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전봉석 2023. 1. 26. 05:22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잠언 19:21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시편 59:16-17

 

 

 

어쩌면 우린 성실하였으나 손해를 보고 정직하였으나 억울한 일을 당함이 마땅하였다. 오늘 잠언 1절이 이를 암시한다.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그럼에도 우린 굴하지 않는 자들로 ‘지혜’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8).” 마음이 이러저러한 것에 대하여는 악인들이 상대적으로 무성하고 풍족하게 얻는 것 같아서인데,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시 37:35-36).

 

우리에게는 말하기 어려운 기시감이 있다. 분명히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처한 상황은 난처하기만 한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곧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92:7).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84:11-12).

 

어떤 일을 두고, 누구의 경우를 보면서 뭐라 단정 지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게 아닌 것 같은, 혹은 그러할 것 같은 어떤 확신이 들 때가 있다. 이는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2).” 하는 오늘 잠언이 내포하는 의미다. 그러니까 우린 길을 모르면서도 나아간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43:3).

 

이와 같은 소원이 우리 안에 있는 까닭은 상대적으로 주께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우리 안에 감사가 먼저 일어나는 경우는 세상의 면면을 볼 때 더욱 확실해진다. 이를 잠언은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3).” 그러니 누가 말릴 수 있겠나? 뭐라 한들 듣기를 하겠나? 그냥 싫은 데는 이유가 따로 없다. 주가 저에게 그리하라고 두신 탓이다. 한데 우리의 길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19:105).

 

저녁에 막 졸음이 쏟아지다가도 나란히 앉아 말씀을 나눌 때면 한 마디 한 마디에 주가 더하시는 지혜가 있음을 느낀다. 이 느낌, 어떤 기시감에 대하여 나는 설명할 수 없다. 마치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경우처럼 가지는 자신에게 열린 열매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나무에 의해 공급되고 있을 수액, 생수에 대하여 가지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저 가지는 나무에 매달려있음으로 이와 같은 사실을 산다. 이를 앎으로 우린 구하게 되는 것이다. 기도란 참 기이하여서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만난 적이 없지만 저를 아버지라 부르고 그 앞에 구할 수 있다. 곧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 열매를 맺기까지 받는 하염없는 공급을 느낀다. 곧 끊임없이 수액을 공급받아야 살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자연스럽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살 수 있는 것처럼, 주가 내 안에 내가 주 안에서 거하여야 함을 아는 것. 이는 어떤 말로다 설명할 수 없는 우리 안의 확신이며 어찌 이성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하여 우리가 그 안에 그가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 구하였더니 이루어지는 일에서 이를 확증할 수 있다.

 

어떻게 설명하기 어려운, 그럼에도 우리가 누리는 자유에 대하여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1-32).” 이는 말씀이 없으면 설명이 안 되고 설명할 수 없는 것에서는 답을 얻을 수 없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요일 2:24).” 그러니 우린 설명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 사는 사람이다. 자신도 미처 설명되지 않는 것을 이루며 사는 삶이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하여 오늘 잠언의 진술과 같이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8).” 이상하지? 우리는 모르면서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 영혼이 먼저 알아서 이를 찾아 얻는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이처럼 다소 억지스러우나 매일 새벽에 깨우시고 말씀 앞에 앉히시는 것이 나의 의지로인가? 주의 강권하심으로인가? 나는 분명히 설명할 수는 없어도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7:37-39).”

 

곧 주 앞에 엎드려 주의 이름을 부르며 구하고 바라는 어떤 기이한 현상으로써 목마름을 느낀다는 게 믿는다는 일이고 믿는 자로 산다는 게 구할 수 있다는 증거였다. 어떤, 설명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6-7).” 그렇게 나무는 가지에 대해 소유권을 행사한다. 하나님은 마땅히 나를 요구하신다. 이를 우리는 다 알지 못하나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1-12).” 이와 같은 말씀을 전할 때 혹은 듣는 이는 저도 모르게 아멘, 한다.

 

그러니 안 믿는 자들에게 무슨 수로 이를 증명하고 설명할 길이 있겠나? 저들은 그저 저들의 악을 행할 뿐이고 우리는 그 부당함을 느끼면서 오히려 주의 자녀인 것을 확인한다. 가령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는다는 소식을 들으셨다. 그럼에도 저를 죽기까지 내버려두셨고,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요 11:6).” 이는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4).” 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알고 계셨다. 우리 생각에는 그리 아니하셨으면 좋겠는데, 그리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도 한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17:24).”

