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호 13:4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 122:1
‘애굽 땅’에 있을 때, 내가 세상을 벗 삼고 살 때부터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셨다. 돌아보며 이를 새삼 묵상하게 된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던 때,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 낼 자 없으리라(12:8).” 하며 살았다. 그땐 그러한 모든 게 죄로 여겨지지 않았다. 다들 그러고 산다고 생각하였다. ‘스스로 자고하고 교만해 하던’ 때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나의 하나님’이셨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나를 돌보셨다.
돌이켜 보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죄악 중에 있었는데도 하나님은 나를 보살피셨다. ‘출애굽’을 위해 나로 그 환멸의 세상에서 그릇 행하는 모든 것을 놓아두셨다. 그리고 광야 생활, 고난과 시련의 생활로 몰아내신 것은 나로 하여금 주를 인정하기까지,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시 37:35-36).
오늘도 이를 알게 하심으로,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92:7).
곧 하나님을 인정하기까지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았던 것을 되돌아보게 하신다. 오늘 말씀은 이에 “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떨었도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호 13:1).” 나름 잘난 줄 알았던 때가 있다. 스스로 옳다 여기며 살던 때가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교만이 ‘애굽’ 깊은 곳에서 살게 하였고, ‘광야’ 그 먼 길을 돌게 하였다. 결국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저마다의 교만이 문제다.
스스로 내가 뭘? 하고 말씀이 더하시는 뜻을 멀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린 얼마나 스스로를 높이며 살고 있는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4).” 섣불리 충고나 어떤 권면을 할 수 없는 시절이다. 대놓고 자신을 뭐라 할까 하여 큰 교회로 돌다 이내 그마저 발길을 끊은 사람이 있다. 이런저런 저의 사연을 생각하면 그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교회에서 서로가 위선을 떤다면 교회 밖에 세상과 뭐가 다를까? 서로의 속사정을 알기 꺼려하고 자신의 상황을 누가 아는 게 싫어서 멀찍이 앉았다 돌아가기 일쑤이었다면 그것이 세상과 무엇이 다를까?
여전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하는 억울함이 우리 영혼을 짓누르는 한 그곳은 ‘애굽’이다. 분명 우리의 가치는 남다르다. 이를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나는 이 말씀으로 자주 묵상한다. 내가 누구인지, 오늘의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지. 곧 가까운 미래에서 무얼하며 영생을 누리게 될 지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라고 한다면 오늘의 이 모든 형편과 사정을 통해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하여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몸이 아플 때, 어떤 일로 마음이 어렵고 실의가 찾아들 때 나는 문득 이를 생각한다.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심을.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나는 어느 아이엄마를 생각하며 늘 마음에 주의 인자하심을 구한다. 어제는 공식적으로 기도제목으로 발표하였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인이 없다면 ‘그곳’으로 간다. 교회를 배회하며 주를 믿는다고 하는 아이엄마와 타종교인으로 아예 벽을 치고 마는 노모의 남은 생애까지. 그리고 언젠가 혼자 남겨질 아이를 생각하며. 그 때문에라도 나는 주께 나의 건강을 요청한다. 감당할 몫이 아니면 생각이 떨치게 하시고, 감당할 영혼이면 또한 능력도 더하실 것을. 결국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이 모든 것은 내가 하는 게 아닌 것을 잘 안다.
나로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것도, 그 습성을 털어내기까지 광야를 돌게 하신 것도. 모든 게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인정하기까지,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그게 나였음을 인정한다.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벧후 2:17).” 내가 그들이었고 그것으로 즐거운 줄 알고 살았음을 고백한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15:8-9).
이를 알면서 더는 바라는 것 없다. 몸이 아파서 그것으로 쩔쩔매면서도 나는 주께 구한다. 이 시간만 지킬 수 있기를. 아침에 나를 세우시고 말씀 앞에 앉게 하심으로 말씀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이 시간을 빼앗기지 않게 하시기를. 어느 한 영혼, 누가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시간이 되고 말씀을 더하심으로 ‘참된 구원의 능력은 오직 주께 있음을.’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하여 “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45:22).”
오직 이와 같은 말씀만을 붙들고 하루씩, 한 걸음씩 남은 생을 살게 하시기를. 이는 아버지의 뜻으로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그러므로 이런 날은 이런 날 대로, 저런 날은 저런 날 대로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것이 복이었다. 할 때에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31:7-8).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를 부르셨을까? 나는 ‘애굽’에 있을 동안에도 하나님은 내 편이셨고, 나와 함께 하셨음을 이제는 안다. 나로 오늘을 감당하게 하시는 이 모든 일들 가운데에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가 있음을 또한 믿고 안다. 그렇다면 앓아 눕히셔도 주의 뜻이고, 이처럼 기운을 더하시며 누구, 어느 한 영혼을 두고 상상하고 주께 아뢸 수 있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실 것을. 결국은 우리로 하나님을 인정하기까지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 ‘애굽’도 ‘광야’도 주의 섭리 가운데 다스리셨다.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사 41:13).” 이를 알 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46:1-3).
하여 이제 모든 게 주의 뜻이라면, 오늘 본문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호 13:4).” 하시는 말씀으로 모든 의문과 서럽고 어려웠던 마음이 다 풀린다. 나의 아버지,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10)” 그리하여 나는 죽을 때 죽더라도 이 시간, 아침에 나로 하여금 말씀 앞에 앉게 하시고 이를 글로 써서 ‘한 영혼’ 저와의 나눔이 되게 하신다면….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아무 것도 자랑할 게 없으나 주가 나로 ‘애굽’에서, 또한 ‘광야’에서 그리고 오늘의 이 모든 상황 속에서 함께 하심을 두고,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122:1).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능력과 은혜라니!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이를 알게 되면서 다른 무엇도 주저할 게 없어졌다. 그리하여 이제,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27:4, 84:2).
달리 더는 바랄 게 없다. 그러할 때,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122:7).
나는 할 수 없으나 우리는 할 수 있어, 교회를 세우시고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심은,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 그러므로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9).” 하여,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100:4).
이는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왕상 8:29).” 그러므로 이제 나의 남은 날들이….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122:8-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