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예레미야 8:7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4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하지 않으면 더 큰 슬픔을 당한다. 진정한 애도는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이 과장되고 혼용되면서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사 22:13).” 억지 위로, 일시적인 평안은 도리어 독이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하고 성경은 부르신다. 우리 하나님,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하고 오늘도 우릴 이끄신다(욜 2:12-14).
오늘 성경의 심정은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렘 8:7).” 하고 한탄하신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5).” 우리의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위로나 격려가 오히려 울어야 할 때를 놓친다. 그리하여 악은 악을 부르고 더는 자비를 남기지 않게 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의 지도자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주민의 뼈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그 뼈가 거두이거나 묻히지 못하여 지면에서 분토 같을 것이며(렘 8:1-2).” 오늘 말씀이 끔찍하고 허무하다.
분명히 말씀하시길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48:22).” 그저 인위적이고 억지스러운 위로와 평강만이 있을 뿐이다. 하여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59:8).” 그러니 우리의 가는 길이 참혹하기만 하다. 무자비하고 혹독하고 처절하며 더는 극단의 고통이 없을 것 같은 지점에까지 이르러야 알 수 있을까? 그러기 전에 우리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충분하였다.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렘 8:5).” 하면 더는 희망이 없는 것이다.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욥 6:29).” 이와 같은 말씀에 응해야 한다. 하여,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시 119:37).
이와 같은 기도가 필요하다. 그러할 때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사 30:15).” 하고 이르실 때에 들어야 한다. 자신을 돌아보아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때마다 미루고 또는 어쩔 수 없었다는 상황이나 변명이 오늘의 절망을 구제하지는 않는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32:5).
이 놀라운 은총은 모두가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인 됨을 통회할 수 있는 것은 은혜였다. 어릴 때 교회 수련회에서나 부흥회 때 하염없이 울며 내가 죄인인 것을 자복하며 통회한 기억들이 있다. 그땐 그게 어찌 그러하였는지 알지 못했다.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어떤 말씀 때문이었는지, 나의 여린 감정 때문이었는지… 그러고는 또 다시 그와 같은 짓을 반복할 때면 아무도 모르게 부끄러워하기도 했었다. 이제 와 그 모든 게 주의 은혜였음을, 주가 베푸시는 자비요 긍휼하심이었음을 알았고 확신한다. 나의 특별했던 시간들이 수차례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어찌 주를 멀리하고 살았을까,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어제 저녁예배를 드리는데 장모의 대표 기도에서 지난날 모르고 지었던 죄, 우상을 숭배하고 살았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는 부분에서 내 안에 감사가 일었다. 그런 여운 때문이었는지, 예배를 마치면서 장모는 누가 어느 절에 모셔졌는데… 하며 또 지난날을 회상하며 했던 말을 되풀이하였다. 온통 저의 기억 속의 날들이 그러하여서 안타까웠다. 나는 남은 날을 굳건하게 하고 주가 주실 소망의 나라를 사모하시라, 하고 일렀다. 한 번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되면 천지분간 없이 온 기억을 다 뒤적이는 바람에 아내가 슬그머니 말을 돌리면서 나의 팔을 이끌었다.
노인으로 산다는 일은 무엇을 회상하며 사는 일인가보다. 더듬어 주를 바랄 수 있는 단서나 은혜의 기억이 빈약할 때 그저 좋았던 시절, 그것이 주를 멀리하고 주가 싫어하시는 일이었음에도 그리워한다. 하여 나는 자주 언급하며 권면하기를 말씀을 묵상하고 주의 일을 회상할 수 있는 사연을 많이 가진 자가 복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어린 시절은 늘 교회 안에 있었고 때로는 말로 어찌 형용할 수 없는 은혜의 시간들이 수도 없이 많아 감사하다. 그땐 그 시절이 고생스러웠고 원망스럽기까지 했는데 그리하여 주를 바라며 주께만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의 복이 아닐 수 없다. 우린 늘 말씀으로 이를 점검해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저들의 소행으로 알 수 있다. 죄를 뉘우치고 주를 바라기는커녕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6).” 이는 마치 악에 취해 일부러 더 그러는 것처럼 “…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7).” 하다못해 새들도 그 찾아갈 곳을 아는데 말이다. 결국 골짜기 속에 있는 우리의 길,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발이 빠른 암낙타가 그의 길을 어지러이 달리는 것과 같았으며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것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 발정기에 만나리라(2:23-24).”
