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전봉석 2023. 1. 1. 04:59

 

그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높이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의 일을 찬송하였느니라

욥기 36:24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시편 34:8-9

 

 

 

하나님의 절대공의를 강조하며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 앞에 지금도 죄인인 것과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의인이라도 죄를 지을 수 있고 이에 구원을 위하여 징계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앞서 세 친구의 주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세 친구는 ‘의인은 복 악인은 저주’라는 공식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다면 엘리후의 이와 같은 관점은 욥의 순전함을 인정하고 저가 의인인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징계가 불가피한 것을 강조함으로 회개를 촉구한다. “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8, 10).”

 

먼저 우리는 하나님을 전해야 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참고 가르치고 권하는 일이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이다. 곧 우리가 그래야 하는 까닭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전 3:13-14).”

 

혹여 자신의 과신함으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을까 조심해야 한다. 우리의 가장 큰 오산은 괜찮다, 다 잘 될 거다, 하는 데 있지 않을까? 스스로를 겸손히 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을 자신하게 하는 교만의 자리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사 14:12-14).” 그렇게 천사는 사탄이 되었고 의인은 불의한 자리에 빠졌다.

 

곧 우리의 지식이 우리로 교만에 넘긴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롬 8:1).” 이 확연한 차이의 간극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지혜이겠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2-3).” 오늘 우리 사회의 단적인 모습의 원인을 짐작하게 한다. 다들 자신들이 옳다고 하는 데서 함정에 빠졌다. 한 번 파고 들어간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서로를 끌어들여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에 따른 하나님의 처분은 공정하시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시 37:1-3).

 

이 귀한 세계를 살고 있다면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풀을 먹을 것이요 유리하는 자들이 부자의 버려진 밭에서 먹으리라(사 5:16-17).”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심이니이다

(138:6).

 

새해 첫 날, 나는 주 앞에 새로운 마음가짐을 다져본다. 늙으신 장모를 모시고 살면서 죽음을 곁에 두고 산다는 일이 오늘의 모든 수고를 단순하게 하는 것을 배운다. 가령 먹고 싸는 이 단순한 일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 노새와 같이 늙을수록 완고하여지는 마음이 이해가 된다. 자신이 옳다 여기는 것을 쥐고 놓기가 그리 쉬운 게 아니었다. 그때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0-11).”

 

하루하루가 소중하였다. 내일 모레, 천년만년이 헛될 뿐이다. 그래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새삼 아직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는 까닭은 돌이킬 수 있는 기회와 주를 바랄 수 있는 마음의 순서가 남아서이다.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4).” 그저 하루하루 연락(宴樂)을 즐기며 살다가 언제 오라 하시면 홀연히 떠나는 게 인생이었다.

 

좀 무리한 생각인 것을 알지만 나는 요즘 잘 늙고, 잘 죽을 수 있는 데 따른 올바른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언제 어찌될 지 알 수 없으나 이를 준비하고 사는 것이 막연하게 노후 생활을 운운하며 향락(享樂)을 즐기려는 데 마음을 두는 일보다 지혜 있다. 근심은 단 한 시도 끊어지지 않는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3).” 그렇다면 그 근심이 우리 영혼에 유익을 더할 수 있도록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전 7:3).” 다시 말해서 겁 없이 함부로 살지 않도록 죽음을 곁에 두고 근심과 함께 주를 바라며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본향을 대비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그러저러함에도 장모의 삶에 대한 애착이 우리의 늙음이 가져오는 생에 대한 한없는 집착일 텐데,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임을 안다면,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121:4).

 

이에,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5:12).

 

이 원리를 붙들고 사는 것,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 3:12).” 이에 우리가 주를 사모함으로 주신 생을 다하는 동안 주의 나라에서 살 자로 날마다 의식하고 주의하며 준비된 자로 살 수 있다면…. 혼자 생각이지만 그래서도 철저한 기독교적인 요양시설을 꿈꾼다. 매순간을 찬송하고 기도하며 생을 다하는 동안 저를 온전히 말씀으로 돌볼 수 있다면… 곧 우리가 들어갈 저 본향을 위하여, 이에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7:11-12).

