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19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시 43:1
믿음으로 산다는 일은 억울한 일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 일을 만들지 않으려하나 더러는 악의적으로 또는 의도치 않게 당하게 된다. 이때 우리의 할 일은 기도다. 저보다 더 크신 이가 계심을 안다. 하여 오늘 주님은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19).” 곧 우리가 환난을 당하나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20).” 주가 함께 하심을 믿는다.
역으로 우리 또한 누구로 실족하게 할 수 있다. 특히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 숨은 감정은 도출되기 마련이어서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7).” 살면서 본의 아니게, 더러는 어쩔 수 없이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 없으나’ 그렇다 해도 ‘실족하게 하면 화가 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6).” 그만큼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이는 자신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곧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8).” 습관처럼 또는 대수롭지 않게 몸에 밴 손과 발이 나를 실족하게 하거나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9).” 곧 우리는 남에 대하여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하여도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 오늘의 나는 그 자체로 주께서 맡기신 몸과 마음으로 한 생을 사는 것이다. 이로써 이루어야 하는 주의 뜻이 있었으니,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4).”
하여 누군가 죄를 범할 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 곧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능이 있어,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19).” 마음을 합하여 한 뜻으로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기도하는 일, 그렇게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20).” 우리 안에 예수가 계신다.
오늘을 살면서 우리가 의지하게 되는 것은 사람일 테고, 그에 앞서 우선하는 일이 하나님만을 의뢰함이었다. 사람은 본디 이기적이어서 다툼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에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잠 22:10).” 거만함이 문제인데 거만함이란 자신이 잘난 줄 알고 남을 업신여김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 이것이 우리 믿는 자의 본분이겠다.
교회를 아래로 옮기는 데 있어 그 되는 과정이 놀랍기도 하다. 늘 그렇듯 교회는 주가 주도하신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하다못해 청소를 하고 있는데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쓰레받기를 가져다주며 두고 쓰라고 하셨다. 나는 아주 작은 사소한 일에서도 하나님의 간섭을 느낀다. 전에 인천으로 올 때도 이삿짐을 옮기는데 저들이 깨끗하고 멀쩡한 책상과 책장을 트럭에 싣고 와서 여태껏 잘 사용하고 있다. 늘 그때마다 돕는 손길을 두시고, 저를 위해 기도하게 하신다. 나의 예전의 가치관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상대에게 폐가 될까 하여 저를 경계하는 식이었으니, 값없는 호의는 의심부터 하였다. 그러나 목사가 되고 교회를 이루면서 비록 보잘것없으나 여러 손길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자주 본다. 우리가 합심한다는 것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그럼 이 세대는 어떠한가?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는 것은 당연하였다. 오히려 앙갚음이 풀릴 때까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8-9).” 이는 부르심을 받은 중생한 자들의 기본자세이겠다. 이와 같은 기본이 안 되는데 허황되게 저 천국을 꿈꾸고 사는 일은 어불성설이다. 더러는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주께 맡김으로 그와 같은 무게를 덜어낸다.
동생의 송사는 다시 또 한 차례 연기되었다. 재판부가 저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저쪽의 주장대로 판단하자니 증거가 없고 자신들 주장뿐인데 미심쩍을 뿐이어서, 자꾸 시간을 끌면서 판단을 지연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한 아이의 가벼운(?) 거짓말로 시작된 일이고(다시 필리핀으로 가지 싫어서), 그와 같은 거짓말에 거짓을 더해서 아이엄마는 엉뚱한 분풀이를 시작한 것으로 하다 보니 잘 하면 돈이 될 것도 같은 모양인지, 듣기로는 자신들도 빚을 끌어가 로펌을 사고 여러 명의 변호인단을 꾸린 모양이다. 여기서 느끼는 것은 화인 맞은 양심이다. 설마 자기 자식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오죽하니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힘에 부쳐 필리핀으로 보낸 것인데… 앞서 게임에 빠진 아이의 등짝을 때려 야단을 쳐서 아이는 자기엄마를 알코올중독에 상습폭력이라며 경찰에 신고까지 했었을까?