놀라울 것도 없다. “소리가 헐벗은 산 위에서 들리니 곧 이스라엘 자손이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이라 그들이 그들의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이로다(3:21).” 그러니 오늘 우리의 삶도 그와 같아서 같은 허물과 실수를 되풀이 한다. 전날에 같이 있을 때는 ‘목사님이 식사기도 해주시죠.’ 하고 주를 바라더니 돌아가 저녁으로 고량주를 한 병 마셨단다. 어제 오후께 전화 와서 어디가 아프다느니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자 뭐라 좀 하였다. 여전히 그래도 되는 것처럼 혼합하여 사는 삶이라 되레 더 망측하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참 더디고 먼 길인 것 같다. 그래왔던 시절이 켜켜이 눌어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장모를 보면서도 늘 ‘그때의 일’을 회상하는 것이나 친구를 보면 한 손에는 주를 바라는 마음과 다른 한 손에는 여전히 세상의 연락을 즐기려는 마음이 같이 들렸다. 그 생이 고달픈 까닭은 어느 것도 놓을 수가 없어서이다. 오늘의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하지 않은지?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9).” 본문이 일깨우는 바는 내 이야기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다. 그래서도 시편의 기도는 귀하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25:4-5).
말씀으로밖에 답이 없다. 기도로 자신을 주 앞에 바로 세우는 일밖에 별 수 없다. 하나님 없이 살 거 아닌 다음에는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 6:22-23).” 이를 들으려 하지 않고 보려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하여 시편으로 산다는 일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111:10).
우리로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그 길을 제시한다. 우린 이를 살 수 있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3-15).” 이 놀라운 은혜의 대상자가 우리 자신인 것을.
한데 저들은 어찌 이 놀라운 은혜를 차버린 것일까?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았으랴 모일지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멸망하자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멸하시며 우리에게 독한 물을 마시게 하심이니라(13-14).”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더는 바라지 않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침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뿐이로다(15).” 그저 비탄 가운데 자신을 놓아두는 격이다.
그들이 그 기쁨의 땅을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그들의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106:24-25).
별 수 없다. 속된 말로 그리 살다 죽는 것일 뿐. 그러니 사는 게 지옥이라. 우울한 영혼으로 술로 그 마음을 달랠 뿐이다. 나는 친구에게 저의 영향력으로 형을 구원해야 한다고 일렀다. 가정의학과 의사로 주 앞에 귀한 이인데 저는 항상 술에 절어 산다. 스스로도 중독인 것을 안다. 알면서도 다시 술을 찾는다. <어린왕자>의 어느 혹성에서 만난 술주정뱅이처럼 술이 깨면 부끄러워서 다시 취한다. 또한 신기한 것은 안 믿는 자로 인하여 믿는 자가 그리로 빨려간다는 것이다. 어느 집사는 나이가 들면서 안 믿는 아내에게 의존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부인의 판단은 모든 기준이 다 세상적이다.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
어떤 악의 고리 같다. 우리 의지로는 끊어낼 수가 없다. 알기는 알겠는데 싫지는 않다. 그러니 그 자리에 가면 저절로 꼬리를 내리는 꼴이다. 아,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렘 8:18).” 절망의 소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나온다. 그러니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20).” 이 노릇을 어쩌면 좋을까?
나는 종종 안타까운데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주님, 하고 부르다 눈물만 핑, 돈다. ‘억장이 무너지는 사랑이야기’다.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사는 데는 자기 영혼을 저당 잡힐 뿐이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 3:15, 19).” 들려도 듣지 못하고 느껴도 깨우치지 못하는 영혼에 대하여는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요 5:14).”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있다면 아직은 가망이 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8:1).
주의 이름이 아니고는 답이 없다. 누구의 객쩍은 소리에 귀 기울일 때가 아니다.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사 44:23).” 우린 결국 인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하여,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3-4).
보잘것없는 우리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고,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5).
이 놀라운, 참으로 신기하고 기이한 사랑을 앎으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그러므로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 이를 알고 믿음으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