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3편 / 의로운 인생
230827 주일
시편 143편
의로운 인생
시 143:1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시 143:2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시 143:8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들어가는 말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사 26:7).”
오늘 시편 진술에 주목하면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들로 의롭다 하신다. 이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여기서 우린 ‘미리’ 곧 어떤 일이 생기기 전에, 앞섰던 하나님의 뜻에 주의하여,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하는 ‘애당초’와 결국은 명심해야 한다.
이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그러니까 우리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이 모든 일은 창세전에 예정되었고, 택하심으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하는 말씀으로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다 하심은 결과론적인 의미보다 전혀 별개의 존재인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오늘 시인은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시 143:1).” 하고 아뢴다. 그러니까 ‘주의 진실과 의’로 응답하시는 대상은 구분되었다. 주의 진실과 의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보여주셨던 ‘그분의 놀라운 긍휼하심과 인자하신 품성’이다(89:19-37). 오늘을 살면서 이를 체험하고 간증할 수 있는 제한적이 된다. 죄를 알고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하며 ‘정한 마음’을 구하였는데, 이는 ‘죄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정직한 영’은 ‘성령에 의한 변화된 심령’을 말한다. 일반인이 이를 구할 수 없다.
하여 말씀은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곧 오늘 우리는 우리의 ‘의로운 인생’을 소망하여, 하나님과 화평하기를 구한다. 찬송은 의로울 수 없는 인생을 의롭다 하신 이를 높이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본문이해
억울한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구원과 인도하심을 구한다. 시적배경은 압살롬에게 쫓길 때 쓴 것이다. 또한 ‘회개 시편’으로 6편, 32편, 38편, 51편, 102편, 130편, 143편 일곱 편으로 구분된다. 죄를 인식하는 본문 구절은 2, 8, 10절이고, 믿음과 회개가 우리로 ‘의로운 인생’을 사모하게 한다.
다윗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 본다. 바울 역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그의 인간론에서도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하고 우리는 의로운 인생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곧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갈 2:16).” 하였다.
오늘 시편의 시적구성은 4연으로, 1연(1-2)은 하나님의 자비하심 앞에 호소하고, 2연(3-4)은 현실을 비탄하며, 3연(5-6)은 인생의 경험에서 구원을 회상하고, 4연(7-12)은 장래의 구원을 청원한다.
1.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구하다(1-2).
다윗은 자신의 인생에서 ‘주의 진실하심과 의’를 여러 번 경험하였다. 그래서 오늘 첫 구절도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1).” 즉 ‘주의 진실과 의’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인 것을 다윗은 안다. 하나님의 진실과 의는 인생이 죄악뿐임을 아신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33:13).” 이를 토대로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143:2).” 자비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호소한다. 즉 ‘심판 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는 의미다. 왜냐하면 ‘주의 눈앞에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바울도 이에 대해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하고 단언하였다. 우리도 스스로를 안다. 우린 누구도 스스로가 ‘선을 행할 수 없다.’ 자신을 스스로 옳다 여기는 사람치고 거짓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가 스스로 주 앞에 떳떳할 수 있겠나?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130:3).” 그러므로 우린 누구라도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곧 자비하신 주의 성품에 호소해야 한다.
2. 현실은 비탄스럽다(3-4).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부정하는 게 사람들의 세상이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롬 1:21-22).” 스스로 의를 구하려 하다 보니,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3).” 그렇게 정욕대로 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이러한 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가 만방에 선포된다.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24-25).”
이를 다윗은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나를 암흑 속에 두었나이다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143:3-4).” 곧 현실은 우리를 괴롭게 하여,
① 우리 영혼을 핍박한다.
② 우리를 암흑 속에 둔다.
③ 우리 심령이 상하게 한다.
④ 우리 마음을 참담하게 한다.
우리 영혼은 우울하여 어두운 곳에 버려지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시 88:6).” 그러나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미 7:8).” 하는 믿음의 고백이 우리 안에서 선포된다. 오늘 시편은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시 143:4).” 현실로부터 느끼는 무력감과 절망감을 성도들은 있는 그대로 주 앞에 아뢴다.
소위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은 당할 수가 없다. 현실은 점점 더 맘몬,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느 것 하나 돈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은 게 없다. 이때 우린 비탄을 느끼며 주께 아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3. 구원을 회상하다(5-6).
우리의 일상은 구원의 연속이다.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성도는 매순간 주의 구원을 확신한다. 곧 구원의 기쁨이 우리 믿음의 기쁨희락이다. 다윗은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5).” 즉 구원이 죽고 난 뒤 천국 가는 것으로 전부가 아님을, 삶의 모든 순간이 구원이심을, 우리의 신앙적인 경험은 이로써 활력을 얻는다. 다윗은 회개할 때,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51:12).” 하고 죄로 잃어버린 구원의 기쁨을 구하였다.
이에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6).” 이는 믿는 자로 구원의 기쁨을 잃어본 성도이면 안다. 또는 뒤늦게 회심하여 돌아온 성도이면 안다. 구원의 기쁨 없이 살 때로 돌아가라 하면 죽어도 그리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여기서 ‘손을 펴고’는 ‘기도하면서 손을 뻗치고’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의존을 나타낸다. 다윗은 이를 자주 경험하였고 표현하였다.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28:2).” 실제 우리 영혼이 그러지 못할 때, 우리 심령은 ‘마른 땅 같이’ 바짝 말라 황폐하다. 교회 다니며 긍휼하지 못하고 비정한 성도들은 그 영혼이 마른 땅 같은 성도인 게 틀림없다.
4. 구원을 탄원하다(7-12).
우린 날마다 매순간의 은혜로 산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날마다 매순간이 구원으로 이어진다. 우리 영혼이 피곤함을 느낄 때는 교회에 뜸하거나 예배를 사모함이 무뎌져서이다. 이에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84:2).” 곧 ‘내 영혼이 쇠약하다’는 것은 기력이 완전히 고갈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다윗은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7).” 이와 같이 다급한 심정으로 주를 부르며,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8).”
여기서 ‘아침에…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하는 심정은 새벽예배를 사모하거나 아침에 묵상하는 성도이면 안다. 주를 의뢰할 때,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46:5).” 새벽 곧 하루 중 처음을 주의 말씀으로, 기도로 채울 때 “여호와여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9).” 하고 올른 하나님께로 달려간다. 이는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10).” ‘하나님의 땅’ 곧 ‘내가 주께 피하여 숨’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곳. 이를 다시 말하면, ‘당신에게 나 자신을 숨겼습니다.’ 하는 소리다. 또는 ‘나를 의탁합니다.’ 하는 뜻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책임지세요.’ 하는 견고한 의뢰다.
그랬을 때 가장 안전한 처소가 되신다는 것.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11).”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이는 다른 어떤 것보다 확실한 보장이다. 하나님은 중요한 약속을 하실 때면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사 48:9).” 즉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12).”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주의 종 된 나를 책임지시라는 소리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인생’은 없다. 그러나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바로 ‘의로운 인생’이 있다.
욥은 고난 중에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이를 아는 다윗은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8).” 하고 주께 간구하였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