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전봉석 2023. 5. 15. 05:30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예레미야 11:8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시편 11:7

 

 

 

언약은 이를 준수하는 데 있다.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것,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4).” 하심인데, 이를 증명하는 것이 ‘오늘’이라. “내가 또 너희 조상들에게 한 맹세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인데 ‘오늘’이 그것을 증언하느니라 하라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5).” 곧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고 나는 이를 증명해야 한다. 곧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에 모든 명령을 ‘오늘’ 행하는 것이다.

 

이를 이행하지 않을 때 언약은 규정대로 우리를 치리하신다. 오늘 말씀에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신 데 따른 증거가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에 이루어져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하심이 말씀의 핵심이다. 우리 삶의 변화 또는 개혁은 새로운 뭔가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그 말씀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이를 촉구한다.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말하라(2).” 이 언약은 하나님이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맺으신 언약이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요시야가 성전을 보수하다 발견한 책으로 예레미야를 중심으로 유다의 신앙을 개혁하는 데 집중하게 하였다. 요시야는 유다의 16대 왕으로 므낫세의 손자요, 아몬의 아들이다. 므낫세는 극악하였고 55년을 통치하였다. 므낫세의 시대는 유다가 가장 타락하였던 시절이다. 단편적으로 므낫세는 ‘히스기야의 기도’로 얻은 15년의 생명 연장에서 얻은 아들이었다. 저로 인하여 성전은 우상숭배의 소굴이 되었고 유다는 우상의 땅이 되었다. 그 상태로 아몬을 거쳐 요시야가 왕이 되어 성전을 보수하기까지… 저는 여덟 살에 왕이 되었고 열여섯에 하나님을 찾았으며 스물여섯에 우상숭배로 더럽혀진 성전을 보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이 언약의 말씀을 찾았고, 이를 기반으로 종교개혁과 신앙개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부흥’은 다시 일으킨다는 데 있다.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유다 성읍들로 두루 다니며 백성들을 가르쳤더라(대하 17:9).” 나는 이를 바탕으로 삼는다. 말씀을 바로 읽고 묵상하고 성령이 더하시는 이해와 뉘우침으로 전하여 가르친다. 예배를 마치고 한 아이가 왔다. 예배시간에 와서 같이 예배를 드리자고 해도 부득불 ‘일요일의 휴식’을 포기할 수 없어 오후 한 시가 되어 왔다. 이런저런 일상적인 이야기가 오갔고, 인턴을 마치고 이제 정규직 직원이 된지 두 달이 되었다고 했다. 이마의 여드름은 사라지고 어엿한 숙녀가 된 것에 놀랐다. 아내와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만난 아이고 나와는 대학을 준비하면서 실전 논술을 준비하느라 몇 개월을 같이 하였다.

 

대화 틈틈이 예배를 권하고 말씀을 전하였으나 두 시간 가까이 왕복 네 시간이 걸려 출퇴근을 하는 터라, 토요일은 놀고 일요일은 늘어져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하긴 ‘정상적인 의식’이라면 요즘 같은 시절에 누가 교회를 자발적으로 나오고 말씀을 순순히 받아 믿음을 가질 수 있겠나? 안 믿는 게 합리적이고 못 오는 게 현실적으로 합당하였다. 집이 지척이라 오면 올 것도 같은데, 더는 어쩔 수 없는 지점에서 나는 애태우듯 마음이 어려웠다. 성정체성의 문제와 여전히 아이 적의 일을 취미로, 유일한 즐거움으로 가지고 있는 성인아이를 두고 나는 종종 혼자 생각이 많았다. 아내와 둘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는 저를 유심히 관찰하였다. 전형적인 유한가정의 평범한 아이에서 성인이 된 경우였다. 딱히 그 마음에 어려움을 두기 싫어하였다. ‘골치 아픈 일’을 회피하였고 그저 무난하고 평탄한 관계로 자신의 일상과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이고 아무 문제없는 지극히 현실아이였다. 어찌 말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오늘 말씀은 그 언약, 말씀에는 복과 저주가 있음을 알린다. 3절,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3).” 이 양면성을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인정하기란 불가능하다. 자신이 긍정하는 것만을 추구한다. 그럴 권리를 잃고 싶어 하지 않고 싫은 것은 피하거나 덮어두면 그만이다. 그러나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0-11).”

