 수 있겠나? 어떤 일을 두고 실패로 몰아세우거나 죄 때문이라고 하는 시선은 자칫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자신이 판단 받게 될 것이다. 하여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이 원리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자신이나 자기 진영에는 둔감하고 남을 향하여는 예민할 때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4).” 하여,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약 4:11).”

 

우리 사회의 정치적 논쟁이나 진영논리의 다툼은 이로 인하여 가중된다. 교회가 나서고 강단에서 설교에 곁들여 목사의 견해로 전달되기 일쑤다. 저들은 그러라고 세움을 받았다. 덩달아 부화뇌동하는 것은 성도로서의 자질을 상실하게 한다. 권세는 주께로부터 나지만 모두를 우리가 존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는 바로이지 저를 종이라 하셨다고 하여 우리가 공경할 대상은 아니다. 헤롯은 헤롯이다. 헤롯의 일을 위해 세움 받은 것뿐이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이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주의 뜻이다. 그 사람이 아니다. 누구 말처럼 우린 사람을 섬기지 않는다. 저의 말이 자신의 목줄이 되었다.

 

유익이 되지 않는 덴 침묵하는 게 귀하다. 침묵은 말을 쉼으로 내 안에 정적(靜寂)을 두는 것이다. 정적은 괴괴한 고요다. 쓸쓸한 느낌이 들 정도의 고요. 생각을 놓아두는, 마음을 내려놓는, 뜻을 주께로 향하는 것. 우리에겐 그와 같은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나는 자주 말하길 외롭지 않고 무슨 공부가 되고 혼자이지 않으면 어떻게 책을 읽겠나? 점점 고요를 두려워하는 시대다.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하다못해 무슨 소음이라도 두어야 살 것 같다. 귀를 잠시도 쉬게 두지 못한다. 그러니 잠시도 말을 멈출 수 없고, 생각이 쉬지 못한다. 어느 시대보다 피곤한 시절이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 25:11).”

 

탈무드에서 ‘침묵은 어진 자를 더한층 현명하고 한다. 어리석은 자는 침묵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헤아릴 수 없다.’ 때론 우리 기독교에도 묵언수행이 필요할 것 같다. 너무 시끄럽고 너무 말들이 많다.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딤후 2:14).” 때론 가만히 침잠하는 것, 괴괴한 고요의 시간도 필요하다. 묵상의 시간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딛 3:9).” 하여 나는 서로의 정치 이야기, 종교 이야기, 어떤 신념에 대해서는 거의 병적으로 회피한다.

 

말이 쉬지 못할 때 남의 말을 듣기는 불가능하다. 언제부터 엘리후가 저들 대화 가운데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저는 가만히 듣기만 하고 있었다.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잠 18:13).” 대화도 기술이고 연마가 필요하다. 말하기는 쉬워도 듣기는 쉽지 않다. 말한 자는 잊어도 들은 자는 기억한다. 그러므로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29:20).” 결국은 조급함이 문제인데, 참을성이 희박해지는 시대다. 지켜볼 수 없다. 어떤 뉴스가 나오기 무섭게 논평이 뒤따르는 시대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전 7:9).” 이와 같은 말씀 한 구절을 두고 한나절은 족히 씨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말씀이 자신을 흔들지 못하면 자신이 말씀을 흔들고 있다는 소리다.

 

우린 명상의 종교가 아니다. 자신을 비워내란 소리가 아니다. 우리는 묵상의 종교다. 들어서 채워야 하는데, 하나님 앞에 가만히 있는 것,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 46:10).

 

이에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행 19:36).” 묵상은 곧 듣는 시간이다. 듣는다는 것은 소리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물이 들다와 같이 햇살이 듣는 자리, 고요가 듣는 자리와 같이 우리를 그 방향으로 놓아두는 것.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34:12-13).

 

결국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이는 묵상의 자리다. 턱을 괴고 앉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두고 ‘가만히 있는다.’ 호기심을 갖는다.

