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예레미야 10:23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시편 10:14
스스로 만든 우상을 두려워하며 산다. 기억은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한다. 이로써 자신이 만든 자신에 갇혀 살면서 자신들만의 우상으로 섬긴다. 이를 메고 다니고 지어 나른다. 이때 예리미야는 하나님의 권능을 알게 함으로 모든 것은 비교할 수 없다고 한다. “여호와여 주와 같은 이 없나이다 주는 크시니 주의 이름이 그 권능으로 말미암아 크시니이다(6).”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알게 한다. 우상은 인위적이고 허구적이며 무력하고 유한하다. 오늘 본문에서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고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 이방 사람들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2).”
한데 우린 문화라는 이름으로 이런저런 것을 받아들인다. 그것들이 덜미를 잡고 우릴 쥐고 흔든다. ‘길’은 생활의 규범으로 믿음으로 사는 ‘길’에서 행위에 따른 결정을 좌고우면하게 된다. 교회를 이루어가는 데 있어서도, 그 신앙을 지키는 데서도 이 길 저 길을 기웃거리듯 수평이동이 심하다. 안 믿는 자들은 점점 그 마음이 완고하고 확고하여서 하나님을 모른다 하고, 믿는다는 자들이 서로 주고받고 빼앗듯이 이 교회 저 교회로 떠돌게 한다.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 하실 때에 배운다는 것은 따른다는 것이고 따른다는 것은 추종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하늘의 징조를 살피고 생사화복(生死禍福)을 기운이나 팔자로 돌린다. 이를 두려워하거나 마음에 두고 운명론자로 사는 자들도 흔하다. 하긴 이 땅의 모든 결과가 조건적이며 결정적이다. 이에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8:3-4).” 너무 저들과 밀착하여 살면 저들의 문화나 이치가 우리의 가치관을 해친다. 신앙이 흩어지고 믿음은 흔들린다. 이에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듣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알리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은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사 44:8).”
성경의 이와 같은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들 말과 생활에 흡수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잘 믿고 바르게 자라건 것도 언제 그랬냐는 듯 혼합되어 흔들리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젊은 세대들이라 그렇다지만 조카아이들이 춤이나 악기를 전공하는 데 있어 나는 우려하는 마음도 크다. 이를 가르치고 배우는 곳에 세상 깊숙한 곳이다. ‘그런 문화’는 다채롭다. 가령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목사가 되어 주의 길을 가겠다는 마음이 살아 있었는데 예대 문예창작을 시작하면서 확 풀어진 셈이다. 그 세계는 별천지였다. 모든 게 다 허용되는 줄 알았고 이를 추구하는 것이 예술이라 여겼다. 앞서간 거장들의 문란한 생활마저 낭만적으로 여겨졌고 거기에서 창작이 솟구친다고 여겼다. 한때 자유연애의 바람을 넣은 것도 그 세계다.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 하심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곧 우리 안에는 근본적으로 죄가 들어오면서 하나님과 단절된 후 두려움이 있다. 이를 희화할 수 있는 게 더욱 주를 가까이하거나 더욱 주를 멀리하면 된다. 한 예로 ‘라멕’을 생각하게 된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창 4:23).” 저는 자신이 저지른 것에 거리낌이 없다. 두려움도 없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24).” 스스로 그런 데 용감해진다. 죄를 죄로 여기는 능력을 상실한다.
나 역시 이와 유사한 경험을 했다. 마치 하나님 앞에서 보란 듯 헛짓들을 추구했고 그리 행하며 시를 쓰고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을 가까이 하였다. 이방나라의 다채로운 신비음악을 좋아했고, 저들 문화원을 찾아다니기도 하였다. 황지우의 ‘게 눈 속의 연꽃’을 보기위해 장흥에 있는 보광사 벽화를 살피기도 했었다. 저들을 지키는 다채로운 신전의 해괴한 형상을 예술적으로 감상하였고 기이하고 일그러진 얼굴에 매료되기도 했었다. 그렇게 문화원에 갈 때면 기이한 사연을 담은 형상이나 부적 같은 물체를 수집하기도 했었다. 돌아보면 겁 없이 형편없던 시절이다. 그때에도 하나님이 나를 곁에서 함께 지키시고 보호하셨다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여러 나라의 풍습은 헛된 것이니 삼림에서 벤 나무요 기술공의 두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3).” 오늘 본문이 일축한다.
