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전봉석 2023. 12. 12. 04:02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시 63:3-4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 귀하다는 것과 그리하여 일생에 주를 송축하고 손을 들리라는 고백이 새삼 크게 다가온다. 성탄절이 다가오면서 교회를 비롯하여 거리마다 화려한 조명과 눈에 띄는 장식으로 한껏 멋을 부렸다. 그러나 가만히 묵상하면 가장 슬프고 송구하고 부끄러운 날이지 않을까? 우리의 죄로 가장 낮고 천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야 했던 예수의 탄생은 그렇듯 마냥 흥겨운 날이 아니다. 오히려 부활절을 이처럼 기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비로소 구원을 완성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주를 찬미하는 날이니까 말이다.

 

오늘 주님은 세례를 받으시던 유대 지경 요단 건너편 베레아를 지나시고 계신다. 그리고 ‘전례대로’ 가르치신다. 하나님이신 예수는 이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길이다. 그런 중에도 복음을 전하시며 낮은 우릴 섬기신다. 오로지 한 길, 그 가야할 길을 가시는 데 있어 예외가 없다. 어떤 이가 일러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마 8:21).” 하고 구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22).”

 

다소 생경할 정도로 냉정하시다. 어쩌면 우린 너무 자주 혹은 가벼이 예외를 둔다. 그것들이 허용되는 만큼 미뤄지고 비워지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나중이 된다. 그러나 바울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항상 힘써 예외를 두지 않기를 가르친다. 이를 반복하고 지켜 신앙은 연마되고 훈련되어야 마땅하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6-9).”

 

말씀을 바라고 전하고, 이를 사는 일은 숨을 쉬는 일처럼 하는 줄도 모르게 몸에 익어야 한다. 아무리 여러 예외적인 일들이 빈번하게 우리를 위협한다 해도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4-15).” 이에 항상 시험의 대상은 우리 자신이다. 한데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막 10:2).” 저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시험하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우리의 같잖은 믿음이 더러는 하나님을 시험하려 든다. 여러 예외적인 상황을 허용함으로 스스로에게 ‘그럴 수 있는 범위’를 넓히려 든다. 다들 그러니까, 남들처럼 우린 또 성탄을 흥겨워하며 휘황찬란하게 꾸민다. 지나는 길에 어느 큰 교회의 외곽을 두른 화려한 불빛과 커다란 트리를 보며 마음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던 것도 실은 이와 같은 행사가 이교도적인 전례에서 유래된 것을 알고부터이다. 당시에도 대중적이고 사람들이 모두 기념하는 이교도의 행사 일에 덧붙여 예수의 출생일을 기념하였다. 정확한 연도와 일시를 알 수 없자 사람들이 모두가 기념하는 그날로 하여 크리스마스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배워 확실한 일에 거해야 한다 하심은 그것으로 너무 쉽게 시험에 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안 믿는 자들이 더 흥청망청 즐거워하는 날에 덩달아서 이를 기념하는 일이었으니,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메마른 땅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그들이 그들의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여

그들의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시 78:17-19).

 

그저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 받아넘기는 일이 의외로 흔하다. 그러나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우리 스스로 자처하는 일을 두고 이처럼 허투루 인정하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내가 내게 되묻듯 자주 돌이켜 점검해야 할 일이어서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8-29).” 주님의 탄생도 삼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어느 순간부터 여느 이벤트데이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 꾸미고 즐기느라 정작 그날의 의미는 퇴색되었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마 23:17).” 누구와 성탄절을 운운하다 정작 그 의미는 퇴색된 듯하여 여러 말을 보태다보니 새삼 우리 자신이 얼마나 가벼이 이 날을 즐기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그 모든 날의 흔적을 없이하신 데는 이유가 있다. 하다못해 예수의 옷자락을 발견했다 해도 그것을 기념하고 우상화하여 성물로 취급하는 사례가 흔하다. 곧 우린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여 정작 귀히 섬겨야 할 것은 소홀히 한다. 가령 어린아이가 오는 것을 금하고, 가련한 이가 소리쳐 주를 부르는 데서 거슬린다. 그때에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4).” 하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15-16).”

 

곧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덧붙이기보다 있는 그대로, 주신 말씀 그대로 무던하게 혹은 단순하게 받들어 섬기는 일…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살전 4:3-6).” 한데 세상과 다를 바 없이 흥청망청 아무 거리낌 없이 좋아라하는 날에 대하여 나는 조심스러운 것이다. 옳고 그름을 따져 이를 없이 하고자 함이 아니라,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70:2, 119:81).

 

어느 날을 기념하는 일에서도 혹은 즐거워할 때 자칫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하시는 말씀 앞에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나는 가만히 말씀 앞에 앉는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묻는 이를 생각한다(막 10:17). 저는 계명을 지켰으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20).” 정작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실 때에 저는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21, 22).” 정작 가진 게 많을 때 자신의 것을 내어드리기가 쉽지 않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23).”

 

내가 가지고 소유한 것으로 나를 붙드는 셈이었으니,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4-25).”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이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의당 들어갈 줄로 아는 그 마땅함이 우리를 붙잡아둔 것을 알지 못한다. 값싼 은혜의 시대를 살면서 너무 흥청거리며 예수를 믿는다. 저마다 그러려니 하고 허용하며 한 번쯤 그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그렇게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어느 쪽을 더 선호하며 예수를 믿는 것일까? 안 다니고 안 믿는 사람들이야 훗날 주의 권능 아래 있겠으나 우리는 너무 쉽게 구원을 얻었다고 여기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제부턴가 성탄절이 되면 나는 더 마음이 어렵고 숙연하여진다. 영생을 사모하며 산다는 일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7-38).”

 

어제는 그렇듯 친구와의 대화에서 우연히 성탄절의 의미를 되새기다 생각이 많아졌다. 혼자 있으면서 여러 생각이 난무하다. 그러는 중에 오롯이 말씀으로만 온전하기를. 전통이나 문화로 말씀을 흐리지 않게 하시기를. 곧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8).” 자칫 말씀의 속뜻은 잃어버리고 겉치레로만 치우치지 않을까 하여…. 우리가 얻은 은혜가 너무 크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상대적으로 그리하여 소홀히 여길 때가 많다.

 

그러나 말씀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3-6).”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7).”

 

나는 할 수 없어 가만히 주를 바랄 때,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30).” 이와 같은 준엄한 사실을 우린 너무 축소하고 사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31).” 그리 말씀하신 후에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33-34).” 이것이 성탄의 의미다. 그 목적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화려한 조명을 밝히고 손에 가득 선물을 들고 거리를 휘저으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이기만 한 것일까?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2).” 이에,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들이 나를 돕게 하소서

(119:174).

 

말씀으로 신중하되 무겁지 않고, 주의 사랑으로 기뻐하되 가볍지 않으며,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계 2:25-27).” 그러므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이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63:1).

 

그리하여,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3-4).

 

일찌감치 주 앞에 올라와 주의 말씀 앞에서,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5-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