 

나는 요즘 필리핀에서 들어온 동생의 일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무얼 하시려고 저러시나? 하고 궁금해 한다. 맨몸으로 나갔다 맨몸으로 들어왔다. 이게 뭔가 싶었다. 하필 또 송사에 묶여 자유롭지 못하다. 쿠팡에서 일할까 하던 게 아버님 댁 근처에 무슨 닭 공장에 취직을 했다. 이게 뭔가 싶다. 아버지와 같이 사는가, 했더니 가족들이 들어오면서 돌아오는 토요일에 공장 근처로 이사를 한다. 공장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다. 특히 동남아, 필리핀 사람들이 많은가보다. 잠깐 올 겨울만 다닐 것이라 했던 공장인데 어쩌다 그 근처로 이사까지 하게 되었다. 몇 주 전에 한 사람이 새로 들어왔는데 저도 목사다.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호기심어린 마음으로 하나님이 뭘 하시려고 이러시나? 하고 궁금해 한다. 동생도 알지 못하고 간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말씀에 의지하여’ 길을 나섰던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란 모험으로 사는 삶이다. 모르는 사람의 시각으로는 무모하다. 누군 공격적으로 이 일을 두고 비난한다. 조롱하듯 지켜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묵묵할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 3:11).” 악이란 내 안에 이는 숱한 말들…. 할 말이 많다. 억울한 심정으로 대대거릴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 1:26).”

 

어떤가? 하고 물으면 동생은 그저 좋단다. 그 지경에 뭐가 좋다는 것인지……. 내 안에 부글부글 끓는 어떤 감정이 스스르 조용하여질 때 들리는 것 같다.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삼상 12:16).” 이는 영광이다. 숨죽이고 어느 장인의 작업을 지켜보듯 또는 입을 다물고 명연주에 집중하듯 “어떤 말씀이 내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욥 4:12).” 그게 무얼까?

 

우리의 난제는 조급함이다. 다른 말로 궤휼함인데, 우리 속에서 실은 이게 간사하고 교묘한 속임수를 꾀한다. 어떻게라도 하려고, 뭐라고 해야 할 것 같아서, 분에 따라, 감정이 이끄는 대로… 우리의 오늘은 이게 문제가 아닐까? 말을 참을 수 없다. 유튜브니 무슨 개인방송이니 하면서 서로 나팔을 분다. 어제의 ‘이 새끼’가 오늘은 ‘이 분’이 된다. 스스로의 마음에 놀아나는 시대다. “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너희는 패역의 자식, 거짓의 후손이 아니냐(사 57:4).”

 

오늘 엘리후의 등장은 말에 앞에 저의 침묵에 주목하게 하였다. 우리가 권세 잡은 자를 공경함이 아니라 굴복함이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저를 지지하고 호응하란 소리가 아니다. 우리의 오해는 무턱대고 적으로 돌리는 것처럼 아군으로 여기는 것이다. 바로는 바로였을 뿐이다. 헤롯은 헤롯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1-2).” 저들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의 섭리 가운데 서시는 하나님의 뜻을 고요히 바라봄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30:1).

 

대체 하나님이 왜 이러시는 걸까? 할 때, 때론 납득이 안 되고 용납이 안 돼도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사 43:23).” 우리로 그럴 수 있는 힘, 묵묵히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집중하게 하는 것은,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 저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17).” 어찌 순종할 수 있는가 하면,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116:5-6).

 

이러한 구원의 확신이 믿음의 결정이다. 믿음은 있으나 구원의 확신이 없어 헛발질을 해대고 애매한 데서 삽질하며 살다 죽음 앞에 서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그러니 별 수 없다. 듣지 못하고 자기 말만 하려 하고, 생수는 두고 엉뚱한 데서 삽질이니, 사는 게 지랄이라. 생지옥이란 말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79:9).

 

주의 자비와 긍휼하심 앞에 납작 엎드려서,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9).”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30:2-3).

 

이를 알고 느끼고 사는 사람이 복되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10).” 그러므로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5).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는 귀를 기울이신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5).

 

그러므로,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30:6-7).

 

부디 감사로 모든 걸 받을 때,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미 7:18).” 비로소 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8, 10).

 

그리하여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3-14).” 당장 거지 똥구멍에서 콩나물을 빼먹어도 시원찮을 판국에도 우리로 주께 드리며 찬송하게 하시려고….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