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전봉석 2023. 6. 16. 04:39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

예레미야 43:11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편 43:3

 

 

 

예레미야는 말씀을 전하였다. 아사랴와 요하난이 백성들을 주도하며 말씀을 거짓으로 매도했다. 결국 “이에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 지휘관과 모든 백성이 유다 땅에 살라 하시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선지자 예레미야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거느리고 애굽 땅에 들어가 다바네스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함이러라(4-7).” 다바네스는 성 주위가 12m에 달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였다. 요새 안에 우물이 있어 식수가 풍부하였다. 저들은 바벨론을 피해 애굽으로 이주하여 ‘다바네스’라는 안락한 곳에 정착하였다.

 

당장은 좋은 결과이고 옳은 선택인 듯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곳을 심판하실 것을 미리 경고하신 바 있다. 다만 그러한 말씀이 저들에게 들리지 않았던 것이고,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러나 “다바네스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보라 내가 내 종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불러오리니 그가 그의 왕좌를 내가 감추게 한 이 돌들 위에 놓고 또 그 화려한 큰 장막을 그 위에 치리라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10-11).” 이와 같은 예언의 말씀을 주의 종 예레미야가 그렇게 전하였다 해도 저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다.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0-11).”

 

이것이 성경의 기본 원리로 의인은 주를 경외함으로 두려워할 줄 아는 자들이고 악인은 이를 듣지 아니하고 자기들 좋을 대로 행하는 자들이다. 특히 오늘에도 ‘아사랴’와 ‘요하난’ 은 우리 주변에 허다하고 더하여 내 속에도 이들은 산다. 현실적으로, 말씀은 그렇다 해도 당장 사는 일에 대하여, 내 안의 ‘아사랴’와 ‘요하난’은 나를 쥐고 흔든다. 곧 나를 주도하는 지도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한 걸음 더 들어가게 하시는 말씀이다.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그의 인자하심을 나의 생명보다 낫게 여기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안의 마음 밭을 개간하고 기경해야 하는 것은 농부가 씨를 뿌리기에 앞서 당연한 것이다. 이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1-2).

 

어떤 지도자를 세웠느냐가 아니라, 우리는 저들로 악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131:1).

 

그럴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2).

 

곧 자기 의지적으로 엄마 품을 파고드는 아이처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더러는 무모한 것 같고 이성과 상식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오늘 날 세상이 믿는 자들을 향해 아우성치는 소리와 같이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막 13:13).”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살전 2:14).”

 

곧 오늘 본문에서도 예레미야와 그의 말을 받아 적는 바룩도 함께 끌려갔다. 사람들은 마치 보란 듯 12m 높이의 성곽이 두르고 있는 ‘다바네스’를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예레미야가 말한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다는 것을 저들은 조롱하듯 즐거워하였을 것이다. 당시 바벨론에 의해 피폐되었던 상황에서 다른 대안은 없는 것처럼 애굽은 상대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곳이었다. 당시 애굽은 “…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양식의 궁핍도 당하지 아니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열에 아홉은 그리 여기고 선택하는 것이 타당하였을 것이다.

 

