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전봉석 2023. 5. 11. 06:52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예레미야 7:23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시편 7:17



구원을 호소하고 심판을 청원하며 공의가 실현된 것을 확신하며 주 앞에 고한다. 이에 성전에 서서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2).” 알아듣거나 받아들이거나 전하는 자는 그것으로 소임을 다한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3).”


우리가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이고 생활이  되어야 하는 데는 그 차이가 크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실 때에 이에 호응하고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이 변화이다. 이것이 어려워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마 15:8-10).” 예수님은 이르셨다. 우리는 어떤 형식에 따라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종교인이 아니다. 바울은 이에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전 7:19).” 어떤 형식 그 규율에 따른 것보다 말씀을 지켜 삶으로 사는 일이 귀하였다.

친구와 동생이 새벽 일찍 저수지로 왔고 모처럼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서로는 간단한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말이 없었다. 한 곳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 나는 종종 낚시에서 신앙의 자세를 점검하기도 한다. 점심 때 친구가 식사기도를 부탁했다. 친구의 그런 변화에 놀라워 나는 기꺼이 주 앞에 고하고 우리의 소원을 주가 아심으로 감사하였다. 날마다 진통제를 먹으며 몸의 통증을 달래는 친구의 일상이나 어중간한 처지에 놓인 동생의 입장이 마음을 울렸다. 서로 말은 하지 않지만 위하여 기도하기는 같았다. 더욱이 친구의 이런저런 신앙적인 변화된 삶이 신기하였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주를 믿는다는 것은 스며들듯 말씀을 따라 사는 일이다.

오늘 본문 4절도,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하심을 듣고 생각이 많아진다. 어떤 형식, 종교적인 위선을 경계하신다. 이어서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5-7).” 곧 우리가 말씀으로 가까이 하는 삶과 그 변화는 비례한다. 성경공부는 잘 하고 있니? 하고 물었더니 친구는 성경도 새로 샀다고 하였다.

가만히 찌를 응시하며 저와 내가 이런 대화를 나누고 같은 것을 바라는 것에 웃음이 지어졌다. 우리로 신앙을 가지고 살게 하심은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눅 6:48-49).” 곧 우리의 행함으로 서로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식사기도 해주세요, 목사님이. 하고 친구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오전 내내 잔잔하고 고요하여 물가에 앉아 있는 맛이 났다. 저만치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쳐가고 그 사이사이에서 새들이 요란하였다. 나는 가끔씩 시선을 놓쳤고 멀리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였다. 상대적으로 동생의 표정이 어둡고 시큰둥하여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런저런 지금의 상황이 마음 아팠지만 주의 훈련은 때론 가혹하였다. 부디 잘 견디고 잘 이겨내며 주께 더욱 자신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점심을 먹고는 낚시를 흥미를 잃고 나는 차 문을 다 열고 누워 바람이 오가는 선선함에 노곤하기도 하였다. 어디가 아프고, 무슨 어려움이 마음을 어둡게 한다 해도,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128:1-2).

나는 시편의 세계를 살고 싶다. 어떤 상황으로든지 주 앞에 아뢰고 주만 바라는 것, 오늘 시편도 같은 찬송이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7:17).

그러할 수 있는 것이 복이었다. 진통제를 달고 살고 몸의 어려움을 어르고 달래며 지내지만, 가진 것도 없고 앞날의 어떤 보장도 없다 해도,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사는 일. 우리 성도의 삶이란 그와 같이 신기하고 놀랍고 조용하면서도 요란한 삶이 아닐까? 한데 오늘 본문에서도 지적하듯이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8).” 당장의 어떤 일을 모면하기 위하여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려 들지는 않는지? 우리의 가증함이란,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사 66:3-4).”

생의 어려움은 스스로가 그리 선택하는 경우다. 그리하고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그러니 믿음의 사람은,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2).” 이는 참으로 귀한 복이어서 숱한 경우 원망으로 말씀을 듣지 못한다.

그들의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106:25).

그 생활은 어떠한가? 오늘 본문에 한 단면이 진술되어 있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9-10).” 설령 그 모습은 거룩한듯하나 그 실상은 주를 만홀히 여김이었다.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보라(12).” 하나님은 그 실체를 방관하지 않으신다. 곧 “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대답하기를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서 그를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왕상 9:8-9).” 하나님을 저버리고 사는 삶은 그리 거창한 게 아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이를 잊고 살 때, 내 것이라 여길 때 그 삶은 어그러져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나를 격노하게 함이냐 자기 얼굴에 부끄러움을 자취함이 아니냐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나의 진노와 분노를 이 곳과 사람과 짐승과 들나무와 땅의 소산에 부으리니 불 같이 살라지고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렘 7:19-20).”

일련의 어떤 어려움이 우리로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주를 바라게 한다. 잘못된 신앙 자세를 바로 하게 한다. 시련이 주는 교훈이다.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23).” 문제는 듣지 않는다. 꺼려하고 자기 뜻이나 생각을 앞세운다. 그런 대화를 하다 친구가 물었을 때,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린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으로 그 기준을 정해야 한다. 때론 그게 어렵다 해도 그래서 한 발 더 가까이 주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그러하지 않던가?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20-22).”

주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은 형식적으로 그 자리를 지키기만 하는 게 아니다. 그 안에서 감사를 잃으면 집 나간 둘째나 집에 있었으나 밖에 있었던 것과 다를 게 없는 아들이나…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그러자 아버지는 저를 붙들며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31-32).” 하여 저는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가 기쁨으로 이를 받았을까?

오늘 본문이 이르는 가증함에 대하여, 우리의 형식적인 신앙과 종교적인 경건에 대하여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조상들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렘 7:26).” 이를 주가 노하심이다. 하여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민족이라 진실이 없어져 너희 입에서 끊어졌다 할지니라(28).” 이 두려운 상태를 직면하여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하여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날이 이르면 이 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말하지 아니하고 죽임의 골짜기라 말하리니 이는 도벳에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했기 때문이니라(31, 32).” 오늘 우리 생활에도 설마 ‘도벳에 자리’가 넘쳐나는 것은 아닐까?

믿는다고 하면서 그 믿음을 지키지 못할 때 믿음 없음보다 더한 생활이 엄습하기 마련이다. 결국 오늘의 이와 같은 말씀도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우리로 성경의 사람들을 보며,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와 엄중한 심판을 보고, 주의 긍휼하심 앞에 엎드리게 하신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7:1).

사는 게 참 고단하다. 다들 이런저런 사연을 가슴에 두고 수면 위의 찌를 응시하였고 그러는 동안 나는 수십 번도 더 주의 이름을 되뇌다 온 것 같다.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8).

주 앞에 아뢸 수 있는 한 가지, 내 얼마나 주를 바라고 사모하는지를.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렘 20:7).” 설령 그렇다 해도 ‘세상이 나를 속이고 노엽게 한다 해도’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이에,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10).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것은,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눅 1:74-75).”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