 

악인, 끝내 말씀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으로 저의 실상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어떤 캐릭터를 좋아하고, 피규어를 모으고, 일본 애니메이션을 필사적으로 좋아한다. 그야말로 ‘욜로족’으로 당장, 지금 좋은 것으로 족하다. 굳이? 하고 아이는 자신의 미래를 운운하는 것에 거부반응을 표시했다. 더욱이 영생이라니! 다소 같은 말이 맴돌고 더는 지루해 할 때, 마침 ‘우리 아이’의 전화가 들어왔다. 줌으로 예배를 참여하고 어느새 서울 자취방에 도착했다며 전화를 한 것이다. 나는 복도로 나와 서성거리며 아이와 통화를 했고, 우리가 같은 것을 바라고 같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주의 백성임을 강조하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아침에서야 어제 주일에 들어온 아이의 카톡과 도서상품권을 보고 오늘이 스승의 날인 것을 알았다.

 

상대적으로 두 아이를 놓고 하나는 주를 영접할 수 있는 계기를, 하나는 주를 믿고 바라는 신앙이 주의 나라가기까지 영원히 변치 않기를. 나의 두 기도는 갈리었고, 해야 할 일은 선명하여졌다. 곧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신 약속이 그 핵심이었다(4). 이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 12:32).”

 

나로 오늘 여기에 두신 이는 하나님이시고, 한 영혼을 두고 씨름하며 저와의 관계가 곧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바로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곧 나는 누굴 이끌 수도 돌이킬 수도 없으나 나의 자리에서,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으로,  나 역시 주께로 향하게 하시는 것을 안다. 바르게 그 영혼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데도 나로 주의 영과 온전히 함께 하기를 바라시는 데 있었다. 나는 이를 증거하는 것으로 오늘을 산다. 오늘의 주격은 하나님이시다. 말씀으로밖에 다른 수는 없다. 오늘 내가 누굴 대하는 일에 있어서 말이다.

 

본문 5절, “내가 또 너희 조상들에게 한 맹세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인데 오늘이 그것을 증언하느니라 하라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 결국 나로서도 ‘아멘’하는 것일 뿐이다. 하면,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곧 나는 글로 쓰고, 말로 전하고, 곁을 지킴으로 그 소임이 전부다. 이로써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하면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세계는 무궁하심을 믿는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에게 혹은 내 곁에서 나와 씨름하는 이를 통해서 주의 살아계심은 '오늘' 증명된다. 나는 그 때마다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족하다. 내 말은 흩어져 사라지는 것 같고, 이 글은 한두 명에게 읽히거나 외면당한다 해도, 그 한 영혼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주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아이’가 고맙다고 인사할 때 새삼 나도 그리 대답했다. 나 역시 저로 인하여 나의 사명을 완주할 수 있다. 마음이 어려울 때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는 늘 되새기는 마음이 ‘한 영혼으로’였다.

 

누가 이 글을 보고 안 보고, 누가 함께 예배에 나와 설교를 듣고 안 듣고, 나는 강제할 수 없는 것들을 두고 애통해 할 뿐 주의 이름을 부를 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시는 말씀이 나를 다잡는다. 사람도, 어떤 보람도, 성과도, 그 어떤 결과도 이 땅에서의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자칫 거짓된 것뿐이라…. 오늘 날도 “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의 수대로 그 수치스러운 물건의 제단 곧 바알에게 분향하는 제단을 쌓았도다(렘 11:13).”

 

이 지경이 된 곳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호와께서는 그의 이름을 일컬어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16).” 오늘 듣는 하나님의 경고를 말씀을 떠나서는 알 수도, 살 수도 없음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그러므로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말씀 없이 모든 것은 악하다. 결국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마 7:18-19).”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을 다하는 것,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0-12).” 이에,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11:5-6).

 

저들의 결국에 대하여는 그러하나,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7).

 

‘오늘’ 나의 하루는 그러하여서 다른 이의 하루와 달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 3: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