우리 일상에서도 누가 어떤 일을 도모한다 할 때 나름은 믿는 자로 기도하고 주께 맡긴다고 하면서도 세상 좋은 방식을 따라 오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소망은 당장의 어떤 이득을 취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일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이와 같은 말씀에 우리를 의탁하기는 이성적으로 너무 힘들다. 불가능할 정도로 모호하고 애매하다. 하나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하여,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누가 이 시국이 어디에 부동산을 개업하였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투자하여서 그리 일을 벌였는데 뜻하지 않게 그 일이 막혔다. 이를 알리며 기도를 부탁하였는데, 앞서 개업을 할 때도 오늘 그 어려움을 겪을 때도 나는 동일하게 말씀으로 축복하고 말씀으로 격려하였다. 그런 상황이 우리로 근심하게 하나 그 근심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삼을 것인지, 세상 근심으로 삼을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여기서 근심이 다른 게 아니라 그 근심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같은 근심으로 하나는 회개를 하게 되고 하나는 세상-애굽으로 이주하여 살 궁리를 하게 한다. 어제 저녁 이 말씀을 가지고 가정예배를 드렸다. 근심은 같으나 그 근심으로 하나는 회개를 하나는 세상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할 때에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11).” 자,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회개’가 우선될 때 우린 근심으로 주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자신의 죄를 두고 변증하게 된다. 곧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경험이나 직관을 버리고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돌아본다. 그저 막연하였던 기도나 신앙이 얼마나 열심 있게 달라지는지, 얼마나 자신의 잘못을 벌하려 하는지, 일체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 몸부림 치게 하는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되는 근심은 그러하였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주 앞에 날마다 자신을 세우는 일, 그리하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근심을 두신다. 근심은 말 그대로 해결되지 않은 일을 두고 속 태우는 일이다. 사람을 우울하게 한다. 근심은 모든 산 자의 피치 못할 여정이다. 인생에 ‘바벨론’이 공격하였고 저들로 어려움이 닥쳤다. 이때에 말씀과 ‘애굽’이 같이 있다. 안 믿는 자들과 같이 우리의 마음도 근심에 동요하기 마련이다. 그때에 성경이 제시하는 것은 기도다. 우리 하나님은 심령이 가난하기를, 애통하기를, 온유하기를 바라신다. 나의 심령은 애굽으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주를 바랄 때가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다른 무엇으로는 ‘채울 수 없는 가난’은 복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3-5).”

 

그 가난은 우리로 주 앞에 아뢰게 한다. 애통함은 주께만 토로할 수 있는, 세상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말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앎으로 우린 주께 아뢰고, 아룀으로 온유하여진다. 마치 ‘젖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긴 것 같은 평안’이다. 맡김이란 자포자기나 체념이 아닌 모험이다. 하여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이 놀라운 신뢰가 우리에게 더하시는 근심의 목적이고 하나님의 뜻이다. 이에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102:26-27).

 

결국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사랑하지 않음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그 뜻을 행하는 자가 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이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결단이나 노력의 결실이 아닌 것을 안다. 기도하면 할수록 나는 할 수 없음을 알고 더욱 주 앞에 맡긴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어떤 시늉이 아니다. 그렇다고 체념도 아니다. 역동적인 순응이다. 엄마 품에 앉긴 젖 뗀 아이의 평온함이 ‘세상물정 모르는 얼간이’처럼 보이나 그게 가장 귀하였다. 다시 한 번, 이를 위하여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131:1).

 

다들 ‘한 번 사는 인생’을 운운하며 보다나은 진취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발판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나, 이와 같은 이치에 앞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것으로 똑같은 근심이 누구에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되고, 누구에게는 세상을 따르게 하는 근심이 된다.

 

오늘 본문에서 간과하기 어려운 것은 “너는 유다 사람의 눈 앞에서 네 손으로 큰 돌 여러 개를 가져다가 다바네스에 있는 바로의 궁전 대문의 벽돌로 쌓은 축대에 진흙으로 감추라(렘 43:9).” 이는 상징이고 함축이다. 하나님은 그의 하시는 일을 숨기신다. 그 일을 알지 못하게 하셨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이는 마치 임의로 부는 바람과 같아서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우린 알 수 없으나 우리 안의 성령으로 안다. 우리는 이끌림으로 주를 의뢰한다. 다시 지혜자의 말씀 한 마디를 덧붙이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그러나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3, 9).”

 

그러할 때에,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43:2).

 

어떤 어려움으로 주 앞에 아뢰고 고할 때, 아버지!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3).

 

바람에 몸을 맡긴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가 되어,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1:3).

 

그러므로 오늘도 주 앞에 고개를 숙이고,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43:4).

 

하고 나 자신에게 선포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