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막 4:22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57:7-8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시고 참 많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일상의 소소한 가운데서 느낀다. 그때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환경과 상황을 조성하심으로 자연스럽다. 그러는 동안 나의 마음은 요동하고 나의 자세는 저 혼자 힘들어하기 일쑤다. 마치 말씀 가운데 계신 주가 말씀으로 오실 때에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으시는 것’과 같다. 이는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11-12).” 고로 우리는 보고 들음으로 깨닫는다.
친구 모친이 돌아가셨다. 생전에 늦은 밥상을 차려주고, 괜한 잔소리로 친밀하였던 일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가봐야 하는데, 싶은 마음으로 오전 내내 안달이 났다. 그럴수록 마음은 어려워서 앞서 달리는 두려움으로 배탈이 날 정도였다. 아무래도 힘들겠다 했더니 아내는 자신의 친분으로도 가보겠다 했고, 딸애가 같이 나서는가했더니 아들이 차를 가지고 같이 가게 되었다. 마음의 짐은 덜었으나 각자는 저마다의 기억들을 가지고 문상을 갔다. 자고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위로와 훈계가 같이 지나가는 하루였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우리의 마음을 밭으로 비유하신 데 놀란다. 말씀은 그대로 있을 수 없고 마음은 이를 받아 싹을 틔워 열매를 맺어야 한다. 마음에는 돌도 있고 가시덩굴도 있다. 혹은 오만 가지 생각이 드나들어 길가 같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친구는 남은 가족들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였고 나는 저에게 말씀으로 위로하였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 30:11).
산 자의 땅에서 죽은 자를 애도하는 일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모든 게 단절, 더는 없는 존재는 기억을 괴롭히고 마음을 산만하게 한다. 나는 괜한 마음으로 생각을 어지럽히지 않으려 했다. 안 되는 것에 대해 안달한다고 될 게 아니다. 그리 하나님께서 돌보심이 사뭇 귀하고 기이하였다.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14).”
물론 말씀은 성경이나 일상의 도도한 흐름은 이를 거스르지 못한다. 하여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15).”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탄이 냉큼 거둬내는 것이라, 그 마음의 완고함이 길가처럼 단단하여서다.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16-17).” 생각이 많다는 것은 개울가의 물처럼 그 마음이 얕아서 졸졸거리는 소리로 정신이 없다. 괜한 트집 같아서 말씀의 흐름을 거스른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18-19).” 이는 나의 병적인 마음이라, 저 혼자 들들 볶아대는 바람에 살 수가 없다. 누구에게 말을 한들 그 말이 되레 말 같지 않아 속상해지는 마음이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20).” 그러기까지 얼마나 무던히 돌을 파내고 가시덩굴을 거둬내며, 개간하고 다스려 정복하려 성실하였을까? 이에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21).” 곧 내가 나로 들볶이는 동안 마음은 고르게 일구어져 말씀을 들을 때 그 모든 말씀이 다 마음에 와 닿는다. 그리하여,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57:6).
세상이 그러하고 나의 현실이 한심하여서, 그것이 도리어 찬송이 되고 감사가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7-8).
잠들기 전 어려웠던 마음은 가시고 이른 새벽 평소처럼 눈을 뜨고 성전으로 달려오게 하심으로 감사하다. 마음은 가지가지라 저 혼자 들썽거리지만, 은혜란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가끔은 서너 명도 읽지 않는 이런 글(!)을 왜 이처럼 기를 쓰고 쓰려하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이것으로 내가 또 하루를 주의 은혜로 산다는 데서 충분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7-18).”
곧 나로 새벽을 깨우게 하시는 데는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었다. 무지함이 어찌 저들만 그러할까? 아차, 하는 순간에 예수께서 함께 타고 계신데도 제자들은 세파에 흔들리며 두려워 주를 찾는다.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36-37).” 우리가 예수를 모시고 산다고 해서 세상 모진 세파가 비껴가는 것은 아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왜 우린 좀 더 의연하지 못하고 태연할 수 없는 것일까?
근황을 아는 이가 통화를 하면 ‘애들은 좀 있어?’ 하고 먼저 묻는다. 그럴 때면 글방을 새로 낸 것인지 교회를 옮긴 것인지 마음이 술렁거린다. 어느새 두어 주간이 지나는 동안 문의도 없고 찾는 이도 없다. 나는 그저 말씀으로나 활동으로나 자유로운데 마음이 조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주께 맡긴다는 일, 주와 함께 한다는 일은 그저 막연하게 태평스러운 것은 아니다.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38).” 저들의 그와 같은 안달과 조바심은 인간적이다. 이에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39).” 주가 다스리심을 나는 나의 안달복달하는 마음 후에 놀라워하며 감사하게 된다. 그러므로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9-29).”
그러기까지 무던히 돌을 고르고 우후죽순 자라는 염려의 덩굴을 쳐내면서 하루도 쉬지 않는 농부의 발길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금세 마음은 저 혼자 서러워하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위로하심을 얻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
매일 매순간 하나님은 만나자고 그러신다. 나는 나의 연약함으로 주를 더욱 바라고 사랑하게 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는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주를 바라고 간절히 사모하는가 하는 데 따른 마음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오늘은 어디가 덜 아파서 감사하고, 그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으니 또한 감사하고… 누가 어렵게 말을 꺼냈을 때 이를 흘려듣지 못하게 하시려고, 상한 영혼이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곁에서 함께 주를 바랄 수 있게 하시려고, 그리하여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있는 그대로 나는 때로 염치도 없다. 누구의 비난이나 욕을 달게 받는다. 나라도 그리 말하고 생각하겠다. 굳이 변명하거나 설명하지 않는 것은, 그것으로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하나님과 씨름한다. 이게 뭐예요! 이러려고 그러셨어요? 하고 하나님께 화도 낸다. 그러는 동안 굳어졌던 마음은 갈리고 으스러져 돌덩이는 골라내고 나를 두르려는 가시덩굴을 거둬낸다. 날마다 되풀이 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 나로 하여금 듣고 배워 확실한 일에 거하게 하시려고,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더는 누가 뭐라 하든지, 어찌 생각하든지…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의 마음으로 볶일 때 나는 그것으로 주를 바라고 찾는 것이었으니,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렘 5:21).” 그게 나였음을, 잠깐 방심하면 또 금세 예전 마음으로나 생활로 돌아가려 하는 습성이어서… “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1-12).”
주만 바라자. 그러느라 손해도 좀 보고, 남들에게 멍청하다는 소릴 들어도, 누가 뭐라는 게 이제 문제는 아니다. 다만 나의 마음이 저 혼자 들썽거릴 때 행여 내가 마음에 이끌려 그 배에 같이 타고 계신 예수를 모른다고 할까 하여…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으로 아직 아니라 해도, 소망 가운데 이미 얻은 것으로 산다. 그러므로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하여,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57:1).
사는 날 동안에,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2-3).
그러할 때에 오히려,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6).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7, 10-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