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전봉석 2023. 1. 28. 05:03

 

지혜로도 못하고, 명철로도 못하고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하지 못하느니라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잠언 21:30-31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시편 61:2-3

 

 

 

우리 삶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임의로 다스리신다. 오늘 잠언은 이 점을 일깨우며 말문을 연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1).”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 같다는 것, 가령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출 7:3-4).” 이는 저가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곧 모든 것을 주의 뜻에 따라 주장하시고 주관하신다.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대하 20:6).”

 

이것은 오늘 잠언의 주장이기도 하여, 우린 그 무엇으로도 주를 당할 수 없다. “지혜로도 못하고, 명철로도 못하고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하지 못하느니라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30-31).” 이김이 주께 있다는 것, “나는 내 큰 능력과 나의 쳐든 팔로 땅과 지상에 있는 사람과 짐승들을 만들고 내가 보기에 옳은 사람에게 그것을 주었노라(렘 27:5).” 이에 우리가 주의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음은 당연하였다. 더욱이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 이유를 찾기란 쉽지 않다.

 

다만 우리 속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17:10).” 예레미야의 증언이 놀랍고도 다행이다. 곧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것으로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 10:18).” 주가 보시기에 합한 사람으로 사는 일을 오늘 잠언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21:3).” 공의와 정의를 귀히 여기는 것은,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욥37:23).” 이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사 56:1).”

 

주 앞에 정직하고 공정히 행하는 것,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흐르는 통로로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5:8).” 결국 우리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으로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곧 이 세상을 바로할 수 있는 것이 공의와 진리에 있었다. 이를 위해 우리를 오늘에 두셨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그럼 이런 삶을 사는 일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요즘 나는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자는 말을 종종 한다. 우린 너무 지나치게 자신의 일에 빠져 산다. 조금만 아파도, 어떤 문제가 닥치면, 무슨 일을 두고 마음을 행사하는 일에 대하여…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우리 나이쯤 되면서 몸은 여기저기 아프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생활은 그리 녹록하지가 않다. 누구는 어깨 수술을 두고 며칠째 마음이 어려웠고, 누구는 자식의 허리 디스크 때문에 온통 걱정을 떠날 수 없다. 누군 아니라고 하면서 지나치게 아이 일에 몰두한다. 서로가 너무 밀착되었고 자신에 대해서도 너무 많이 마음을 쓴다. 그러느라 정작 남을 위하고 생각하기 어렵다. 가령 어떤 전화로 무슨 일을 두고 이야기할 때 대부분은 자기 관심이 전부다. 간단하게라도 요즘 어떠신가? 하고 상대에 대해 물을 겨를이 없다. 관심은 자신에게 편중되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도 상실한다.

 

오늘 잠언은 이를 빗대어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겠고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하리라(11).” 이는 곧 누구의 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그런데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13).” 자기 말에 함몰되면 남의 말을 들을 수 없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속엣 얘기도 미처 알아듣지 못하는 법이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나는 저들이 뜬구름 잡는듯 한 말과 생각에 놀란다. 일의 순위가 항상 ‘나’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식 일을 두고도 이타적인 생각은 어려운가보다.

 

그런 우리가 주를 온전히 바란다는 것은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 12:33).” 하시는 말씀 앞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일이겠다. 그러려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와 같은 말씀으로 얼마나 자유할 수 있을까?

 

한데 우리 삶은 늘 안개 같아서 일시적으로 부는 바람에 불려 다니는 게 일이라, 잠언은 우리에게 정직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않을 때는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과 같아서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하고 단정하며 이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 하고 정리하고 있다(6). 순간의 이익이라 어떤 바람을 이루기 위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길 위에서 우왕좌왕 하는 것과 같다. 이 일시적인 바람은 헛것이어서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들에게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 바람에 날려 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사 57:13).” 이 얼마나 한심하고 처량한 결과인가? 스스로 구한 우상으로 만족하는 자는 자신을 의뢰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게 하는 구실이 된다.

 

이 모두는 헛된 것,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허망하고 허탄한 것, “여러 나라의 풍습은 헛된 것이니 삼림에서 벤 나무요 기술공의 두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렘 10:3).” 이와 같은 허상이 우리 생각을 지배한다. 자신에 대한 몰두 또는 그 만족에서 이는 자식이나 가족에 대한 사랑은 우리로 허탄한 것을 알게 한다. “너희가 다 이것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그토록 무익한 사람이 되었는고(욥 27:12).” 이는 마치 자신에게 유리한 길로만 가려하는 것으로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신 25:13-15).”

 

이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 해도 주가 아시는 일로 그 결국은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1).” 생의 끝자락에서나 이를 깨닫고 후회할 것인지. 다시 한 번 잠언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공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얻느니라(21).” 이 공공연한 사실을 우린 끝내 이행하지 못하는 것일까?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125:5).

 

생을 허비하고 있다는 것은 이와 같은 말씀에도 자신을 돌아보아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태만으로 인한 것이든지, 안이함으로 그러한 것이든지… 시간은 흘러 어느새 곁의 대부분은 중년이 되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조각 사이로 지나매 내 앞에 언약을 맺었으나 그 말을 실행하지 아니하여 내 계약을 어긴 그들을곧 송아지 두 조각 사이로 지난 유다 고관들과 예루살렘 고관들과 내시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내가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며 또 내가 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그의 고관들을 그의 원수의 손과 그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넘기리라(렘 34:17-21).”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나는 두렵다. 이에 눈에 띄는 말씀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받고 싶으면 주라 하시는 진리 앞에 선뜻 순종하기가 어렵다. 다들 내 코가 석 자라…. 이러할 때에 우린 주께 외쳐 기도한다.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61:2-3).

 

곧 생의 어려움 중에 주를 부르는 일,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1).

 

그럴 때 성경은 엄연히 말씀하기길,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렘 6:19).” 이와 같은 고백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살 수 있다면… 주는 나의 힘이시고, 네 보장이시며, 나의 환난 때의 피난처시라니!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 1:7).” 이에,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7-8).

 

짧고도 긴 오늘의 시편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새삼 알게 된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이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