 

때론 어이없고, 난감하고, 속수무책인 상황까지 내몰아가심으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추측도 할 수 없는 경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오늘 잠언은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 자기의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는 죽으리라(16).” 우리와 저들의 차이를 확실히 한다. 곧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20).” 기필코 하나님은 이루신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어떤 일까지 감행하셨나?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10).”

 

뭘 꼭 그러기까지 하실 필요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으나,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8-19).” 죽고 이미 갇혔던 우리로 살리신 것이다. 하여 오늘 날 우리가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이 놀라운 결말을 알면 알수록 확신하는 만큼 때론 무모하고 때론 확실하다. 이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23).” 오늘 잠언은 단언하고 있다. 우리 안에도 이를 확신하는 능력이 있다. 하여 우리는 이미 결말을 알고 산다.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29).”

 

그런 상황에서의 기도라….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59:1).

 

가지는 더 많은 수액을 나무에게 요구할 수 있고 나무는 기꺼이 뿌리로부터 빨아들여 공급한다. 그 증거는 기도였다. 내가 뭘 맡긴 것도 아닌데 당당히 우린 요구한다. 달라고 구한다. 신기한 것은 이를 하나님은 또 즐거워하신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우리 관계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당당할 수 있고 무궁하심으로 무한 사랑으로 공급하시는지, 우리는 이성을 다해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2-13).” 쥐뿔도 없으면서 내 코가 석 자이면서도 누구를 생각하며 저를 위하여 주 앞에 부르짖어 호소할 수 있는 것은 저도 나무에 붙은 가지라.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우리가 언제 무얼 맡겨놓은 것도 아니면서, 이처럼 담대하고 구하고 또 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1).” 대체 내가 뭐라고! 나는 마치 억만장자의 아들처럼 물 쓰듯 마구 요구하여 쓴다. 기도란 그래도 되는 것이어서 수액을 빨아들인 나무는 어느새 열매를 맺는다.

 

주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니

일어나 모든 나라들을 벌하소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마소서 (셀라)

(5).

 

하는 요구도 우리 맘대로 구할 수 있다. 아들은 그래도 되고, 그 요구와 간구를 아버지는 유용하게 더하신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가 그처럼 부르짖을 때 기뻐하신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5-16).” 아주 가끔은 내가 누구를 생각하고 저를 위해 기도하며 어떤 앞날을 소망하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길 때가 있다. 내가 뭐라고 저를 위해 기도하나 싶어서… 그런데 오늘 아침 말씀은 마땅이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어째서냐면,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

(9-10).

 

이 놀라운, 어찌 설명할 수도 없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 때문이다. 나는 종종 놀란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마구 요구하다 순간 면구스러워 슬쩍 의심이 들 때도 있지만, 이제 확신하는 것은 누굴 위해 기도하는 것이 곧 내게로 돌아오는 유익이었으며 몇 배는 더 크게 부어주시는 그릇이 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날 위해 늘 구하고 죽어라 하고 나만을 위해 빌 때는 몰랐다. 한데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알면서 나는 의도적으로 나의 필요를 중보로 한다. 저들을 위해 빌 때 나의 필요는 시치미 뗀다. 마치 오규원의 시에서처럼, 참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휘청하고도 시치미를 떼는 것처럼, 이미 채워주셨음을 알면서는 마치 전혀 몰랐던 것처럼 놀라워한다.

 

하여 나는 기꺼이 누가 무얼 기도해달라 할 때 노트를 펴고 저의 이런저런 사연을 적어둔다. 하나님은 벌써 다 아신다는 것을 알면서 내가 잊지 않으려고, 비록 이것이 나의 능청스런 시늉이라 해도 하나님은 다 아시면서도 모르는 척 이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나도 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그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이 정말 모르시겠나? 다 아시면서도도 내가 고하고 구하며 메모한 것을 더 바랄 때 하나님도 모르시는 척 그리 기뻐하시며 들어주신다. 

 

창 밖으로 조용히 눈이 내린다. 건설이다. 후, 불면 눈발이 저만치 날아간다. 이 아침, 주와 함께 저 고요하게 쌓이는 눈을 바라보면서,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하고 나는 마땅히 주를 찬송한다. 하면서, 주를 인정할 때 주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신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1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