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잠언 25:13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시편 65:10
하나님은 때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감추신다. 그럼 우린 그 일을 깊이 헤아려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한다. 그에 따른 단서는 말씀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이를 오늘 잠언은 필두로 알린다.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니라(1).” 여러 시대 여러 사람을 거쳐 기록되었으나 이를 쓴 이도 편집하고 필사한 이도 모두 한 성령의 감동으로 그 일을 이루었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2).”
읽어라, 살펴보라 하심은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에 따른 것이다. 하나님은 드러나지 않는 것에서 모든 것을 완전하게 이루신다. 이를 잠언의 기록으로 보면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2).” 숨기고, 살피고, 그러는 가운데 더욱 무궁한 하나님의 세계는 펼쳐진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곧 우리로 ‘읽는 자’가 되고 ‘누리는 자’로 남길 바란다. 이를 위해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니! 이에 우리의 더러움이 제거된다.
주의 뜻을 알고자 헤아리며 찾아 읽고 묵상하고 생활을 성찰하며 사는 동안,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4).” 잠언의 문구 하나하나는 한 세계를 이룬다. 이것들이 모여져 천체를 이룬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도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세계가 그 속에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 또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따른 그 세계를 우리가 어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이에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는 일’과 같이 우리로 본래의 우리를 마주하게 하시려고,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롬 7:1).”
내 안의 온갖 더러운 것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이를 제거하라는 것인데 이 또한 내 의지로는 할 수 없다는 데서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6).”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처럼 구는 게 자존심인지, 자만함인지, 참 꺾어내기가 어렵다.
결국은 나를 맞추는 일은,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 10:13).” 그러므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나는 이 말씀을 자주 되새긴다. 그러다 보면 오늘의 잠언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13).” 이 말씀을 목사 고시 때 설교 말씀으로 들어서인지 더 자주 생각나곤 한다. 이를 쉽게 풀어쓴 것을 보면 “믿음직한 심부름꾼은 그를 보낸 주인에게는 무더운 추수 때의 시원한 냉수와 같아서,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내가 내 주인에게 적당하였으면… 하는.
적당하다는 말, 정도에 맞다는 말로 알맞은 한도, 그만큼가량의 분량… 더 차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길을 가는 자에게 꼭 필요한 정도(精度)의 정도(正道), ‘알맞은’과 ‘올바른’의 그 나란함을 연상하게 한다. 이를 성경에서 읽으면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만족스러워하실 수 있는 사람. 주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과 같은. 우리에게 맡기신 한 생의 무게를 감당한다는 일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구원을 이루신 것과 같이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 ‘다 이루는 시간’으로 꽉 차게.
친구는 아들이 군입대 서너 달 만에 허리디스크 파열로 의가사제대한 뒤로 수심이 깊었다. 아직 젊은데 끙끙거리며 진통제로 견디는 모습을 보는 일이란… 수술 날짜가 6월께로 잡혀 기도를 부탁하더니 3월께에 누가 예약을 포기하면서 당겨졌다고 한 게 며칠 전인데, 어제는 당장 오늘 오후 두 시에 수술을 하게 되었다며 그 시간 예약자가 코로나로 미뤄졌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저들에게 보이시는 ‘하나님의 일처리’를 저에게 슬그머니 귀띔하였다. 아이는 성적 때문이라지만 모 신학교 기독교 교육학과에 들어갔다. 아이는 그 가정의 불씨로 부모까지도 교회로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했다. 분명히 하나님이 감추시고 있는 일이 있지만 조금만 헤아려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아주 숨기지는 않으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우리로는 알게 하시는 일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이에 오늘 잠언은 멋진 표현으로 이를 알린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11).” 경우에 합당하다는 것, 어떤 형편에 놓이게 된 사정에 따른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 ‘주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나! 그리하여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12).” 알맞은 것, 그 이치에 맞는 말과 행동은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잠언은 이를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2).”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영광이 서로 같을 수 있는 것은,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 이처럼 다른 가운데 모두의 것이 하나가 되게 하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이에 우리는 참고 또 인내한다. 그럴 때 오늘 잠언과 같이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15).” 참다보면 ‘부드러운 혀’가 되어 뼈를 꺾는다. 가령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소릴 불가능하다는 말 대신 쓰고는 하는데, 계란 위에 계란이 더해져 퇴적되었을 때 바위에도 균열을 낼 수 있다. 어릴 때 평창 할아버지 집 툇마루에 앉아 빗방울에 우묵하게 패인 처마 밑의 돌덩이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나는 마루 끝 맨들거리는 마루모서리나 우묵하게 패인 돌을 보면 경이로웠다. 그 긴 시간 저 홀로 견뎌왔을 시간을 생각하다보면 하루 해가 금세 기울고는 했다. 그와 같은 오래 참음 그로 인해 만드러졌을, 부드러운 혀로 뼈를 꺾는다니! 모든 게 다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세상에서 말씀은 수천 년을 지나오면서도 꿋꿋하였다. 심지어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그렇게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이에 오늘 말씀을 더하면 “환난 날에 진실하지 못한 자를 의뢰하는 것은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으니라(25:19).” 급한 마음에 뭔들 못할 짓이 있겠나만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소다 위에 식초를 부음 같으니라(20).” 이보다 더 우스운 꼴은 없을 것 같다. 그리하여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28).” 과연 우리가 그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밀한 비밀을 헤아려 아는 길이었다. 그리하여 예배였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65:1).
오늘 시편은 122편, 성전으로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세 번째로 예배를 연상하게 한다. 예배로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 되는 우리 삶이 있다. 당연히 예배는 강요될 수 없고 꾸며질 수 없다. 설교는 창작일 수 없고 말씀은 창의력을 따르지 않는다. 아침마다 내가 느끼며 즐거워하는 이 시간은 그 주도권이 주께 있음을 알게 한다. 어제는 전의 글과 사진을 비공개로 바꾸었고 어느 정도는 버릴까도 생각하였다. 오늘은 오늘의 은혜로 사는 것이다. 이에,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2).
고로 나는 인정한다.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3).
나는 나를 이길 수 없다. 나로 승복을 받으려면 예배로 들어가는 수밖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나는 누구에게 뭐라 하고 어떤 주장하는 일을 멈출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은둔하고 세상을 등진 사람처럼 사는 것 같으나 하나님이 펼치시는 세상이 더 선명하다. 이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이는,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4).
어떤 만족,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이 놀라운 그러면서도 은밀하였던,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즐거움이 예배였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5).
아는 사람은 아는,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 7:19).” 조심스럽지만 확실하게 누리게 하시는 나의 삶에서의 주의 은총은,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10).
주가 하신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121:5-6).
이를 누리며 산다는 일,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사 49:10).” 여기서 나는 가만히 또 묵묵히, 무던하게 할 일을 감당하는 것일 뿐,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12).
그리하여,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