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전봉석 2023. 5. 19. 05:3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예레미야 15:19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편 15:1
 
 
 
모든 시작들에 대하여,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8-19).” 나는 새삼 주가 이루시는 일에서 놀라웠다. 과연 이런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줄 알았는데, 어제는 아이의 문자가 나를 뭉클하게 하였고,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릴 때 장모의 솔직담백한 기도에 눈시울을 붉혔다.
 
스승의 날을 맞으며 아이가 문고 기프트카드를 보냈고 나는 그것으로 성경과 유진 피터슨의 설교문 한 권을 샀다. 주문한 것을 받고 아이에게 덕분에 고맙다고 사진과 같이 문자를 했다. 오후께 아이의 문자는 오히려 감사하다며, ‘위하여 기도하겠다’고 하였다. 먼저는 아이의 이런 말이 자연스러워진 것에 놀라웠다. 저녁에 예배를 드리는데 늘 그렇듯 졸음이 밀려오고 때론 노인이 무슨 말을 알아듣기나 할까, 하는 회의가 있었다. 여느 날과 같이 찬송하고 순서에 따라 어제는 장모의 기도로 시작하였다. ‘내 젊은 날, 환경적으로 어쩔 수 없이 우상을 숭배하였던 것을 용서하옵소서. 나중에 주 앞에 섰을 때 나를 모른다 하지 말아주옵소서.’ 하는 내용이었는데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떠듬떠듬 고하는 그 한 마디 한 마디의 표현이 간절하여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아내도 그러했는지 눈을 끔뻑거리며 눈물을 참는 것 같았다.
 
종종 설교원고를 작성하면서 이렇듯 애써 수고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작은 교회를 이어가고, 형식적인 듯 한 가정예배를 계속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도 들곤 하였던 게 사실이다. 그렇게 나는 때로 가벼웠고 쉽게 잊고 돌아섰던 일이 아이의 문자 하나에, 늙은 장모의 간곡한 기도 한 마디에 순간 두려움 같이 감동이 일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3).”
 
나는 더러 의미 없는 말처럼 기도를 하고 설교원고를 작성한다. 초안을 잡을 때 수십 페이지의 글을 일주일 내내 다듬어서 여덟 장 내외로 정리한다. 덧붙이는 말을 주시고, 인용구절을 생각하게 하실 때는 글의 구성을 다시 고치기도 한다. 어쩔 땐 스스로도 굳이 이렇게 할 정도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닥치고 할 때가 더러 있었다. 늙으신 노모와 같이 살면서 저의 마지막 길을 맡기심이다, 하는 심증은 있어서 가정예배가 말씀 읽기에서 설명하고 설교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는 동안 노모는 기도와 같이 과거 자신의 일을 회상하며 우상과 신주를 섬기던 일에 대해 더는 회고하며 말하지 않는다. 그때를 그리워하거나 돌아보지 않는다. 앞서 이사야의 글에서 주가 전하시는 내용도 그러하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잊으라는 것. 지나간 시간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 돌이켜 깨어 있고, 그리하면 전에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을 행하실 것인데 사막에 길을 내고 황무지에 강을 낼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를 어제는 아이와 노모에게서 보았다. 하나님과 함께 하라는 것, 이는 묵상이 그러하여서 천천히, 느긋하게, 반복하여, 기도하며 읽는 것. 더듬더듬 손으로 글자를 짚어가며 읽는 늙은 노모의 성경 읽기를 나는 존경한다. ‘렉시오 디비나’ 이를 우린 거룩한 독서 또는 영적인 독서라 할 수 있겠다.
 
오늘 본문은 가슴 아프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1).” 곧 우리 하나님의 실망,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2).”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자유가 우리로 ‘죽을 자’로, ‘칼을 받을 자’로 내버려두심이 된다. 이 시대의 영적 자유분방함이 우리 영혼을 어그러진 길로 인도한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이 단순명료한 진리를 우린 종종 무시하며 산다. 노아의 방주 짓는 시기가 길어졌던 것은 주께서 오래 참으심이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신 시간이다. 하나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벧전 3:20).” 우리의 결국은 두려움 앞에 세운다.
 