하여 나는 이를 가까이 하며 이를 신앙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데 회의적이다. 믿음 안에서 자랐으니까, 하는 소리가 이미 물을 탄 소리다. 한 번 믿음이 영원한 믿음은 아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말씀의 의미를 오래 묵상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의 믿음은 그리 신뢰할 수 없다. 믿는다고 하면서 가장 헛짓거리를 하였던 민족이 히브리인들이다. 저들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민족이 있었던가?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사 44:15).”
우린 결국 바람에 선 촛불 같다. 주의 인자와 보호하심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이를 꺼뜨리지 않을 수 없다.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행 14:15).” 보면 교회 집사가 또는 목사가 더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
(시 86:8).
어제는 오래된 친구가 모처럼 전화를 했다. 그 부모의 믿음의 칠남매 모두 주 앞에 붙들린 가족이다. 목사가 둘이나 있고 장로가 셋이다. 막내인 나의 친구는 여전히 사는 일에 말의 전부를 썼다. 그저 여느 수다와 다를 게 없이 오가는 말은 끊고 나면 싱겁다.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서 무슨 사업의 기획을 총괄하고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사는 데 전전긍긍한다. 목사가 되고 저와 먼저 소원해진 것은 이제 알겠다. 어제도 서로의 관점이 다르고 받아들이는 게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일상의 일에서도 믿는 자로서의 품위나 언어는 없었다. 나는 저에게 어떤 말을 하려 해도 저의 화두는 다른 데 있다.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나 그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일 뿐이요 나무와 돌이라 그러므로 멸망을 당하였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니라(사 37:19-20).”
일상적인 데서 무너지면 더는 어디서 주를 바랄까? 다들 그러고 사는 거지! 하고 말면 그야말로 더는 할 말이 없어진다. 우리는 다들 그러고 사는 일에 관심을 두고 그들처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닌 것을. 이제와 그때를 돌아보니 그때는 이런 생각이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뭐라 한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이와 같은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없는 생활구역이 있다.
이에 오늘 본문 10절,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이방이 능히 당하지 못하느니라.” 이를 알기까지 우린 어쩌면 기적이 아니면 마주할 수 없다. “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삼하 7:22).” 나는 이제 이를 알고 저가 두려워하는 일을 나는 사사로이 여기고 내가 중히 말하는 것을 저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통화가 끝나고 마음이 허하였다. 예전 같으면 벌써 저가 내려가 있는 통영에를 몇 번은 달려갔을 것이고, 어제도 내려오기만 하면 뭐가 어떻고 하며 이런저런 해주겠다는 말이 메아리처럼 아련하였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 하나, 왜 하나님이 나를 나다니지 못하게 묶어두셨는지 알겠다. 그 은혜가 귀하게 여겨졌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93:1).
그러므로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오늘의 우리 염려가 부질없다. 오늘 15-16절, “그것들은 헛 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나 야곱의 분깃은 이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의 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 이것이 이제 나에게 해당된다는 사실 앞에 안도한다. 이처럼 나에게 들리는 것을 저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나에게 보이는 것을 저들로 들을 수 있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자들이 아직도 ‘거기’에 많이 있다. 종종 나의 그리움은 이를 일깨우며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16:5).
저들은 이를 언제쯤 알게 될 수 있을까? 어제도 통화하는 내내 내가 어찌 이를 알게 할까 조바심을 내다 통화가 그쳤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애 3:24).” 더욱이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119:73).
우리가 사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볼 때에도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상대적으로 오늘의 나는 얼마나 은혜를 받은 자인가?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5, 16).”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렘 10:19).”
오늘을 살면서 겪는 어려움이 나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이 놀랍다. 저의 이런저런 어려움의 호소가 부디 주를 알게 하기를, 주가 살아계시고 지금도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심을.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하여,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32:4-5).
이 놀라운 은혜로,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10:12, 14).
나는 이제 확신한다. 고로 기도한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17-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