 

돌아보며 은혜에 감사하는 만큼 회개할 수 있는 것도 귀하였다. 노인의 완고함이 그러해서일 수도 있겠다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완고함이란 자신이 옳다하는 기준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은 다음 대선 출마를 선언하는 것을 보면서 죽을 때까지 끝이 없는 사람의 욕망 앞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누구보다 독실한 신자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이 죽기까지 악착같이 살다오기를 바라시는 것일까? 성경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그렇다고 맡기신 생을 가벼이 여겨 헛되이 살라는 게 아니라, 그 목적이 우리는 하나로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대를 환난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그대의 상에는 기름진 것이 놓이리라(욥 36:15-16).” 나는 오늘 엘리후의 말을 그리 읽는다. 이는 오늘 시편의 어처구니없는 찬송에서도 같은 심정이다. 어처구니 없다는 것은 시 앞에 붙은 부제에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 하여 그렇다. 생의 가장 비참하고 수치스러울 자리에서,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34:1).

 

어찌 이와 같은 찬송이 가능할까?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2).

 

지금 저의 상황이 그럴 수 있는 지경이 아니지 않나? 그런데 그러는 것은 순전히 가식적이거나 온전히 주를 신뢰함 이 둘 중에 하나일 텐데… 우리의 가장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곧 닥쳐올 죽음을 느끼고 이를 몸으로, 마음으로 준비해야 하는 순간일 텐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0-21).” 곧 ‘범사에’ 그러할 수 있는 평소의 연마와 숙련된 시간이 결정적으로 주가 오라 하실 때 ‘아멘’ 하고 이에 응할 수 있도록.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6).” 바로 그 허탄한 자랑을 비우고 또 비워버릴 있는 노인연습과 죽음대비다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늙으신 장모와 성경을 나누며 대화할 때면 늙음과 죽음도 학습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몇 번의 장례는 치러봤지만 믿는 자로서 실제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해 두려워하는 영혼을 마주하기도 하였다. 정말 천국이 있을까요? 하는 불안부터, 내가 과연 갈 수 있을까요? 하는 의심과 자신의 믿음을 새삼 믿을 수가 없어 두려워하는 이에게… 어쩌면 이제 소아학교 학습만큼이나 노인학습의 중요성을 자주 생각한다. 어쩌다 아내는 요양사와 사회복지사를 뒤늦게 공부하고 땄다. 저이도 평생을 아이들 학습을 돕는 자로 살았다면, 하나님의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 나야 늘 어디가 아프고 그게 일인 사람이라, 육신의 질병이 주는 마음의 소요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많다. ‘좋은 죽음’을 돕는 노인연습이 필요하다. 능력이 되면 작게라도 그런 시설을 교회로 흡수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진심으로 우리가 죽음을 맞으며 ‘할렐루야’로 주를 찬미하며 주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나는 요즘 부쩍 장모의 머잖은 생을 두고 여러 생각이 많다. 하나님이 어찌하시려나… 하는 호기심도 들면서.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3-4).

 

우리로 두려워하게 하는 근본적인 것을 두고, 죽기까지 한사코 이를 외면하려 드는 죄의 속성을 생각하면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심지가 견고할 수 있기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고로 나는 생각한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7).

 

이 놀라운 광경을 영안을 열어 보게 할 수만 있다면…. 아직 멀었다 싶을 때는 이보다 막연한 소리도 없겠지만 죽기보다 못한 치욕을 당하고도 시인은 찬미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8-9).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 이는 너무 흔한 것이라 다들 그러고 사는 데 반해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어떻게?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7, 8).” 이를 붙들고 살고 이를 의지하며 노인이 되어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간혹 어떤 이의 복된 죽음소식을 듣는다. 생신 상을 받고 모처럼 온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평안히 누워 잠들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어느 권사의 이야기나 강단에서 마지막 설교를 다하고 가만히 앉아 기도하면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어느 목사의 이야기는 경이롭다.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12-13).

 

저들의 공통점은 늘 기도하는 삶이었고 주를 사모하는 날들이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3: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84:11).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우리 생은 그러하였다면 죽음도 그리하실 것을 믿는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하여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주가 오늘 내 마음에 두시는 어떤 생각을 두고 주의 뜻을 헤아려본다. 어찌하시려는가, 하고 호기로운 마음으로 뜻을 모으기도 한다. 나도 내가 생각처럼 장모와 생활하며 노인의 습성과 삶에 애착과 죽음에 대한 동일한 막연함 앞에서 새삼 놀라워한다. 한 영혼을 마주하는 일이겠으나 생의 끝자락에 서 있는 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34:18).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고통으로 일그러져 생을 허비하지 않도록,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벧후 2:9, 고후 5:10).”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