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성실하심으로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
예레미야애가 2:1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시편 54:5
하나님의 진노하심 앞에 경악하고 비탄한다. 선민들의 참담한 현실에 괴로워한다. 어쩌면 우린 이와 같은 고통 중에야 알게 될까? 우리가 축복 가운데 살았던 날은 말씀으로 거룩하게 살 때였음을 말이다.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다.’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들을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딸 유다의 견고한 성채들을 허물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그 지도자들을 욕되게 하셨도다(1).” 구름은 암흑이다. “그가 흑암 곧 모인 물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둘린 장막을 삼으심이여(삼하 22:12).” 우리 삶에 더는 희망이 없는 듯하다.
그 앞에 광채로 말미암아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고
지존하신 이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을 내리시도다
(시 18:12-13).
결국 말씀이었다.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내가 너희에게 철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레 26:3-4).” 언약의 말씀으로 사는 것, 곧 그 귀한 쓰임에 합당하도록 자신을 삼가 연마하는 삶으로, 그렇지 않을 경우 하나님은 던져버리신다.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 던지셨다.’ 우리의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가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폐하였나이다(사 64:10-11).” 버려진 아름다움은 어둠에 가려진다. 이는 음부에 던져짐으로, “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4:11).”
나로 두렵게 하는 것, 주의 더하신 영광을 쓸모없이 버려지게 할까 하여…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은혜를 알 때 오늘의 어려움에도 의미가 있었다. 다들 이런저런 어려움 가운데서 더욱이 주를 바라며 의뢰한다. 어려움을 겪는 모습은 안타까우나 그로 인하여 주를 더욱 찾고 의지하는 데는 감사하다.
교회가 바로 세워지는 여부에 대하여 이처럼 나를 말씀 앞에 앉히는 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0-21).” 그러므로 성경은 거침없이 외친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5-16).”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산다는 일은 내 앞에 놓인 생명과 사망과 복과 화를 내가 택하는 일이다. 주를 사랑할 것인지 세상을 사랑할 것인지, 이 둘을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이어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그럼에도 스스로 괜찮다, 그럴 수 있다고 허용하는 범위가 어둠의 자리였다.
하나님은 철저하시다. 오늘 8절, “여호와께서 딸 시온의 성벽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무너뜨리는 일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벽과 성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그들이 함께 쇠하였도다.” 요즘은 자주 어떤 갈등을 느낀다. 주변의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볼 때면 주께서 그리 허용하시는 데 따른 목적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허투루 고통을 두지 않으신다. 바울은 자신의 몸의 가시, 사탄의 사자, 육신의 고통을 가진 까닭을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우리가 받은 계시. 이 크고 은밀한 은혜가 너무 큼으로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오늘 우리에게 ‘어떤 고통’을 두셨다는 사실… 물론 우린 괴롭다. 하여 주께 이를 고쳐달라고 기도한다. 바울도 그런듯하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8).”
그때에 우리 주님의 의도하심은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 결국 이를 인정하게 하시려고, 이를 알 때 고통으로 우린 강하여진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10).”
주는 선포하신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5-6).” 이를 듣고 알아 맡은 바 오늘을 감사로 사는 일,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37:23-24).
고로 주의 은혜란 내가 하는 일이 잘 되고 무탈하여 안이하여서 태만한 자로 사는 게 아니다. 이를 위해서도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 알 같아서 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셨느니라(사 48:18-19).” 우린 오늘에 충일하여 말씀에 성심을 다할 때 주가 증명하실 것이다. 더딜지라도 없이하지는 않으실 것을 안다.
오늘 예레미야는 비통해 하며, “딸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까 처녀 딸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줄소냐(13).” 하며 주를 바라지 못하였던 것을 괴로워한다. 어제는 비슷한 시기의 한 시편을 설교 초안으로 작성하며 마음을 다졌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137:1-3).
이 얼마나 비참하고 비통한가? 이방인들의 흥을 돋우려 저들이 찬양을 부르라 하고 연주하게 한다. 비로소 우리의 잘못이 하나님을 조롱거리가 되게 하는 일임을 알고 운다. 당하는 괴로움도 고통스럽겠지만 그로 인하여 하나님이 웃음거리로 전락하여 저들의 안주거리기 되다니!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4-5).
나는 본문의 시를 옮겨 적으며 그 심정을 느낀다. 곁의 안 믿는 자에게 믿는 자로서 아무런 영향력도 없을 때, 저로 나를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지 못할 때의 자괴감이란… 성도이면서 아무도 저들이 나로 믿는 자인 것을 알지 못한다면… 이를 우린 숨길 수 없는 냄새라고 바울은 언급하였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오늘의 나에게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 그저 남들처럼 산다고 사는 일에 찌든 냄새만 날까?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14).”아,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54:1-2).
오늘 시편은 기도하는지를 묻는 듯하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이를 위하여서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37:4-5).
주께 맡긴다는 것,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과연 이 일이 쉬울 것 같은데 그게 그렇지 않다. 모두 맡기고 평안히 주 안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럴 수 없다. 다들 저마다의 자기 판단과 의가 있다. 다 맡길 수는 없다. 적당히, 그리고 이만큼은 내가 해야지 누가 하겠나, 싶은. 그러나 우리 주님은 덧붙여 이르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때론 그 일로 어려움을 겪으나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0:22).” 주님은 왜 이처럼 말씀으로 그리 될 것을 알게 하시는지… 저마다의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와 피치 못할 사정을 두고 보면 알겠다. 누가 무슨 일로 어쩌다 주일을 빠졌는지, 말씀을 소홀히 하게 되었는지, 왜 교회를 못 나가고 있는지… 어쩌면 지옥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저마다의 핑계와 변명으로 가득한 곳인지도 모르겠다. 이에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54:4-5).
다시금 시편을 살게 한다. 할 때,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이 명징한 말씀 앞에서, 우린 증명할 것이다.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