나는 장모의 기도에 가슴이 뭉클하였고 심령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허술하고 미숙한 설교나 기도는 있어도, 헛되이 전하여지는 말씀은 없었다. 우리의 기도도 그와 같아서 간절하고 진솔한 몇 마디의 말이 나의 영혼에 자극이 되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모든 노인의 인생은 그 사연으로 주름이 깊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고단하였을 시간이 검버섯으로 돋는다. 하나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에 오늘 본문의 정황이 암담하다 후반부에 이르러 기도로 주 앞에 나아갈 때 새 힘을 얻게 한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15).” 하는 고백이 날마다 거듭, 조용하면서 느리게,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 속하는 것.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나의 감동은 그러하였다. 것도 한참을 고심하며 반 깁스를 한 손으로 간신히 연필을 들고 낮 동안 적어두었을 쪽지를 보며 더듬거리며 아뢰는 노모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새삼 나의 영혼을 부끄럽게 하였다. 우리의 경건과 무심한 듯 무던한 시간은 전하여진다. 유전되거나 저절로 전파되는 것은 아니다. 주께 맡기고, ‘마땅히 행할 일’을 행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의 생각은 하지 않는 것,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나는 가끔씩 이 한 구절의 말씀을 떠올리고 자리를 지킨다. 다른 거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과 누가 어디로, 어떤 일로, 권하고 도우려할 때 가만히 주께 아뢰며 즉흥적이지 않기를 기도하고는 한다. 누군 그래서 발전이 없다 하고, 누군 그래서 희망이 없다고 하나 동시에 나는 노아와 그의 시절을 생각한다. 어차피 우리가 산다는 일은 아무도 해보지 않은 처음 겪는 것들이다. 아이가 태어나 바동거리는 일에서 사춘기를 겪으며 마치 격변의 시대를 지나는 아이 때에도, 성인이 되어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장년이 되고 노인이 되어 죽음을 준비하는 일에서도… 모두는 다 처음으로 겪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이 인생이었다. 침상에서 생활하는 노모의 하루나 젊은 날을 만끽하듯 자유로운 청년의 우리 자식들이나… 모두는 처음으로 보내는 20대나 80대를 산다.
 
살아서 사는 동안에 삶을 충실히 하는 것, 그때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우리의 의로는 주가 되신다. 이를 걷어차고 사는 동안에는 알 수 없는,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위해 울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렘 15:5-6).”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이 덜컥, 겁이 난다.
 
장모는 어느 시점에 그런 마음으로 두려움을 얻었을까? ‘나를 모른다 하지 말아주옵소서.’ 실은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더듬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아뢰는 그와 같은 기도가 천 마디 말보다 울림이 컸다. 이 비밀,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나는 우리의 신앙이 두려움과 통회함에서 안정을 찾는다고 확신한다. 자신을 돌아보며 애통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신앙은 허깨비다. 그의 수려한 말은 장식일 뿐이다. 자복하여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이것이 신앙의 기본이면서 전부이다. 다만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7).” 이 놀라운 은혜와 은총이 송구하고 면목이 없을 따름이다. 하여,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 17:15-16).”
 
날 위해 주가 비신다. 그것으로 우리는 악에서 떠나 주를 바라는 자로 산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렘 15:11).” 이와 같은 말씀이 있어 우리는 쓰러지고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아뢴다.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15).” 말씀이 오늘을 비추시고, 일련의 상황과 사실이 주의 살아계심을 증거한다. 그리하여 주 앞에 고하는 것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16-17).” 오늘의 이런저런 일에 대하여 주께 묻는다.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18).”
 
기도로 나의 마음을 보이는 일, 아뢰어 주께 고하는 것은,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시 17:1).
 
오늘 다윗의 기도가 우리의 것이다. 이는,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62:8).
 
주가 나의 피난처요, 위로자이심을.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렘 15:19).” 주의 긍휼하심으로 오늘 하루, 우리의 낯선 첫 날은 다시 시작된다. 하여,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0).” 이 놀라운, 기이하고 특별한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21).” 그리하여 주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일에 대하여,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15:2-5).
 
오늘 우리의 하루는 또 다시 아무도 살아본 적이 없는 날이다. 하면 주의 은혜로 살 뿐이라,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8-19).” 이에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