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 3:17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 6:9
어떤 어려움이 우릴 엄습할 때 우리는 손을 늘어뜨리고 낙심에 젖는다. 이때에 오늘 말씀은 ‘남은 자들’로서 우리에게 이른다.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습 3:16).” 모두가 낙심할 때에,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그러므로 모든 손의 힘이 풀리고 각 사람의 마음이 녹을 것이라(사 13:6-7).” 우린 아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12-13).”
그럴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벌써 ‘여호와의 심판’의 날이 지나갔으며 여호와께서 우리의 왕이 되어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이 놀라운 위로와 확신이 필요한 시절이다. ‘나의 하나님은 나의 가운데 계시며 나에게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러므로 어려운 일 앞에서 손을 늘어뜨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남은 자’로서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심과 같다. 나는 구원을 얻으려 애를 쓰거나 수고하지 않는다. 구원을 받은 자이어서 수고하고 애쓴다. 이미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는 나와 함께 계신다. 나를 보호하시는 전사와 같이, 혹은 승리한 전사와 같이 전능한 구원자는 나를 잠잠히 사랑하고 계시었다. 우리로 그의 사랑 안에 안식하게 하신다. 평안은 미래의 것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것이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의 안에 거함으로, 사랑 안에서 나를 새롭게 하신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그러므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이와 같은 평안으로 산다는 일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성적으로 이해시킬 수도 없다. 나의 어떤 점이 나에게는 물론 주변의 누구에게도 힘들어 보일 수 있겠으나 우린 그게 전부가 아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이는 나의 하나님이 ‘잠잠히’ 나와 함께 계심이다. 히브리어로 ‘야하리쉬’ 곧 ‘잠잠히’는 ‘안식할 것이다.’ 또는 ‘하다쉬’로 읽어, ‘새롭게 하다.’로 의미를 확장한다. 곧 하나님은 우리, ‘남은 자들’로 인하여 즐거워하시며 기뻐하신다. 우리와 함께 안식하실 것이다. 남은 자들이라 하면 상대적으로 남지 못한 자들도 있다는 의미가 되는데, 저들은 어떠한가? 교회를 떠나 주를 멀리하고 세상으로 간 자들은 물론이다. 하나 교회 안에 있어도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큰 아들과 같이’ 아버지가 늘 곁에 함께 계셨음에도 이로 만족하지 못한 자들이겠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 15:31).” 그러나 이를 알지 못하는 자는 교회에는 있으나 정작 교회 밖에 있는 자와 다를 것이 없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날은 ‘패역하고 더러운 곳’이다.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서로의 분을 풀지 못하고 산다. 패역하고, 더러운, 이교도적인 생활로 오늘 본문도 예루살렘이 겉으로는 깨끗하게 보이나 속은 부패하고 부정하였다. 그때에 ‘포학’은 타인의 권리와 위치를 무시하고 광포하게 대하는 것이다. 가령 이사 갈 곳 관리실 직원들이 고생이 많다고 한다. 다들 온갖 입질에 ‘갑질’이 끊이지 않아 심지어 이미 갖추어놓은 좋은 부대시설도 운영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들 자기 권리를 주장하느라 남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기 일쑤여서 말이다. 포학함은 현대인의 특징이 되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이 모든 원인은 하나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오늘 우리 곁의 여러 일상적인 모습이지 않나? 이를 오늘 본문에서는 분명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습 3:2).” 곧 말씀을 듣지 않을 때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는다.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는 당연하다. 죄가 내 안에 있을 때는 찬송도 기도도 나올 수가 없다.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시 10:3-4).
사람은 자고로 그러하여서 “만일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하리라 하니라(수 23:16).” 숱한 경고가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곳에는 여전하였다. 우리 안에 있는 탐심이 그 원인이다. 오늘 본문도 “그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습 3:4).” 어쩌다 그리되는 것일까?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7).”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를 때, 곧 경외하지 않음으로 탐심은 죄악 중에 가장 은밀하게 우릴 잠식한다.
이에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러니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25-26).” 이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귀한 가치는 말씀 앞에 날마다 자신을 세우는 일이다. 억지로라도 하루의 끼니를 먹어야 하는 육신과 같이 우리 영혼 또한 습관적으로라도 기도하고 묵상해야 한다. 이는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린다는 일은 자기 나름의 의지로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내가 성령을 구하는 것은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절대 나는 그럴 리 없다고 자부하면서 그 영혼은 강포해진다. 우린 누구라도, 언제라도 ‘남은 자들’에서 ‘남지 못하는 자들’로 뒤바뀔 수 있다.
나는 누구에게 답을 하면서 더는 나의 남은 생에 나로 내 것으로 살까하여 두렵다. 나는 주의 것이란 것에 얼마나 감사하고 이제는 안도하는지…. 더는 용쓰며 살기 싫다. 내가 애써 무얼 이루려하는 자부심이나 자긍하는 마음을 주의하는 이유다. 당시에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고 간사한 자”들이었다.
오늘 우리도 다를 리 없다. 아차, 하다가 우리 또한 쉽게 허물어지기 일쑤다. 우린 엄연히 하나님의 냄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사람 말에 일희일비할 거 없다. 또한 우린 주의 편지로 그 읽혀야 한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3:3).” 그러므로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내 곁에 어떤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대다수가 예전에 믿던 자들이었다. 어디서 잃었는지 모두가 ‘처음 사랑’을 잃은 사람들이다. 다 늙어 우울감이 그 영혼을 짓눌리며 안 믿는 가족만 의지하려 드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난데없는 아이의 장애판정으로 죽고만 싶다. 한 아이는 사랑 받고 싶어서 자신의 몸에 생채기를 내고, 거식증을 앓는다. 강박이 그 아일 사로잡았다. 이런 말이 다소 조심스럽지만 우리 곁에는 악령이 늘 같이 따라다닌다. 성경은 일러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스스로 자신은 아니라고 자부할 때 어느 순간 붙들려 있기 십상이다. 예수께서 주의를 주신 것처럼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저는 누구인가? 다 이룬 줄 알았다. 스스로는 믿음으로 구원 받아 천국 갈 자로 확신하며 산다. 그러느라 교회에서는 거치는 돌이 되는 이들이 숱하다.
우리로 인내하게 하심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우리의 이 소망이 얼마나 귀한가? 귀한만큼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마땅히 이 땅에서도 고작 명품 시계나 가방 하나에 애지중지하고, 누구처럼 집을 마치 신중단지 모시듯 하며 사는 형편이라니… 하여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이 값지고 귀한, 내 목숨보다 소중한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할 때에,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34:13-14).
부정적인 말과 생각을 금하는 일, 이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 1:26).” 하여 늘 깨어있고자 나는 숙제라 해도, 억지로라도, 습관을 따라 말씀 앞에 나를 세운다. 아침에 나를 깨워 주의 앞에 둔다. 그러함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 7:7-8).”
다만 주가 나를 사랑하심이었으니, 오늘 나는 내 몫의 자랑이 없다. 한 게 없어 다행일 때는 바로 주의 은혜로만 살 수 있어서이다. 이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하여,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6:1).
나는 주께 아뢰어,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4, 6).
부디,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7).
주께 아룀은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9).” 누가 뭐라 하든지 말씀으로,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미 7:18).” 하는 것을 내가 살면서 오늘도 주께 간구하는 것이었으니,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