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9:24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시편 9:19-20
우린 우리가 수고하지 않은 것으로 혜택을 얻는다. 그러다 이를 잃으면 원망한다. 요나에게 이르신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 4:10-11).” 이는 하나님이 모든 생명을 대하심에 있어, 더욱이 사람을 위하여는 주를 알고 의지하는 사람 하나로 한 나라를 위하심이다. 예수님은 이를 비유로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마 18:12).” 이 사회가 어떤 지경이라 해도 단 한 사람 ‘잃어버린 양’을 찾기까지는 놓아두심이다.
우리가 악한 세상을 운운하기에 앞서 어떤 자인지, 선을 바라고 의를 추구하며 살고 있는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이는 우리 교회의 기본 메시지이다. 오늘 말씀 2절,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가리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하나님이 떠나가심은 단 하나의 이유였다. 우린 홀로 고립된다 해도 악으로부터 떨어져야 한다.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왕따가 되는 사람들이다.
궁극적으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4-15).” 우리는 숨을 수 없고 숨김을 당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하여 우리의 사명이기도 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주어진 숙명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묵묵히 드러나지 않는 듯 하나 우리 한 사람으로 우리 가정이 또는 우리 마을이 산다. 하여 우린 거짓을 꾸며 사람들 사이에 섞여 친절한 타인으로 사는 사람들일 수 없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활을 당김 같이 그들의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못하느니라(렘 9:3).” 오늘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원리는 거짓에 의한 게 아닐까? 장사하는 이는 손해 보는 장사를 한다거나 늙은이는 죽어야지,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실상은 그럴 수 없다. 서로의 ‘하얀 거짓말’이 그 관계를 원활하게 한다. 적당히 둘러대거나 침묵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중학교 땐가 어느 선생이 한 말이 늘 마음에 남았다. 친구란 남 앞에서 편들어 주고 둘이 있을 땐 꾸짖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때 이 말이 우스울 정도로 이상하고 가벼웠다. 그 당연할 것 같은 것을 마치 대단한 것처럼 가르치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남을 대하는 일보다 가족을 대하는 일과 친구를 대하는 일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알았다. 바른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어진다는 게 나이가 들었다는 소리다. 하긴 누구라도 듣기 싫어하는 것도 맞다. 그래서 시편은 한탄스럽게 외치는 것 같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시 120:2-4).
오늘 본문도 이를 서두로 “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완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라(4).”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다. 서로가 가까우나 믿을 만한 사이는 어렵고, 뒤로 호박씨 까는 소리는 예사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내어도 패역한 혀는 베임을 당할 것이니라(잠 10:31).” 바른 말을 해주는 사람을 귀히 두지 못함으로 아첨하고 거짓으로 꾸며 말거나 빈말을 일삼는 자들과 편히 지낸다.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지치거늘 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5-6).” 이 말씀이 수천 년 전의 이야기인 것 같으나 오늘 우리의 일이기도 하다. 하여,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5:6).
목사가 되고 누구의 사연의 듣다 바른 말을 해주어야 할 때도 나는 자주 침묵한다. 혹은 헛된 위로로 대신한다. 저의 근본적인 죄를 말해주지 못한다. 그저 들어주길 원하고 자기 말에 호응하길 바라지 행여 조금이라도 바른 말을 하려 하면 서로의 관계는 어려워진다. 같은 신학 동기들과도 그렇고 심지어는 형제와도 그렇다. 하물며 자기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그건 죄다, 하고 말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아무렇지 않게 세상 문화에 젖어있고 저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대하여 ‘그건 아니야!’ 하고 말해주기가 그렇게 어렵다. 행여 그런 뜻이라도 비추면 서로의 관계는 소원해지기 일쑤다. 그러니 주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는 일은 예사로운 게 되었다. 그저 쏟아내려 하지 정작 들아 담으려는 사람이 없다.
설교는 에둘러 남 얘기하듯 하게 되고 행여 자신을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리면 금세 등을 돌리기 일쑤다. 그렇게 여러 명의 아이를 잃기도 했다. 각오를 하고 말해주어야 하는 사이가 괴롭다. 그런 가운데서도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잠 10:16).” 그저 주 앞에 아뢰는 길밖에. 누구 이름을 자주 언급하게 되면 저의 일은 고스란히 나의 몫이 되어 괴롭힌다. 그러니 무의식적으로도 피하게 되고, 불편한 친밀함보다 가벼운 친절함을 택한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73:28).
무던함이란 그런 것이어서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애 3:25).” 이는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처럼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이를 신앙적으로 다시 보면 그러는 동안 우리는 수도 없이 주의 이름을 부르고 또 저에 대해 고한다. 그러할 때,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한참 때 자주 암송하고 읊조리던 저의 시가 오늘에서는 나의 신앙의 자세를 곧추세우게 하는 것 같다. 다만 나의 무던한 기도가 누구에게 가 닿을 때까지, 설령 나는 그것을 확인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해도 나의 기다림의 자세 곧 기도의 시간들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내가 산들을 위하여 울며 부르짖으며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불에 탔으므로 지나는 자가 없으며 거기서 가축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며 공중의 새도 짐승도 다 도망하여 없어졌음이라(렘 9:10).” 오늘 우리의 영혼이 황량하다 해도,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18).” 어느 때보다 깨어 기도하며 회개하고 돌이켜 주의 이름을 불러야하는 시절이다. “부녀들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 귀에 그 입의 말씀을 받으라 너희 딸들에게 애곡하게 하고 각기 이웃에게 슬픈 노래를 가르치라(20).” 그러할 때에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4).”
말씀 앞에서 말씀이 그립다. 마치 연애하는 사람 앞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싶은 마음 같다. 그리하여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애 3:25).” 아, 그러할 수 있는 것이 복이겠구나.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하여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 3:10-11).” 성경은 과감하기를 우리가 주 앞에 담대히 나감과 같이 하라 하신다. 이는 은혜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하여,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9:1-3).
내 곁을 에워싸고 있는 죄악에 대하여,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서로 그러할 수 있는 사이가 복된 관계였고, 이를 두고 위하여 기도제목을 나누고 함께 서로를 마음에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 때가 복이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한 영혼에게 그러할 수 있다면 이는 천하를 상대하는 일보다 가치 있었다. 친절한 타인 수십만 명보다 단 한 영혼을 위하여,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7-8).
오늘 시편도 정직한 세계를 일깨운다. 할 때,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신 8:10).” 곧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 늘 주 앞에 서고 주신 한 날에 충실하며 주를 바람으로 ‘저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0).
이 당연하고 명료한 진리 앞에서,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13, 19).
이는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풀을 먹을 것이요 유리하는 자들이 부자의 버려진 밭에서 먹으리라(사 5:16-17).” 살면서 누구를 사랑하는 일이 이제는 주의 이름으로가 아니면, 주의 권능으로가 아니면 모든 게 허사였음을 알았다. 내가 누구를 생각함이 주께 아뢰어 그 한 영혼을 위하여 애통하는 자로 심령이 가난하여 주를 바람으로였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