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그러므로 보라 다시는 이 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죽임의 골짜기라 부르는 날이 이를 것이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19:6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편 19:1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보내신다. 내가 바라던 것은 자주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만을 행하게 하신다.
먼저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에게서 옹기를 구입하여 이를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져가게 하신다(1-2). 거기서 말씀을 선포하여 이르게 하시는 것이 심판에 대한 선언이다(3-5). 그 대상은 부패한 지도자들에게 향한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와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이 동일하게 처절할 것임을 알리게 하신다(6-9). 이는 ‘죽음의 골짜기’가 될 것으로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살육당할 것을, 그들 앞에서 옹기를 깨뜨리며 선언하게 하신다(10-13). 즉 옹기를 깨뜨리듯 예루살렘을 무너뜨리고 깨드릴 것임을, 그 이유는 그들이 옥상에서 우상을 숭배함으로 집집마다 더러워진 까닭인 것을. 끝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백성들을 행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한 결과로 혹독한 재앙이 따를 것을 전하게 하신다(14-15).
나는 늘 안에 있으니 이런저런 소식을 듣게 되는데 특히 믿는 자들의 소식이 안 믿는 자들의 소식보다 그때마다 극적이다. 더욱이 주의 부르심을 받은 자의 경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이끄심을 본다. 가령 동생에게 세 가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더 나은 것과 다음으로 나은 것을 물리고 가장 하기 싫은 방향으로 이끄시는 것을 본다. 하여 또 그렇게 되었다고 여긴 데서 엉뚱한 일이 터졌다. 그곳에 있던 불법 외국인 노동자들이 붙잡혀 가고, 회사는 벌금을 받아야 하고, 사장은 몸이 아프다. 엎친 데 덮친다고 동생은 이런저런 내용을 말하는데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그게 또…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님이 몰아가시는 게 느껴졌다. 하필이면 그 날에, 공교롭게도 자신이 가던 날에, 그런 와중에 사장은 또 몸이 상하였다.
들으면서 극적인 등장이란 생각을 하였다. 연출하시는 이가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그게 또 그렇다고 동생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저들에게는 그래서도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그러나 달갑지 않은, 그럼에도 준수해야 하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였고, 맡기시는 일은 성가시고 불편한 일이었다. 전에부터 동생은 그와 같은 불법적인 요소들을 해결해야 하고 구조를 바로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고는 했다. 저들은 이를 미루었고 여태 괜찮았다고 하며 무시하던 것들이 공교롭게도 동생이 다시 가는 날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저들의 말인즉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렘 18:12).” 그러니 사람 스스로 안 변한다. 들려주고 말하여도 듣지 않다 기어이 일이 터지고 건강을 잃고서야 아차, 싶은 것이다. 지혜자는 일러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잠 28:14).” 그럼에도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29:1).” 결국은 그리 되어서야 ‘내 이럴 줄 알았다.’ 하는 영국의 희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과 같이 헛될 따름이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구십이 다 된 장모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오늘밖에 시간이 없다는 식의 표현을 더하는데도 아직 시간이 많은 줄 안다. 우린 아직 젊어서 혹은 여유가 있어 괜찮다고 여긴다. 곧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까지도 그럴 것이다. 오늘 본문 ‘깨어진 옹기’는 강퍅한 우리의 심령을 일깨운다. 본래 우린 흙으로 지으심을 받은 바, 이 은혜를 질그릇에 주신 덴 다 이유가 있다. 무슨 청자니 무슨 백자니 하며 수억 원을 호가하는 것이라 해도 흙일 뿐 던지면 깨진다. 하여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우린 우리 스스로 괜찮을 수 없는 존재이다.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시 103:14-15).
이를 안다면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일’을 어찌 소홀히 다룰 수 있겠나? 여기서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는,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 곳을 불결하게 하며 이 곳에서 자기와 자기 조상들과 유다 왕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 곳에 채웠음이며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4-5).” 오늘 말씀을 우리 생활에 적용하면 내가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것과 하나님 외에 더 바라고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오늘 우리의 탐욕과 육신의 생각이 그것으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이를 버리지 못하고 사는 한 사는 게 지옥일 따름이다. 지옥은 헬라어로 ‘게헨나’로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란 의미의 히브리어 ‘게 힌놈’이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다. 자기 아들을 자신이 섬기는 우상 앞에 산 채로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모두들 돈을 추구하고 이상을 꿈꾸며,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그 신념에 따라 사랑하는 ‘자식’ 곧 자신까지도 기꺼이 그것을 위해 바친다. 이를 불교용어로 쓰면 아귀(餓鬼)다툼이다. 아귀한 탐욕으로 생존 상태로 아귀도(餓鬼道)에서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서로 먹으려고 다투는 형상을 말한다.
