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전봉석 2023. 8. 3. 04:47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에스겔 34:2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시편 90:14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겨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할 것을 서술하였다(33:25-26). 앞서 이런 비관적인 내용과 달리 오늘은 회복을 낙관한다. 과거의 그릇된 목자들을 심판하고 (34:1-10) 하나님과 백성들이 인정하는 새로운 목자가 나올 것을 알린다(23-24).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곧 이스라엘의 심판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게 한다.

 

거짓 목자들은 양떼를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였다. 그에 대한 심판을 묘사하고(1-10), 참된 목자가 세워져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11-31). 자신이 직접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지를 강조한다. ‘한 목자’의 등장은 새로운 국면을 암시한다. ‘목자와 양’은 은유적인 표현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1-3).

 

예수께서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요 10:7).” 하고 말씀하시고 동시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4-15).” 하신 말씀으로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관여가 우리를 살리셨다.

 

오늘 본문에서 ‘언약적 진술’이라 할 수 있는 곳,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34:24).” 하신 말씀과 “그들이 내가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며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고 그들 곧 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 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30).” 하신 말씀으로 미뤄 주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지대한 관심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거짓 목자와 참 목자의 특성에 대하여, 악한 목자는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3-4).” 하는 부분에서 마음이 찔리고 어떤 부끄러움이 엄습하기도 하였다. 마침 어제는 ‘아이’가 와서 같이 점심을 먹고 모처럼 커피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갔다. 이번 토요일에는 모 보육원 친구가 온다. 한동안 토요일마다 성경공부를 하다 저의 교회가 서울 집 앞으로 정해지면서 나는 슬그머니 빠졌다. 감사하게도 좋은 교회 좋은 목사님 내외를 만났다.

 

악한 목자는 양을 수탈하고(3), 양들은 약해지고(4a), 길을 잃고(4b), 결국 들짐승의 밥(5)이 된다. 반면에 선한 목자의 양은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25a), 악한 짐승으로부터 보호하여 평안을 보장하고(25b), 주변 환경을 변화시킨다(26-27). 궁극적으로 선한 목자는 온전한 땅을 부여한다(29). 맡겨진 영혼을 위해 나는 과연 무얼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우린 자기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운 존재다. 가장 연약한 가운데서 ‘선한 목자’를 따른다. 어떤 목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도 사실이다. 목자의 잘못에 대하여 더는 목자의 직분을 수행할 수 없을 때,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 떼가 노략 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8).” 하고 지적하신 후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도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먹이가 되지 아니하게 하리라(10).”

 

이와 같은 말씀에서 순간 두려운 생각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까? 늘 내 안에 속삭이는 어떤 괴롭힘은 ‘하는 것도 없이’ 하는 자책이다. 누군 그런 내게 다만 ‘그 자릴 지키는 것’으로 되었다 하고, 누군 이와 같이 ‘말씀을 묵상하고 글로 쓸 수 있는 것’으로 족하다고 하였다. 덧붙여 만일 여느 목회자와 같이 교회가 규모가 있고 교인이 늘었을 때 여전히 지금과 같이 ‘이 일들’을 수행할 수 있을까? 하고 반문하기도 했다. 과연 그런가? 하고 늘 나를 충동하는 마음에 대하여 경계하지만 그대로 안주하려는 안이한 마음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주님은 엄연히 ‘네 양’이라 하지 않으시고 ‘내 양’이란 표현을 하셨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15-17).”

 

나는 의도적으로 베드로를 지목하여 하시는 말씀에서 저의 이름을 지우고 내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어느 아이’를 두고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 묵상을 나누자고 제안하였으나 답이 없자 더는 묻지 않았다. 어느 정도 아이의 마음이 뜬 것을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입만 삐쭉거릴 뿐이다. 그런 거 보면 나는 누구와의 새로운 시도에서 서로의 결별에 대한 공포가 있다. 사람에 대해 내성이 쌓인 것은 이별은 차갑고 냉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예닐곱 번의 전학으로, 중학교 입학을 1년 중단하였던 일과 두 번의 전학으로 생긴 내성이랄까. 덧붙여 어릴 때부터 교회를 오가는 숱한 사람들의 뒤끝을 나는 경멸하며 자랐다.

