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8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시 61:1-3
‘이미 상을 받았느니라.’ 하실 때, 나는 이 의미를 이중으로 생각한다. 하나는 이 땅에서 이미 자기 몫의 상을 받음으로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이 없는 것이다. 저는 남보다 좋은 건강과 평안과 누릴 수 있는 복락을 누리며 살았다. 그런데 사는 동안 나름 주를 믿는다고 당하는 어려움과 뜻하지 않은 고통으로 힘에 겨워, 이 땅에서는 모두 잃었으나 장차 누릴 저 하늘나라에다 그가 받을 영원한 상을 쌓는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요이 1:8).”
그러므로 바울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그러면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하고 저는 감옥에 갇혀 복음이 아니었으면 당하지 않아도 될 고통 중에 이를 달갑게 여겼다.
하여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곧 누가 알아주는 이 없고, 스스로도 더러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중에서도 주를 의지하며 모든 것을 잃기도 하는 것이니,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6-38).” 저들이 당하였을 고난이 오늘에도 여전하다.
주의 일만 아니었더라면… 목사가 아니었더라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게 아니었더라면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고난을 감내하면서도 묵묵히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가까이는 나의 동생을 두고 생각하고, 또한 친구의 장인 되시는 어느 장로님을 생각한다. 억울하고 억척스런 모함으로 송사에 휘말리면서 몇 년째 시달림을 당하는가 하면, 가진 모든 재산으로 주의 종들을 섬기며 상한 영혼들을 치유하려는 마을을 형성하려다 결국은 파국을 맞이하는…. 이 땅에서 우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하신 이가 예수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러는가 하면 오늘 예수 앞에 나온 사람들은 가난을 모면하고 자신들의 병듦을 낫고자 하여, 또는 호기심으로 하늘의 표적을 구하면서 나온다. 그때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막 8:12).” 한데 이후에도 여러 표적을 주셨으니, 실제 우리의 표적은 이 땅에서의 평화만이 아니었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사 40:27).” 아직 우리의 가야 할 길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누구와 대화하다 어떤 이의 어려운 소식을 들을 때, 저가 겪는 일이 주로 인한 것이면 격려하고 함께 주를 찬송한다. 혹은 어떤 이의 기쁜 소식을 들을 때면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어떤 두려움이 먼저 앞서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난 중에 더욱 주의 뜻을 헤아려 안다. 좋은 소식 뒤에 따르는 저가 주를 멀리한다는 말에서 나는 자주 한탄한다. 이 땅에서의 좋은 일을 바르게 감당하는 일이 그만큼 더 어려운 까닭이다. 누가 어렵게 학위를 따고 교수가 되어 기뻐하였다. 그러느라 아이 둘을 키우며 크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찬송할 수 있었다. 한데 박사가 되고 종종 저의 소식을 들을 때, 이러려고 그렇듯 학위를 땄나? 하고 저는 감사보다 어려움을 호소한다. 그러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시 33:13-14).
우리는 너무 쉽게 하나님의 능력을 망각한다. 망각은 착각이라 주를 멀리하기 일쑤다. 어려울 때 상대적으로 주를 바라던 이가 정작 일이 풀리면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누리며 사느라 여념이 없다. 오늘 제자들은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하고 능력의 주를 순간 잊었다(4). 이에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 2:7).” 즉 ‘물고기 배 속’ 같은 고난의 때에야 비로소 다시 사명을 상기하는 주의 은혜에 대하여,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8:2).
하여,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비록 오늘의 현실이 ‘~하는 자 같으나’ 비로소 우리는 참된다. 안 믿는 자에게는 이를 어찌 설명하여 이해시킬 재간이 없다. 저들은 혀를 끌끌, 차며 그래서 자신들은 예수 믿는 자들을 싫어한다고 공공연하게 떠벌인다. 겉으로 보이는 이 땅에서의 성공과 실패로는 증명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눅 8:17).” 그런 가운데서도 감사하고 사랑하고 찬송하는 사람들…. 이들을 세상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나!
누구의 어려운 처지와 안타까운 사정을 들을 때면 도리어 크게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후 7:9).”
예수 앞에 수 천 명의 굶주림은 주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으니,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6-8).” 정작 그 일, 굶주림을 달래는 게 목적이 아니었음에도,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11).” 우리 또한 그렇듯 표적만을 구하고 사는 것은 아닐까? 공공연하게 기적을 바라고, 수백 수천 명이 모여 몇 년 사이에 대형교회로 성장하면 이를 축복하며 감사하는 일이 실제가 아닌가?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외형적인 것으로 감복하려 할 때,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12-13).”
우리 곁에서 예수를 떠나시게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누구의 어떤 어려운 소식을 두고 주 앞에서 같이 간절하여진다. 그러면서도 확신하는 것은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 32:27).” 하시는,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능력으로도 오늘의 어려움은 허락하심에 의한 것으로 우리가 장차 누릴, 이미 받은 족함으로 족하였다. 이에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하였던 바울과 같이.
예수님도 십자가를 참으사 인내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 1:8-9).” 주를 모시고 사는 삶이란 이 땅에서의 어떤 상황 속에서든지 동일하였다. 작은 은혜, 큰 은혜란 없다. 그 기준을 이 땅에서의 시선과 논리로 가늠한다면 자칫 ‘이미 상을 받았다’는 말씀이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어느 훗날 주 앞에 섰을 때, 마치 뒤늦은 에서에게 이삭은 더 이상 남은 축복이 없다고 한 것처럼 더는 받을 상이 없다면…? 그리하여 오늘의 만족과 그 누림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하면,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0-21).”
이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50:23).
여기서 은혜란 모자람이 없고 과분하여 넘침도 없다. 은혜는 늘 오늘의 것으로 날마다 필요한 들숨과 날숨이 된다. 지나쳐도 안 되고, 모자람도 없어야 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출 23:25-26).” 우리의 지나침이란 자칫 얻은 것으로 남과 비교하여 스스로 흡족해하는 것이고, 모자람이란 스스로 한 일에 비해 소득이 적다고 억울해하는 마음일 테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주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오늘의 어떤 현상으로가 아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아, 이 놀라운 말씀, 위의 것을 생각한다는 날들 앞에서 나는 부복한다. 그 어떤 토를 달 수도 없다. 항상 이만하면 됐다. 감사함으로 여긴다. 그랬으면 좋겠다. 몸의 통증이 적당하여서 감사하고, 이처럼 또한 주 앞에 앉히심으로 오늘도 감사하고, 누구의 어떤 어려운 사정을 두고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르며 울컥, 눈물 지을 수 있어 감사하고… 나에게 감사는 만병통치약이다. 감사가 안 나오는데도 감사하다. 억지로도, 뻔뻔하게도, 감사하다. 하는 게 없어 송구할 때도, 염치없어도 감사하다. 하나님은 죽어도 감사하겠다는 자를 사랑하신다. 그리 믿고 감사할 뿐이다.
감사하고 감사함으로, 욕하면서도 감사할 때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누구 말처럼 광신도가 다 됐다느니, 유별나게 목사 티를 낸다느니, 예수쟁이라느니 하는 조롱을 당할 수 있어서도 감사하다. 목사 같지 않단 소리에도 감사하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감사한다. 그런 가운데 나는 오직 말씀으로만 감사하기를 기도하고 또 바란다. 할 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면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고 서슴지 않고 대답하며 살 수 있기를(막 8:29). 그리하여,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5).”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61:1-3).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 되게 하심도 감사하여,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