일련의 상황을 보다 오늘 말씀을 마주하고 앉아 나는 생각한다.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민 11:33-34).” 이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엡 5:3).” 곧 우리가 성도여서 그런 곳에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그게 또 그리 되게 된다. 이를 누구는 가벼이 미뤄 여전히 그 자리를 맴돌 뿐이다. 같은 날의 연속인 것 같으나 누군 앞으로 나아가고 누군 여전히 ‘광야 40년’에 머물고 있다. 그렇게 결국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그러니 스스로의 문제를 인식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5).” 그럼에도 자신은 괜찮다고 하는 것에는 별 수 없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우리로 늘 깨어있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부르시고 보내신다. 마주하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신다. 귀찮고 성가시고 심지어는 자괴감이 들기도 하는데, 거기서 옹기를 깨야 한다. 자기 아집을 부숴야 한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19-20).” 늘 들어앉아 보고 듣는 일이란 게 한계가 있을 것 같은데, 이런저런 사연에 뭐라 답을 하다 또는 저의 구구절절한 말을 듣다 그 안에서 주의 뜻을 읽는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우상트로 둔 때가 북이스라일의 아합 왕 때가 극적이었다. 당시는 또 번성하였던 때라 겁날 게 없었다. 아합에게는 일흔 명의 자식들이 있었다. 이에 가뭄이 들고 3년 6개월 동안 국가적 위기를 겪는 동안 백성들은 아우성이었다. 뒤이어 아합의 70명의 자식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8-9).”
족한 줄 알지 못하는 곳이 아귀도다. 서로가 물고 뜯고 다투는 게 아귀다툼이다. 그렇듯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잠 30:15-16).” 그러니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두고 씨름하는 꼴이라, 인생이 다 지나가고 구십이 낼모레인데도 아직 시간이 있다고 하는 식이다. “그러므로 보라 다시는 이 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죽임의 골짜기라 부르는 날이 이를 것이라 여호와의 말이니라(6).” 하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섬뜩하여 멈추게 된다. 도벳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숨어 있던 선지자의 집을 고발하여 그곳에서 함께 지내며 배우던 선지생도 70명을 도륙하기도 한 인물이다. 도벳이란 이름은 ‘불사르는 곳’으로 당시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쓰레기를 불태우던 것을 연상하게도 한다. 가나안 족속 ‘힌놈’은 저의 아들을 이 골짜기에서 불살라 우상의 제물로 바친 사람이다.
도벳은 이에 버금가는 사람으로 ‘죽임의 골짜기’를 의미하는데, B. C. 586년 예루살렘은 결국 바벨론에 의해 함락당한다. 당시 바벨론 군사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을 죽여서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불태웠다! 유다 사람들이 바알을 숭배하며 자신들의 자식을 불살라 이곳에서 바알의 제물로 바쳤던 것과 같이…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잠 13:21).” 이에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9-10).”
오늘 우리로 명하신다. “너는 함께 가는 자의 목전에서 그 옹기를 깨뜨리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9-10).” 하는 말씀을 알려야 한다. 전하는 자의 마음은 어렵다. 자신을 돌아보아도 부끄러움뿐인데 하물며 누구에게 바른 소리를 해주어야 한다는 일이 자칫 저로 적이 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상황에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우린 또 보내심을 받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공교로운 일이고 하필이면, 그게 또 달갑지 않은 일이겠으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 곳과 그 가운데 주민에게 이같이 행하여 이 성읍으로 도벳 같게 할 것이라(12).” 이 두렵고 무서운 말씀으로 우리가 먼저 오늘을 살피게 된다. 오늘 본문이 주시는 말씀은 그러하여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19:1-3).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데 있어 자연이 입을 모아 외친다. 말씀이 이를 선포한다.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행 14:17).” 우리는 우리 임의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롬 16:25-27).”
곧,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 우린 말씀에 따른다. 그리하여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막 13:28-29).” 그러므로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7-8).
이에 오늘도 말씀 앞에 앉아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9-10).
이 맛을 앎으로,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1-12).
나는 기도하고 찬양한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