 

좋을 땐 간 쓸개 다 줄 것처럼 굴다, 주 안에서 만난 사이라지만 끝은 늘 불편하고 불쾌했던 기억뿐이다. 대표적으로 한 교회의 경우 처음 한동안은 서로들 좋아라 하고 떠받들던 이들이 어느 순간 자신들의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쫓아냈다. 더욱이 그때 난 처음으로 누굴 참 많이 좋아했었는데, 어떤 이별도 유쾌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았다. 어쨌든 내 안에 고착된 방어기제는 ‘정들면 지옥’이란 의식이다. 내가 동물을 키우지 않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늘 아이들과 수업을 하는 사람으로 살면서, 정을 주고 남다른 관심으로 친하였던 아이와 떨어질 때는 매번 몸살을 앓았다.

 

그런 자가 목사로 세움을 받았으니, 나는 자꾸 끝을 염두에 두고 사랑하려 한다. 참 ‘이기적인 목자’다. 양 무리를 파멸로 이끌게 되는 것은 당연하겠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 떼가 노략 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겔 34:8).” 하시는 말씀 앞에 멈추어 한참을 시선을 떼지 못하겠다. 나를 겨냥하여 하시는 말씀 같아서 새삼 두려운 마음이 든다.

 

우리 일상에서 유년의 기억이나 몸에 밴 어린아이 적의 습관은 두고두고 걸림이 된다. 금세 의기소침해지고, 우물쭈물하기 일쑤며, 망설이느라 생각하기만 하다 행동하기를 그만두는 경우가 흔하다. 이기적인 목자다. 나만 이렇듯 아침마다 말씀의 꼴을 먹고 정작 이를 먹이려 하는지? 어쩌면 나는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그 자리에서 초막 셋을 짓고 머물기를 바라던 베드로의 심정으로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변화산에서의 저가 체험한 황홀경은 그럴만하였지만 주님은 가차 없이 저들을 이끌고 산을 내려오셨다. 그리고 저잣거리에서 만난 첫 상대가 하필 귀신 들린 자였다.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소리 질러 이르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눅 9:37-39).”

 

종종 이를 실제로 경험한다. 나는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안주하려 하는데, 주님은 기어이 이끌어 지긋지긋한 현실의 늪에 내동댕이치듯 던져놓으신다. 가령 묵상 후 채 오전이 가기 전에 어떤 일로 마음이 상하거나 누구의 소식으로 화가 인다. 어떤 염려와 근심이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기도 한다. 그러할 때,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눅 9:44-45).” 가끔은 수수께끼 같은 주의 뜻 앞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서게 된다.

 

오늘 말씀은 선명하다. ‘한 목자’를 통한 미래가 그려진다(겔 34:23-31). 우린 늘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기 일쑤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목자가 되심을 알리신다(11-16). 사회 구조 또한 그렇듯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양들의 세계’에 대한 보장이 있다(17-22). 목자와 양의 관계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되짚게 한다. 그 경우 양과 양 사이를 심판하실 것이다(17, 20, 22). 하나님이 세상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에 집중하게 한다.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고 사는 삶은 축복되다(11-16). 하나님께서는 친히 목자가 되실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표명하셨다.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16).”

 

그리하여,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23:4-6).

 

이는,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이 놀라운, 하나님을 사랑한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1).” 이에 우리 안의 어떤 모난 기억, 트라우마 같은, 완고한 마음을 벗어버림으로,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사 65:23).” 그러할 때,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24-25).”

 

이 놀라운, 감출 수도 없는 주의 사랑을 가지고,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호 2:23).” 곧 우리의 날들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현장이다. 이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그러므로 당면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곧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한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7).”

 

이에,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90:1-2).

 

이 귀하고 신비로운, 친밀하고 은밀하게 나누는 고백이 이제 내 것이 되었음을 감사한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8-9).

 

지나간 날이 순간이었다. 어떤 노여움도 서러움도 모두 가시고, 오직 주만이 나의 목자가 되어 사는 동안에,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11-12).

 

그리하여,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14-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