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전봉석 2023. 9. 5. 05:15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호 7:10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시 119:116
 
 
여호와 ‘라파’ 곧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신다. 그런데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1).” 치료는 형벌이 아니라 회개시킴으로 책망과 훈계로 가르치신다. 이는 회복을 위함으로 오직 하나님께 있다. 그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난다.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한 것들,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죄가 드러나는 것이 부끄러운 일만은 아니다. 죄를 알 때에,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3-4).
 
문제는 죄가 아니다. 이는 이미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바 되었다. 그럼 그 죄를 드러내어 인정할 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그러니까 문제는 죄가 아니라 그 죄를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이다. 곧 죄악은 하나님의 치료를 거부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오히려 ‘저희는… 노략질하며’, ‘궤사’ 곧 남을 속이고 기만하는 거짓으로 도적질과 약탈을 일삼았다. 저들의 더 악한 죄는 하나님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형벌을 내리신다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롬 1:28-29).”
 
그와 같은 일상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끄러움도 없이 악행을 일삼게 하였다. 오히려 “그들이 그 악으로 왕을, 그 거짓말로 지도자들을 기쁘게 하도다(호 7:3).” 돌이켜 이를 치료하시고자 죄악을 드러내시는데 저들은 이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지도자들을 기쁘게 한다.’ 기쁘게 한다는 것은 서로 부추겨 오히려 저들에게 권세를 더한다. 이를 가리켜 오늘 말씀은 ‘간음하는 것’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이는 마치 ‘빵 만드는 자에게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하고 오늘 말씀은 묘사한다.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라 과자 만드는 자에 의해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그가 반죽을 뭉침으로 발효되기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 뿐이니라(4).”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을 때 이것으로 즐거워하며 보람을 찾고 그 더러운 욕심이 불일 듯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이에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 20:12-14).” 그 결과가 뚜렷한데도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산다.
 
사는 동안 우리는 사는 일에 너무 신경을 쓴다. 그러다 정작 자신이 어떤 죄로 물들어가고, 그와 같은 거짓을 거짓으로 느끼지 못하고 사는지도 모른다. 사느라 사는 일이겠으나 그것으로 자기 영혼이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를 깨닫고 주께 아뢰며 자신을 돌아본다.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12:1-2).
 
이를 지혜자는 “이익을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살게 되느니라(잠 15:27).” 그러므로 다시 시인은,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5:9).
 
곧,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52:1-2).
 
이와 같은 성경의 말씀이 오늘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한다. 결국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을 때 우리 삶의 끝은 패망뿐이다. 결국 오늘 말씀은 “그들이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들의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그들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호 7:7).” 어쩌다 우린 이처럼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말씀 앞에 앉아, 사는 데 따른 어떤 어려움을 생각한다. 나의 육신의 연약함으로 새삼 마음이 심란하였다. 가령 허리에 무슨 문제가 있다. 이번에는 어깨에 힘줄이 끊어진지 오래 되었고 그로 인한 통증이 진행 중이었다. 목 어디 몇 번째에 문제가 있다. 이런저런 문제를 듣다보면 결국은 수술을 권하지만 또 다시 그리 될 것이란 판단이 대체적인 소견이다. 그러니까 나의 모든 신체구조가 비대칭이라, 그래서 어떤 통증의 원인을 찾아 결국은 수술밖에 답이 없는데 그런 뒤 얼마쯤 지나면 또 그렇게 척추분리증도, 어깨 힘줄도 다시 끊어질 것이란 것이다. 그러니 당장 어깨 힘줄 끊어진 것을 잇는다 해도 그 쪽만 사용할 수밖에 없는 신체구조라 또 다시 끊어질 게 뻔하다. 척추분리증이 간단한 수술이라 일반인의 경우 통증을 호소하면 다시 잇는 수술을 권하는데, 나는 신체적으로 다시 끊어질 것이라고 했다. 나는 마음이 어려웠다.
 
의사들의 말은 언제나 나를 시무룩하게 한다. 주변에서는 다들 수술하라고 권한다. 늘 곁에 있는 아내 역시 이를 권하는데… 나는 생각이 많아 주의 이름을 되뇔 뿐이다. 나의 아버지. 나의 이와 같은 육신의 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아버지. 나는 좌절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으나 이것으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소서. 언제나 육신의 고통은 실제적이어서 관념적이지 않고, 구체적이어서 낭만적이지 않다. 나는 육신의 고통으로 사는 일에 더욱 치열하게 주를 바란다. 나의 육신을 지으시고 오늘의 고통을 아시는 아버지. 이것으로 내가 주를 더욱 사모하며 도우심을 갈망하게 하시는 아버지. 다른 이로써는 어떤 위로나 구원이 있을 수 없음을 실제적으로 부딪고 살게 하시는 나의 아버지. 나는 치료의 하나님, 하나님의 라파의 손길을 바라며 하루씩 더하여 살아갈 따름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당장 돌아오는 목요일에 입원을 하고 수술 날짜를 잡았지만 마음이 어렵다. 수술을 한다 해도 ‘그쪽만 사용할 수밖에 없는’ 나의 육신을 누구에게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어떤 이는 이제 나이가 몇 살인데, 하면서 앞으로 살날을 운운하지만 저들은 알지 못하는 나의 친숙한 고통에 대하여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어 입을 다문다. 늘 진통제와 위장약을 달고 사는 가운데 적당한 날은 모처럼 활짝 갠 하늘 같이 반짝인다. 늘 어디가 아프다는 것, 나는 어제 아내에게 이를 설명하다 포기하였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잘 알 수 없는 어떤 고통에 대하여는….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아버지. 나의 육신의 고통으로 한 날의 수고와 그 삶의 값진 소중함을 일깨우시는 아버지. 나로 이렇듯 고통 중에 거하게 하시는 나의 아버지. 나는 가끔 좌절하고 우울합니다. 서럽고 답답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그래서 나는 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고통으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이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이를 살게 하시려고, 오늘 본문에서 저들의 죄악이 치료의 드러냄을 끝내 거부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그러하였던 삶을 돌아보게 하면서.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 나로 더욱 말씀에 간절하게 하옵소서.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119:97-98).
 
이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하시는 말씀 앞에 안도하면서,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144:2, 91:14).
 
나는 나의 생각하기를 멈추고 주를 바란다. 주께서 허락하시는 날을 살면서 때로는 육신의 고통이 또는 마음이 어려움이 나로 다시 좌절하고 실망하게 한대도,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99-100).
 
아주 단순하게 때론 군더더기 없이 나는 주께 아뢴다. 사는 게 늘 고통중이라 해도, 오히려 두렵고 떨림으로 이 구원을 이뤄가게 하신 것임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를 위하여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때에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07).
 
다시 말해,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116).
 
결국 오늘의 나의 이 육신으로 내가 이루어 가는 것은 구원이어서, 사느라 그저 사는 게 전부가 아니라, 이러한 육신의 고통을 감내함은 내가 받은 특별한 은혜를 사랑함이었다. 나의 아버지. 나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 부디 나의 날을 다하는 동안 주를 더욱 사랑함으로 날마다 저 본향을 향하여, 이 가는 길을 멈추지 않게 하소서. 이는,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심판을 두려워하나이다
(1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