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전봉석 2023. 1. 12. 05:26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죽겠고 심히 미련함으로 말미암아 혼미하게 되느니라
잠언 5:22-23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시편 45:1



악은 어찌 고쳐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잘 다루어 바르게 가르친다고 될 상대가 아니다. 오늘 8절,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 하라 그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하심은 피하고 버리고 떠나는 게 상책인 것이다.

어제 장모와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이를 두고 한참을 다루었다. 뒤를 돌아보고 흘러간 것에 미련을 두어 이를 곱씹고 되새기며 구슬픈 가락에 자신의 마음을 흔들거리는 것이 안 믿는 자의 모습이란 것을 강조하였다.

우리의 향기로움 곧 새 사람은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요 10:17).” 이를 감행하였던 예수님은 이르시기를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여기서 자기부정은 엄청난 저항을 감수해야 한다. 스스로를 적으로 돌리고 사는 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요일 2:15, 딤전 6:10).” 이를 이렇게 한데 묶어 여러 번 읽으면 예수님의 명령이 무엇을 바라시는가를 알 수 있다.

곧 자신을 아버지 손에 맡긴 삶,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 23:46).” 우리가 죽음에 이르는 연습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하여 우리가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지혜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1:12).”

지난날 함부로 살던 때에 주가 베푸신 은혜를 돌아보면 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런 가운데,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시 38:15).

이에,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5:21).

주가 나와 함께 하심을 체험하고 그 길로 나아가는 것,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말씀 앞에 가만히 세우는 일, 나를 두고 주께 아뢰는 가운데 주가 더하시는 지혜는,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34:13-14).

이제 곧 가야 할 길을 밝히며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예배 중에 장모의 말을 압도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저가 얽매여 그 얼개를 풀지 못하는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놓여나 자유하기를 기도한다. 귀로는 듣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그 마음과 생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옛 사람’의 ‘구습’에 대하여 이를 상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다못해 지금 자신의 딸이 자신을 돌보느라 손목이 무리가 생기고 어깨의 통증을 호소하는 데도 ‘같은 처지의 키우던 개’한테 온통 마음이 빼앗겨 있다. 점심나절 이를 직접 언급하는데도 마치 딸의 일은 모른다는 듯 외면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돌아가기만 하면 ‘아픈 강아지’가 다 나을 것처럼 얼토당토않은 말을 이어낸다.

아, 사람의 마음이 치닫는 곳에 자기 의와 자기 욕심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내 안에 이는 어떤 거부감을 주께 아뢰며 긍휼을 바라였다. 말씀으로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어 가정예배시간이 한 시간 반을 넘긴 지 오래다. 들어주는 일을 멈추었다. 그만, 하고 경고카드를 꺼내듯 나는 말씀을 디밀었다. 우리의 늙음이 영화로우려면,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 16:31).” 결국은 의로운 길에서 얻는다. 우리의 그 길은 어디인가, 생각하였다. 말씀으로밖에는 내가 주도할 수 있는 무기가 없었다. 나는 전하고, 나머지는 성령이 감당해주시기를.

한 영혼을 다루는 일이나 노인 하나를 건사하는 일이 이처럼 고단한 일인 줄은 몰랐다. 특히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문제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다. 그 고집이란 평생을 몸에 밴 습관이라, 아이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이에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11).” 세상은 온통 자기들 고집불통으로 아수라다. 난장질에 온 영혼이 파괴되는 것을 모른다.

하나님은 시름에 잠긴 나에게 위로를 더하시는가, 아침마다 딸애를 전철역에 바래다주는데, 드디어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교제하는 청년에 대해 털어놓았다. 군목으로 그 부친도 목회를 하셨고, 군에 매인 몸이라 일반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으나 서로 좋은 감정으로 임하며 기도하고 주의 인도하심을 바란다고 하였다. 딸애를 내려주고 오자 갑자기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보면 늘 내겐 두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 크다. 나는 너무 늦게 주를 사랑하면서, 젊은 날 그 어린 시절에 아이들을 신앙적으로 키우지 못했다. 모범을 보인 게 없고 저들 기억엔 온통 신경질적이고 변덕스러운 모습만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주가 이처럼 기르시고 신앙 안에서 자라게 하신 것은 순전히 가족들의 기도 덕분이고 나아가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뿐이다. 이제는 어떠하든지 아이의 선택에 마음이 편한 것은 주가 저 아이를 이끄심을 나는 늘 곁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이끄심을 나는 몸소 산다. 내가 일구어 내세울 게 없어서 때론 참 다행이다. 남들에겐 흉이 되어도 나는 그게 다행인 것은,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8:9-11).” 나는 요즘 이 말씀을 자주 읽고 되새긴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이고 감사하기만 한지. 내가 한 게 없어 오히려 감사한 것도 너무 뻔뻔한 게 아니라면, 나는 아이들이 오늘과 같이 주 안에서 순종함이 가장 큰 은혜다. 내가 한 일을 생각하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 1:10-11).”

가끔은 내가 선택한 길이 아니어서 감사하고, ‘꼼짝 마라!’ 하고 붙드시고 계심이 감사하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다.’ 하고 처음 목사고시를 치를 때 면접을 보며 했던 말이 그야말로 나의 목회의 여정이 될 줄은 몰랐다. 그저 한 영혼, 나는 미력하고 수십 명의 성도나 수백 명의 성도를 마주하지 못해서 감사하다. 그러니 수천 명의 성도들을 건사하는 큰 교회 목회에 대하여 나는 할 말이 없다. 다만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예수께서 그러하심으로,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

‘~하셨느니라.’ 하시는 말씀에 나는 안도한다. 내가 무엇을 이루고 한 것에 따른 것이 아니어서 참 다행이다. 아이들 일에서 벗어나게 하심으로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으로 힘에 겹도록 주를 전하는 일,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전 12:11).” 그리하여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나로 성경을 바로 알고 이를 가지고 곤고한 자를 위로할 수 있도록, 나를 깨우치시기를 아침마다 빈다. 하여 좋은 말, 복음의 말씀만으로….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45:1).

이는 곧,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누굴 어찌 선도하는 게 급선무가 아니라, 내가 나를 채워야 하는 것이 먼저 있었으니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내가 지난날을 돌아볼 때는 오늘의 은혜로 감사가 넘칠 때이다. 감히 나는 손을 내저어야 할 위인임에도 주가 안겨주시는 긍휼하심 앞에서,

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시도다
(2).

오늘 시편은 축혼가로 아가서를 연상하게 한다. 나의 왕 되신 이의 신부로서 나의 삶이 정결하기를.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 7:9).” 그의 인자하심을 온몸을 누리며 사는 데 대해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곧 나의 실천은 필사적으로 주 앞에 엎드려 주를 의뢰하는 일로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감히 그러하진 못하나 그러하기를 사모하며,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4:11).” 그러할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6).

곧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주가 이루심을 믿으며. 나는 다만 주어진 상황에서 주께 바라고 의뢰하며 할 수 있는 것에 무던하기를. 마치 시므이가 쫓아오며 조롱하고 욕하고 흙을 뿌릴 때도, 시글락 왕 앞에서 미친 체 하며 침을 질질 흘리고 나오면서도 주의 인자하심을 생명보다 귀히 여겼던 다윗과 같이.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10).

몸에 밴 습관을 떨쳐버리고,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주가 날 위해 행하심을 깊이 묵상하면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하게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하리로다
(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