저들의 사생활이야 차치하고, 본디 거짓말이란, 하나의 작은 거짓이 거짓을 더하고 더해서,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 5:18).” 우린 누구나 거짓말의 속성을 잘 안다. 대수롭지 않게, 그럴 수도 있는 작은 거짓말 하나로 거짓이 거짓을 낳으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실 아닌 사실로 둔갑하는 것이다. 우습고 무서운 기억이 하나 있는데, 예전에 통신으로 동호회를 할 때이다. 누가 내 글을 읽고 댓글을 달면서 쪽지가 이어졌는데 후에 보니 모든 게 다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어이없지만 그 사람 성이 왕 씨라 그게 부끄러워서 이름을 속이면서 자신이 결혼한 아이엄마로 모 대학 서무과에서 일하는 사실조차 숨기면서 환상 속에 그려오던 이상적인 자기 자신으로 꾸민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우린 너무 쉽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산다. 더러는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 경계를 지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상대를 위한 ‘하얀 거짓말’이란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래놓고는 스스로 헐뜯기 일쑤다. 사람은 누구도 선하지 못하다. 선을 도모하는 일조차 선하지 않을 것은 그것으로 자부심을 가질 때 이미 스스로를 속이면서 거짓말은 시작된다. 동생 일로 나는 더욱 사람이 무섭다. 검찰이고 판사고 저들 또한 팔이 안쪽으로 굽는 것이고, 사건 초기의 경찰은 마치 대수롭지 않은 듯 옷깃만 스쳐도 폭력이라 하면 폭력이 된다는 식으로 회유했던 것을 마치 모든 것을 자백한 것처럼 꾸며 기소를 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우리의 환상은 서로에게 선을 바라는 일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 주님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명령하신다. 하다못해 자식을 키우면서도 어찌 실족하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부모로도 살아보니 이 또한 불가능하였다. 나름 한다고 했는데 자식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나는 희생이라고 해놓고 서운한 마음이 들어 억울하기까지 한 것이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하는 마음보다 무서운 폭력은 없다. 인류공영에 이바지 하는 일에서도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희생하고 살았는데?’ 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 더는 순수하지 못하다. 사람으로 사는 동안 무얼 바라지 않고 전적으로 희생한다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런 가운데 누구로 실족하게 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생기게 마련이다. 고의였든 아니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3-24).”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어찌하는 모든 노력이 헛됨을 인정할 때 주를 바란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5:33).” 곧 우리가 자식을 키우고 아내를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일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그 바탕이었다. 우리로 주를 사랑하게 하기까지 세상은 어떠한가를 알게 하신다. 동생과 통화를 하고 달리 대단한 위로는 할 수 없었고, 주만 바라자! 하는 말로 그게 전부였다. 그러므로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누군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일에 있어서도 ‘주님의 마음으로, 주를 사랑하는 것 같이’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3).”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건넨 쓰레받기 하나로 나는 주의 이름을 되뇌는 것이다. 이는,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시 91:11-12).
나는 이 놀라운 사실을 주와 가까이 하면 할수록 선명하게 본다. 더러는 측은지심으로든지 혹은 별 것 아니었을 수 있으나 그것이 무엇이든지 저들은 ‘하나님의 사자’로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 내 곁에 서서(행 27:23).” 항시 나를 돌보신다. 예전에는 다만 우연이었고, 어쩌다, 대수롭지 않은, 그저 그런 일로 치부하고 말았으나, 이 모두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그러므로 악한 날에 악을 통하여도 주의 일을 이루고 계신 것을 안다. 마치 바로를 들어 주의 백성들을 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셨던 것과 같이 악은 선을 위해 악의 역할을 한다. 이 또한 때가 되면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전 1:6).” 어디서 어떻게 소멸되고 그 대가를 치를 것을 믿는다.
교회를 옮기는 일로 번잡스럽다가도 예배를 생각하고 한 영혼의 상한 심령을 생각한다.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나는 다만 주신 상황에서 형편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충성할 뿐이다. 허리에 복대를 차고, 새벽 다섯 시 반에 아저씨 둘이 와서 같이 짐을 내리기로 했다. 이 또한 모든 게 돈이어서 낮에 하면 50, 늦은 밤이나 새벽에 하면 30으로 그리하였다. 또한 늘 보면 다들 참 뭐 그렇게 ‘손 없는 날’을 운운하는지, 앞서 서너 곳은 12월 중순까지 일이 꽉 차서 안 됐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서둘게 된 셈인데, 나야 늘 시늉만 할 뿐 주가 다 하심을 안다. 주가 하신다는 걸 체험하고 체험할수록 체념이 아닌 순응을 배운다. 늘 내가 아는 나는 이중적이어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그러니 어쩔 수 없는 나 자신도 주께 맡김으로,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오늘 베드로는 물었다.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불가능한 말씀을 하신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21-22).” 우리가 살면서 이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때에 주님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 결국은 용서인데, 이를 나는 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 다시 또 주 앞에 꿇리신다. 결국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3-14).” 부디 그럴 수 있는 권능도 주실 것을 믿으며. 여느 날보다 서둘러 나로 말씀 앞에 앉히는 이류도 그 때문이다. 마음은 복잡하고 생각은 여러 갈래이나,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43:1).
세상 법정, 다들 그 밥에 그 나물이다. 정의는 무슨! 서로들 알기 때문에 정의를 운운하면서도 학연 지연을 끌어가 돈으로 돈을 불린다. 우린 저들을 상대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저들또한 그 영혼이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일일 테니,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잠 20:9-10).” 오직 주를 바람으로,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27:4).
할 때에,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3, 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