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시편 44:6
우리가 서로 신앙 안에서 마주하고 대한다는 일. 어떤 일을 두고 생각할 때 그 결정의 근거를 말씀에 두는 것.
어느 날 예수께 물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마 12:2).” 무엇을 보고 그랬는가 하면,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는 모습을 보고 꼬투리를 잡는 것이었다.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7).” 저들이 누구인가? 바리새인들이다. 성경학자라 할 수 있는 종교지도자들로 학식이 넘치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말씀으로 응수하신 것이다(호 6:6).
우리는 아는 게 병이다. 스스로의 판단이 걸림돌이 된다. 오늘 잠언은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7).” 여기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8).” 이와 같은 원리가 우리로 바른 길로 인도한다. 이에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하고 말씀을 나누고 이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것을 알게 한다(신 6:7).
믿음은 있되 구원의 확신이 없을 때, 이는 마치 태어났으나 자라지 못하는 장애와 같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그 삶의 판단과 기준은 세상적인 윤리와 도덕에 이끌려야 한다면, 머리만 큰 바리새인으로 사는 일과 같겠다.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8-9).” 온통 말씀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기를. 외국어를 잘 하는 친구의 말을 들으면 저의 사고체계가 그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소릴 종종 한다. 같은 것을 봐도 다른 시각으로 본다는 소린데….
일련의 사태를 지나면서 우리의 ‘받아들임’이 믿음 성장의 기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자라가야 한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렘 1:7).” 저는 주의 말씀 앞에 주저하며 말하였던 것이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6).”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누가 곧은 것을 펴겠으며 굽게 하신 것을 곧게 할 수 있겠나?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하여 오늘 지혜자는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잠 4:5-6).”
성경은 우릴 부르신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사 55:3).” 다시 말해 우리 영혼이 사는 길은 구원뿐인데, 과거로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이는 내게 주신 선물의 믿음으로다. 현재로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이를 알고 누리고 사는 일이다. 미래로는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롬 10:1).”
이를 위하여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러한 말씀 앞에 오래 머물며 되새길 수 있어 복이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저의 어떤 판단을 두고 나는 여러 성경의 근거를 생각한다. 말씀으로 이를 접근하려고 의도적으로 모르는 척 할 때도 있다. 내 생각이나 판단으로 뭐라 한들… 사람, 사람 말 참 안 듣는다. 하물며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하시는 말씀이 들릴 리 없다. 우리가 죄에서 정죄함은 받지 않는다 해도 이를 벗어나기까지는 살아야 한다. 자주 짓는 가벼운 죄(?)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기쁨’을 같이 누리지 못한다. 누가 말했다. 내가 요즘 우울해… 하고 운을 떼면서 몸은 자꾸 어디가 아프고, 하려던 일은 생각처럼 안 되고, 어머니는 편찮으시고…… 하면서 이어지는 말에 나는 위로의 말을 더하시기를 구하였다.
신앙을 지킨다는 일은,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시 73:23).
아니면,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2-3).
안 믿는 자들의 잘 됨이 때론 우릴 갈등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그래서 나는 종종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말을 되뇐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리하지 아니하신다 해도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입증할 수 있다. 요즘 자주 붙들리는 생각이지만 우리가 주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된다는 것은 ‘어떠하든지’ 주로 기뻐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할 때이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안 믿는 자들은 뒤를 돌아보며 살고, 믿는 자들은 앞만 바라보고 산다. 안 믿는 자들은 자신들이 한 일을 기억하며 살고, 믿는 자들은 자신들이 할 일만 생각하고 산다. 어제 어머니와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재차 강조하였던 내용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저들은 자신들이 한 일을 기억하고 살지만,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아, 이보다 더 절망적인 순간은 없겠다.
한데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25:37-39).” 상대적으로 의인들은 이를 잊고 지냈는데,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40).” 하나님이 기억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도 안 믿는 자들은 과거를 회상하며 살고, 믿는 사람들은 미래를 소망하며 산다. 우리에게 천국의 소망이 없다면 이보다 불쌍한 인생도 어디 있겠나?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모든 판단과 기준을 말씀에 두고 산다는 일은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우리 구원의 보화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사는 일,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84:11-12).
우리의 복은 다르다. 서로가 바라는 게 다르고 사고하는 게 다르다. 언어의 체계가 다른 것처럼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잠 2:7-8).” 늘 다시 되뇌고 또 붙들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단 3:17-18).” 우린 저들처럼 기도할 뿐이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분명하게 붙들 것을 붙들고, 아닌 건 죽었다 깨어나도 아닌 것임을 확신하면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혼자 들어앉아 자리를 지키면서, 때론 어떤 회의가 또는 갈등이 불현듯 생겨날 때도,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16).” 묵묵히 또는 무던하게 오늘도 맡겨주신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내 ‘일의 열매’가 될 것임을.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빌 1:22).” 알지 못하는 그 일을 두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0-12).”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사는 동안 이를 원하는 것은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계 1:19).” 이에 오늘도 묵상글을 쓰며 하루를 시작한다. 한 날의 기록이 아침에 묵상하는 이와 같은 내용이기를. 이에 오늘 잠언의 말씀에서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지키고 또 견뎌야 한다. 이에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8).” 반드시 어느 가까운 날에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9).” 우리에겐 이와 같은 산 소망이 있다. 그러므로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24).” 불쑥, 튀어나오는 불평과 원망에 화들짝 놀라서 얼른 주께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을 잃을까 하여서다. 아니면 이 땅을 사는 이유가 무색해진다.
하여 나는 의도적으로 곧 죽을 것과 죽어야 살 것을 두고 늙으신 장모에게 불편한 소릴 한다. 말씀으로가 아니면 전할 수가 없는 말이다. 아흔이 다 되어도 생에 대한 집착은 마르지 않는 것이어서,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냐’ 하시던 분이 이젠 그 너머의 세계를 바라게도 되었다. 오늘 잠언의 교훈도 그러하여서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25-26).” 자칫 안 믿는 자들보다 더 불쌍하게 사는 사람들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좌고우면 이리 쓸리고 저리 몰려다니느라 정신을 못 차리는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27).” 이것이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시 44:1).
말씀에서 우린 우리의 날들이 어떠한지를 배운다. 분명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이는 야곱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에 이르러 나에게 하시는 소리였다. 반드시 저는 자신의 이름의 위하여도, 그 영광을 위하여도, 이루실 것이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8:9-11).” 이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4).
이는 오늘의 내 것이라.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5).
이를 위하여 우리는 세상과 같이 살지 않는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6).
당대의 학자요,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를 가지고 위정자로 살았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나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이 외치신 말씀,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16).” 하실 때 저들은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그러니 그 속에 예수의 말씀이 들리기나 하였겠나? 오늘 하루, 육신으로 사는 것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의 열매’이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빌 1:22).” 무엇을 어찌 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그러므로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
(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