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가 없으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잠언 29:18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시편 69:30-32
이 순간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을 종종한다. 그런 마음으로 말씀 앞에 나아오곤 한다. 어떤 암시, 감추어진 이야기에 주의한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언제 그런 일이 있을지 우린 알지 못한다. 결국 내 곁에 보일 것인데,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시 69:30-32).
하는 오늘의 시편에서 멈추게 된다. 나로 하나님을 찾는 곤고한 자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면. 오늘을 살며 동시대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2).” 그것이 곧 우리 삶에 여파를 주기 때문이다. ‘그 성읍을 위해’ 기도하는 것,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7).” 곧 이 시대의 평안함이 우리로 평안하게 하는 것과 같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2-4).”
그러므로 세상과 짝하여 살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다. 천국을 향해 순례의 길을 가는 우리로서는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다시 돌아가면 이 순간을 귀히 여기고 두려워할 수 있는 게 복이다. 그게 아닐 때 얼마나 우린 자주 원망의 수렁에 빠져들곤 하는지.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
(78:40-41).
곧 저들의 광야 40년 세월이 오늘 우리 인생의 절반은 차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니면 그 이상을 광야에서 불순종하다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그렇게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사 63:10).” 하나님을 등질 때 모진 삶은 고스란히 내 앞에 놓인다. 사는 게 다들 사느라 고단하기만 한데 늙는 것도 일이어서 하루하루를 견디는 게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노모를 수발드느라 아내가 몸살이 났다. 그렇다고 누굴 탓할까. 주어진 시간이고 견뎌야 할 몫이다. 그 가운데서 찬송이 혹은 불평이 나올 수 있는 일인데,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앞서 묵상하는 설교 다음 본문이 <섬김>이었다. 즉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시편 120편은 회개로 출발하여 121편 오늘 우린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신뢰-믿음’을 다루고, 시편 122편 날마다 매순간이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예배’로 이어지고 네 번째 노래 123편에서 ‘섬김’을 묵상하였다. 섬김이란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이다. 시인은 간구하고 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123:1-2).
장모와 함께 지내면서 좋은 점은 내가 늘 교회에 나와 있다는 것이다. 토요일이든지 공휴일이든지 종일 교회 안을 서성이고 그 안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누구와 통화를 하고 어떤 사연을 듣고 주의 이름을 부르고 하는 모든 일들이 일상이다. 그러할 때 나의 마음도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된다. 곧 주를 앙망함을 익힌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63:1).
주의 은혜를 바라는 것, 여러 현실을 듣거나 보면서 나는 홀로 보호하심을 받고 있다는 생각. 누가 어떤 일로 씨름하다 힘에 겨워 말을 늘어놓을 때 나는 저의 사연을 들으며 주의 이름을 되뇌기도 한다. 이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광야와 같은 세상을 지나는 동안 어떤 일이 언제 어떻게 내 삶을 쥐고 흔들지 모르는 일이고 보면, 이 순간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은 감사를 더하고 주의 은혜를 구하게 한다.
주가 내게 두신 날이며 직분인 것을 오늘 잠언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14).” 맡은 일에 대하여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왕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렘 22:4).” 나는 그리 나의 한 날을 생각한다. 이는 내 책임이 아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어떠하든지 ‘먼저’를 바로 붙들면 나머지는 주가 하신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
(37:34).
그러므로 한 순간, 이 매순간을 언제든 끝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주할 때면 새로울 때도 있다. 모든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서로의 만남도 유효기한이 있다. 서로가 영원할 것이라 여기는 일은 착각일 뿐이고, 그러할 때 오늘 잠언의 말씀은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18).” 우린 매순간 그 너머 숨겨진 시간을 향해 간다. 아침에 잘 나갔다가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일이나 순간 어디를 다치거나 잃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누가 저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있을까? 이는 모두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네 몫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렘 13:25).”
만일 우리가 앞날을 안다면 이보다 불행한 일도 없다. 모르기 때문에도 주를 바란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 12:17).” 곧 오늘 잠언의 말씀과 같이 ‘묵시가 없으면 우린 방자하다.’ 주가 열어 보이시는 것으로 사는 삶, 그리하여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신 6:25).” 하여 하나님만 바라게 하시려고,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69:1-2).
불현듯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우린 앞서 예측을 하고 대책을 세워 자신의 생각으로 이겨낼 것이라 여기지만,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6).” 이것이 지혜였다. 오늘을 감사히 시작하고 이 순간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된다. 가령 오늘은 어디가 아프다. 혹은 괜찮다. 아픈 날은 아픔을 달래며 또는 괜찮은 날은 감사함으로,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 이와 같은 마음으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누구도 개의치 않고 어떤 일에 휘둘리지 않으며,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3).
주를 바란다는 일, 기도는 인내의 다른 이름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눅 18:1).” 성경은 모든 이야기를 집중시킨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그러할 때 나는 지혜자의 권고를 듣는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그런 날에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9).” 그러므로 주 앞에 서서,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5).
주 앞에 나를 내어드리는 일,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6).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알 수 없으나 두려운 마음으로,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13).
곧 이 순간을 생의 마지막으로 여기며 사는 것은 언제고 이 순간이 또한 영원한 시간의 처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난 무얼 생각하고 있었을까? 어떤 일을 하다, 또는 무엇에 마음을 기울이다 고개를 들게 된 것일까? 하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고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16).
곧,
내 영혼에게 가까이하사 구원하시며
내 원수로 말미암아 나를 속량하소서
(18).
어쩌면 우리의 기도는 이뿐이었다. 그러할 때,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그때에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33-3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