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에스겔 33:7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시편 89:11
죄와 죄악의 개념은 구별될 필요가 있다. 죄는 예수의 십자가로 처리되었다. 악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날마다 우릴 위협한다. 그래서 우리에겐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가운데,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하고 고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또한 소명과 사명은 다르다. 소명은 부르심을 받아 새 사람이 된 것이라면, 사명은 보내심을 받은 것으로 주어진 상황 속에서 우리로 주를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의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 동시에 회복에 대하여도 말씀하신다. 에스겔은 선지자로 소명을 받았고 이방인은 물론 이스라엘을 향하여도 심판을 전해야 하는 파수꾼의 사명을 가졌다. 사명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송한다. 파수꾼으로 비유하며 성도의 사명을 알리고(1-20), 우리 곁의 성도들에게 현재의 상태를 경고하게 한다(21-33). 이는 개인적이면서 공통의 문제다. 우리 한 사람의 죄가 개인적일 수만은 없는 일이다. 최후의 심판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너희가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 하시니라(20).” 이스라엘의 패역한 모습과 오늘의 나, 저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준행하지 못하는 모습과 현재의 나를 돌아보게 한다.
가령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 그 심령을 향한 경고를 듣지 않는 상황(1-9)에서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모습으로(17-20), 하나님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가 나열되고 있다(21-33). 곧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오늘 우리가 번번이 당하는 악의 굴레다. 예수께서 악한 농부들을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과 같다.
한 집의 주인이 포도원을 세로 주고 타국에 갔다. 열매를 거둘 때가 되어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심히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다.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었다. 그들에게도 그리하였다. 이제 자기 아들을 보내었다. 아들은 존대할 줄 알았다. 악한 농부들은 그 아들을 보자,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죽였다(마 21:33-39).
그리고 예수께서 물으셨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40)” 하나님의 공의는 죄와 악을 용인하실 수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긍휼히 여기심을 이기실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43).” 즉 말씀의 언약으로 창세전에, 예정하심으로, 백성 삼으신 자들로서는 그 완악함을 버리고 구속함을 받게 하신다.
우린 보내신 자리에서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33:1-20). 본문은 비유의 형식을 통해 선지자의 책임과 역할을 전하고 있다. 주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각되었다. 우린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말씀을 산다. 말씀을 사는 것은 전하여지는 것이다. 파수꾼으로 비유되는 이 삶은 우리 곁에 두신 한 영혼 한 영혼의 생사가 달린 문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그럴 수 있는 것은 “때가 이르리니” 우린 이를 경계한다.
그때에 나타나는 증상으로,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3-4).” 오늘 우리 주변을 포진하고 있는 현상이 다르지 않다. 우린 ‘악인의 회개’에 초점을 맞춘다. 오늘을 사는 데 따른 궁극적인 관심은 내 곁의 ‘악인의 회개’다. 하나님은 이를 기다리시고 기뻐하신다.
오늘 11절,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이스라엘’로 총칭되는 우리 선민의 삶에 있어, 우리가 악에 사로잡혀 사는 것에 여러 번 회개할 것을 반복하고 있다(12, 14-16, 19).
