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전봉석 2023. 9. 12. 04:56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

호 14:9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 123:1

 

 

오늘은 심판의 주보다 사랑의 하나님을 보게 한다. 우린 누구도 하나님의 지혜와 그 섭리에 따른 주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 오늘 9절,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 우린 다만 주어진 길을 달려가며 주신 삶에 승복한다.

 

우리의 자비로우신 하나님,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호 2:14-15).” 어떤 고난의 ‘거친 들’에서 위로하시고 죄악 된 우리 일상의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시는 긍휼의 하나님.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23).”

 

이를 오늘 우리로 돌아보아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하고 부르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호 14:1).” 우리의 목적지, 종착점이 되시는 주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선포이다. 곧 오늘의 어떤 어려움은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어떤 어려움이 주를 찾게 한다. 돌이켜 주를 바라게 한다.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신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6-7).”

 

우리 하나님은 이상하시다. 우리가 잘못을 하고 죄를 짓는 일보다 이를 돌이켜 회개하는 일에 예민하시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 33:11).” 이는 우리의 속성을 아시기 때문에 죄에 취약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시나 이를 돌이켜 주께 자복하고 회개하면 오히려 기뻐하신다.

 

그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을, 오늘 본문 2절에서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먼저 회개의 방법을 알 수 있다. 주께로 돌아와 아뢰는 것. 여기서 ‘말씀을 가지고’가 그 앞에 붙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그리고 ‘아뢰기를.’ 첫째는 말씀을 가지고서다. 묵상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며 나에게 들려주시는 세미하신 음성이다. 마치 어느 날 유난히 그 주일예배 설교가 ‘나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 같은. 묵상은 수천 년 전 이스라엘이 앗수르를 하나님보다 의지하였던 이야기가 오늘 ‘나의 앗수르’를 비춘다.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이 겪는 저들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로 확장된다.

 

다음은 ‘돌아와서’인데, 내가 ‘거기’ 있을 때는 몰랐다. 종종 아직 거기 있는 친구와 통화를 하거나 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감회가 새롭다. 또는 같이 ‘여기’ 있는 친구와의 대화가 긴요하고 즐겁다. 서로의 사연을 두고 ‘거기서는’ 넋두리에 푸념을 섞어 누굴 원망하거나 험담하기 일쑤였는데 ‘여기서는’ 같은 내용 같으나 그런 중에 주의 선하심을 찬양하고 감사하게 한다. 서로가 어떤 어려움을 가지고 말하면서 주의 소망으로 감사가 되는 것을 안다. 내가 복이 많은 까닭은 같이 ‘거기’ 있었던 몇몇 친구들이 이제는 ‘돌아와서’, ‘여기’에 있다. 서로 기도를 부탁하고, 아침마다 기도한다는 친구의 말에 ‘그런 소릴 할 친구가 아니어서’ 놀랍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 우리로 돌아온 것을 알게 한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9).” 할 때 저는 누구였나?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13-14).” 그대로 거기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런데 저는 돌아왔고, 이에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20, 22-23).”

 

돌아온 자들의 특징은 무슨 말을 하다 와락, 울음이 또는 감격이 목울대를 치고 올라온다. 더 잇지 못하는 저의 말끝에 나의 감격과 감사 또한 중첩된다. 어떤 말에 같이 울다 어떤 말에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돌아온 자들’의 특징은 이와 같이 ‘아뢰는 자들’이다. 개인적으로 주께 아뢰는 것은 물론 성도 간에 서로가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더럽고 추하여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속으로 끌어안고 살았던 말들도 서슴없이 토설하며 함께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는 최종적으로 “여호와께로”다. “…께로” 곧 히브리어 “엘”은 하나님께 방향을 돌리도록 촉구한다. 그때에 “선한 바를 받으소서.” 하는 ‘선한’, ‘아름다운’ 곧 주가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하여 우리로 ‘상한 심령’이 주는 역동적인 결과는,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7-8).” 아, 이 놀라운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는.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그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겠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니라(신 6:18-19).” ‘아름다운 땅’, 그 ‘좋은’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85:12-13).

 

말씀으로, 돌아와서, 아뢰는 삶으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69:30-31).

 

말씀으로 우릴 깨닫게 하실 때, 우린 돌이켜 주께 아뢰게 된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겔 36:31).” 여기서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전에는 그저 대수롭지 않은, 다들 그저 그러고 사는 줄 알았던 사소함이 어쩜 죄다 부끄럽고 원통하기만 한지. 차마 주 앞에 용서도 빌기가 민망하고 송구하여 고개를 처박고, 아버지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하신 아버지. 그럼에도 죄를 기억할 때마다 주의 긍휼하심 앞에 감사할 따름이어서, 아버지. 나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신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더해주세요.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 18:32-33).”

 

노예무역선 선장이었던 존 뉴턴은 돌이켜 회개한 후 온유한 거구가 되었다. 바보처럼 허허거리는 저에게 누가 물으면 ‘수렁에서 건지심을 받은 내가 어찌 탓하며 저를 돕지 않고 그대로 놓아둘 수 있겠나?’ 하고 그의 남은 생은 온유하였고 긍휼이 많은 자로 살았다. 후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 가사로 저의 신앙은 고백되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존 뉴턴, 1779.

 

‘거기’가 아닌 ‘여기’에 있으면서 알겠다. 하나님이 더하시는 징계의 목적은 치유로, 돌이켜 저로 주를 찬송하게 하신다. 오늘 본문 4-8절까지의 내용도 그러하여서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호 14:8).” 이는 성경의 핵심으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119:67, 81).

 

하여,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이를 나의 생활에서 경험하며 살고 있고… 실은 어제 딸애 친구 이야기를 들었다. 목회자 가정에서 자라면서 어떤 반감이 저로 안 믿는 자와 결혼하게 하였다. 위에 언니는 초기라 하나 위암을 겪으면서 돌이켰는데, 아이는 안 믿는 가정에서 저들과 어울리며 즐겨보지 못한 것을 만끽하며 살았다. 주일에 교회를 빠지고 여행을 가고, 일요일 오전을 나른함으로 즐기고 오후께는 휴일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서너 해가 지나면서 이제 아이를 원하는데 뜻대로 안 되는 모양이다. 체외수정을 감수하면서 이를 원하나 결과는 미지수이다.

 

우리 복의 비결은,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7-8).” 우린 우리 스스로 우리 됨됨이를 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9).” 그러니 그러려니 하고 안이하였다가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6).” 타종교인이나 안 믿는 자보다 ‘믿었던’ 자들의 척박한 생활을 나는 자주 본다. 상대적으로 저들의 완고함은 독보적이다. 그러니 오늘 나로 ‘여기에’ 두신 것이 복이라.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116:7).

 

할 때에,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123:1).

 

그 간절함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2).

 

헐떡거리며 열심히 산다고 사는데도 사는 일이 어쩜 그토록 황폐하고 척박하기만 한 것일까? 그럼에도 우리의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이는 주의 은혜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신 28:1).” 그러므로 말씀으로 돌이켜 주께 아뢰는 삶이란,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3-4).

 

하여 우리의 바람은 간절하여서,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86:3, 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