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전봉석 2023. 6. 1. 04:38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예레미야 28:15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편 28:6-7

 

 

 

거짓 선지자 하나냐가 예레미야를 풀어준다. 바벨론에 빼앗긴 성전 기물들이 2년 이내에 돌아올 것이라 선언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저의 행함과 예언이 그럴듯하다. 모든 백성이 좋아할 소리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냐에게 말하였다.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되리라(9).” 하나냐는 자신의 말과 그 예언이 그럴듯하게 인위적으로 예레미야의 나무 멍에를 풀고 그를 돌려보낸다. 문득 사람이 좋아할 그럴듯한 행위와 말로 현혹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다. 말세라 일컫는 동안 이와 같이 참과 거짓이 혼용된다.

 

그러나 회개와 순종이 없으면 회복과 축복은 거짓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거짓 증거를 지적한다. 말하는 이나 듣는 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지만 자신들이 좋을 대로 하였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먼저는 악한 길에서 돌이켜야 하고 자신을 낮추어야 하며 기도하여 주를 찾아야 한다. 곧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그러므로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곧 자신을 인정하고 주께로 돌이킬 때 주는 이를 언제든지 용납하신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은 것이 사람들의 소원과 기대가 하나님의 뜻과 다를 때이다. 하나냐가 거짓으로 예언하고 그리 행함은 사람들을 위하여서이다. 저들이 듣고자 하고 그 마음에 원하는 바에 맞추는 것,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 4:19-20).”

 

우리의 가장 큰 실패요인은 눈가림으로 서로를 위하는 것이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6-7).” 이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들은 치열하였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교만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것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그 마음을 사고자 하는 데 전전긍긍한다. 이를 행하는 자를 무례한 자라 하여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잠 21:24).” 이를 인정하거나 분별하기가 어려운 것은 우리 안에도 ‘하나냐’와 같은 마음이 수시로 들락거리기 때문이다. 이에,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시 31:23-24).

 

말씀 속에 답이 있다. 주를 바람으로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이에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사 51:12).”

 

나는 이처럼 본문을 따라가며 말씀이 말씀으로 이끄시는 대로 맡겨진다. 그러면서 생각하기를 하나님을 멀리하던 때에 내 스스로가 얼마나 사람을 찾고 그들과 어울리려 하였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저들에게 인정받고 그 안에서 위로와 사랑 받는다는 느낌을 갈구하였던 것 같다. 그뿐인가? 그러기 위해 저들이 추구하는 세상과 그 세상을 의지하는 데 있어 전혀 거리낌이 없었으니 “이제 네가 너를 위하여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의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의 왕 바로는 그에게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왕하 18:21).”

 

나는 이 말씀을 절감한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냐의 그러한 거짓을 이해한다. 내가 ‘하나냐’로 사람들 사이에서 거짓으로 사랑하는 데 익숙하였던 자이다. 말씀으로만 아멘, 하기에는 왠지 어줍고 면구스럽다. 머쓱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다. 저들이 어찌 판단할까를 염려한다. 그러나 ‘아멘’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에만 화답해야 한다. 오늘 6절,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하니라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가 예언한 말대로 이루사 여호와의 성전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 곳으로 되돌려 오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거짓 예언을 알면서도 저의 예언과 같이 조속하게 그 모든 게 해결되기를 바라여 아멘, 하였다. 예레미야가 ‘아멘’한 것은 하나냐의 말에 동의해서가 아니다.

 

7절, “그러나 너는 내가 네 귀와 모든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잘 들으라.” 하고 곧이어 예레미야의 ‘아멘’을 전한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아멘, 하는 이 말에는 엄청난 위력이 있다. 목사들의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축복에도 아멘, 아멘 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이게 무슨 추임새도 아닌 다음에야 신중해야 한다. 때론 책망과 저주에도 아멘, 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모세가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을 행하는 저들 앞에 저주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신 11:29).”

 

그때에 잘못과 그에 따른 응징에 대하여도 ‘아멘’ 할지어다, 하는 말씀에서(27:11-26) 우린 엄숙함을 가져야 한다.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15, 16, 25).” 우리로 아멘 하게 하심은 그리 행하고 그리 행함에 대하여 옳소이다, 하고 동조함으로 동참하는 것과 같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141:5).

 

때론 내가 원치 않는, 듣기 싫은 것이라 해도 주의 뜻이면 아멘, 할 수 있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이는 우리로 더욱 신중하게 또한 주를 의식하며 주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오늘 본문은 우리 일상에서 자주 경험하게 되는 어떤 거짓과 참 사이에서 우리로 어떤 데에 아멘, 할 것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이에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사 8:20-22).” 이와 같은 말씀을 주시는 데는 옳은 분별과 그 영을 갈구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실은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심지어 외톨이가 될 각오와 소외를 불사할 마음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 1:6-7).” 엄연히 다른 복음도 우리 곁에 있다. 이를 분별한다 해도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듣고 싶은 말과 내가 원하는 소원과 내가 바랐던 일을 행할 때 나는 저를 마다하기 어렵다. 속된 말로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할 겨를도 없이 아멘, 하고 덮어놓길 원한다. 아, 쉽지 않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그러기 싫다. 저가 내 가려운 데를 긁어주고 바라는 바 이 세상을 살고 가는 데 있어 듣고 싶은 위로와 마음을 위로를 준다면, 예전에 어떤 아이의 엄마가 했던 말도 ‘종교 하나쯤 가지고 그 삶에 위로를 얻을 수 있다면 저는 반대하지 않아요!’ 하는 따위로 가벼이 여기는 일이었으니,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 3:6).” 때론 먼저 떠나야 한다. 더는 위로를 끊어야 한다. 좋은 사이로 천국에 가는 게 아니다.

 

미혹하는 것들에 대하여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1, 13).” 저들은 이리와 같은 자들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7:15).” 하나 그 결국은 파멸일 것을,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계 19:20-21).”

 

오늘 말씀에서 나는 두 가지 시점을 동시에 찾았다. 하나는 누구에게 내가 혹히 ‘하나냐’는 아니었는지? 또 하나는 내 안에 여전히 어떤 이해와 내가 바라는 위로와 말의 ‘하나냐’를 찾고 있지는 않는지? 그러나 분명한 말씀의 증거는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하여 나는 또 하나, 내가 두렵다. 행여 사람을 바라고 사람을 의식하며 사람의 뜻을 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시 28:1).

 

시편으로 사는 삶은 언제나 하나님께로 달려가게 한다. 하면 어김없이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9, 11).” 그리하여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5).”

 

때론 감히 얼굴도 들 수 없게 죄로 부끄러워하면서도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세계,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2).

 

손을 들고, 나의 의지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에 따라 간구한다. 기도할 것을 칠판 한 귀퉁이에 쓰고 한참을 서서 저를 생각하거나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5).

 

나는 이와 같은 시편의 세계를 사랑한다.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28:6-7).

 

이는 그 안에 살면 살수록 느끼게 되는 것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다. 내가 어떠하든지, 어떤 지경에 놓였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9:10).

 

이에,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28:8-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