하나님의 관심은 주의 자녀들이 돌이켜 주를 바라는 것이다(눅 15:3-32). 복음의 초점도 그것이다(7:36-48, 18:9-14). 특히 의인의 회개보다 악인의 회개 가능성을 더 부각시키는 것은 의인 아흔아홉보다 악인 하나를 구하시고자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이로써 삶의 변화는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라 하라(겔 33:14, 16).” 오늘 이 부분은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모두 충족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성도의 삶은 살아서 사는 동안에 설득하는 자세로 산다(13, 14, 18-19). 어디서 읽은 중국의 한 학자의 일화가 생각난다. 저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다. 저들은 부친의 삶과 달리 무질서하게 살고 있었다. 하루는 부인이 학자에게 말했다. 연구만 하고 남들만 가르칠 게 아니라 자식들 교육에도 신경을 쓰시라. 그러자 학자는 ‘같이 사는 나의 모습에서 아이들이 배우는 게 없다면 내가 무얼 더 가르칠 수 있겠나?’ 가끔씩 이 내용을 생각할 때면 평소의 생활이 열 마디 충고보다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선언할 때 불같이 해야 하지만 상황을 고려하면서 지혜롭게 촉구해야 하는 것. 가령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지나시며 사마리아 여인의 타락한 삶을 돌이키실 때, 직설적으로 지적하기보다 우회적으로 접근하신 것을 안다. 이는 저로 자발적인 회개를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요 4:4-26). 설득력이 있는 삶이 그 어떤 웅변가의 삶보다 귀하다. 종종 나는 노아를 생각할 때면 너무 아득하여 닿을 수 없다. 저는 알지 못했다. 120년을 방주를 지으면서 저의 삶은 꾸준하였고, 무던하였다. 설마 그 속에 ‘이게 맞나?’ 하는 회의가 정말 없었을까?
아브라함은 또 어떻고? 저는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말씀을 따라 모든 것을 버려두고 길을 나섰다. 그의 나이 일흔다섯으로 적지 않은 때였다. 믿음의 조상을 운운하셨으나 25년 동안 자식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백세에 얻은 이삭이 전부인데 아이가 아직 어릴 때에 그나마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다. 과연 저는 속으로 갈등 한 번 하지 않았을까?
누구도 신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을 알수록 하나님만 신뢰할 뿐이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중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31절).” 저들은 심각한 오해에 빠졌다. “인자야 이 이스라엘의 이 황폐한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많은즉 더욱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 하는도다(24절).” 우리의 영적 무지함은 죄로 자라간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잘못 이해했다(21-26절). 하나님의 심판은 이루어질 것이다(27-29절).
현재의 삶을 스스로 판단할 때 오해가 생긴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고기를 피째 먹으며 너희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너희가 칼을 믿어 가증한 일을 행하며 각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하고 (25-26).” 우리의 판단은 끝 간 데 없이 이어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4-6).”
말씀 속에 문제와 답이 있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오해한 결과 심판을 받는다(겔 33:23-29).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자야 이 이스라엘의 이 황폐한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많은즉 더욱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 하는도다(24절).” 이는 오늘 우리 또한 믿음으로 저절로 모든 게 다 의롭고, 천국에 이를 것으로 안다. 그런데 말씀은,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심지어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하여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물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그러니까 믿음이 있다면 그에 따른 행함도 나타나는 것이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여 이 둘의 관계, 믿음과 행함은 모두 우리 삶의 영역에서 드러난다.
믿으면 만사가 형통할 줄 알았는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36-38).” 어떻게 그런저런 끔찍한 상황에서도 저들은 그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일까?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해도 우린 그 현실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함이란 믿음으로 그리할 수 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 2:22-24).” 오늘 본문은 이를 알지 못했던 이스라엘의 무지함으로 심판이 이른 것을 알게 한다(겔 33:27-29절).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 내 곁의 여럿이 믿는 자이다. 스스로들 그리 자신을 놓아둔다. 그러면서 하나님 알기를 싫어하고, 그것으로 자기 생활을 제약한다고 오해한다. 그래서 누군 범신론자가 되어 두루두루 하나님을 보편화하여 안다고 여긴다. 누군 너무 크게 은혜를 확대 재생산하여 뭘 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산다. 이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말씀을 가진 시대를 살면서 이와 같은 말씀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영적 상태를 항상 깨어 있게 하는 것, 합당한 열매로 이를 증거하는 것, 변화가 없는 삶의 회개는 진정한 구원도 묘연하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우린 ‘하나님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89:1).
말씀을 산다는 일로,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2).
곧 나의 삶 가운데서 내가 아는 하나님,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 나만의 하나님에 대하여,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5).
이에,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11, 5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