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전봉석 2023. 12. 30. 05:26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눅 12:32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시 81:8

 

 

사람을 의식하면서 하나님을 저버리게 된다. 교회를 섬기는 데 있어서도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가 무엇을 위한 섬김인가 싶을 때가 있다. 오늘 주님의 첫 마디는 그러하시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1).” 우선은 많은 사람이 모였다. 보는 눈이 요즘은 돈이다. ‘아픈 아이’도 개인채널을 하며 회원 수가 몇이고 조회 수가 얼마인가를 따진다. 이와 같은 개인 블러그는 회원 수와 조회 수로 평가되어 떠돌듯 ‘좋아요’를 누르고 형식적인 댓글을 남겨 ‘자신의 방’을 홍보하고 다닌다. 개인적으로 댓글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다.

 

사람이 사람을 의식하는 거야 당연한 예의라 할 수 있으나 그것이 수익으로 이어지면서 정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게 되었다. 특히 종교 지도자로 사람의 이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 대하여 예수님은 ‘누룩’이라 표현하고 계신다. 누룩의 성질과 같이 한 사람의 영향력이 온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소린데,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 5:9).” 그러므로 누구의 어떤 일에 대해 조심해야 하는데, 성경은 이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그런 의미에서도 나는 누구의 주목 받는 생이기를 주저한다. 이는 영원히 감출 수 없는 일이어서,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 12:2-3).”

 

왜 예수님은 이와 같이 주의와 경계를 당부하셨을까? 이를 지혜서로 읽으면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어떠하든지 그 뒤에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과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사 29:15-16).”

 

엊그제 친구와의 대화에서도 가장 우리의 기본은 하나님과 우리의 존재 자체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주는 전능자이심을 우리로서는 그 한계도 무궁함도 짐작할 수가 없어서이다. 그런데 마치 내가 알아야 하고, 납득이 가야 하는 존재로 여겨 말씀도 주의 섭리도 이에 부합하지 않으면 거절하게 된다. 결국 나는 우리의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얼마나 귀한가를 역설하였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위력을 인정하는 일로 우리가 주를 경외함은 주의 전능하심을 인정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스스로 자유의지를 운운하며 자신을 세우려할 때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하심을 인정하기 어렵다. 하여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12:5).” 하신 후에 하나님의 편만하심을,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6-7).” 이처럼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까지도 모두 관여하심을 일깨우셨다. 하여 시인들은,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시 17:8-9, 121:5-6).

 

하는 찬송으로 주를 인정하였다. 자칫 우리 신앙은 두더지 같아서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구주로 인정하나 사람들 앞에서는 주춤거리며 이를 꺼려하다 숨기기도 한다. 오늘 주님은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8-9).” 우리 삶에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살핀다. 바울은 우리로 ‘그리스도의 향기’요, ‘그리스도의 편지’라 이르며 어디서든지 감출 수 없는 냄새 같고, 누구에게든지 읽혀지는 편지 같은 삶으로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를 예수님은 빛과 소금으로 설명하시며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3-15).” 곧 우리로서는 표가 나야 정상이다. 이는 또한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5).”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이를 드러내며 산다는 일은 쉽지 않다.

 

이에 우리가 성령으로 산다는 삶이 된다. 염려는 수시로 드나드는 바람 같아서 어찌 막을 수는 없는 일이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그때 우리를 붙들고 잡고 계실 이가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그러할 때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염려나 박해를 견디고 이겨낼 수 있고, 내가 누구인지를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찾을 수 있었다.

 

사실 염려나 근심은 습관과 같다.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22).”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하시면서 “까마귀를 생각하라.” 하고 빗대어 저는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23, 24).” 그뿐인가?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서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되물으신다. 우리가 어떤 일을 두고 씨름할 때,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26).” 염려가 항상 우리 발목을 잡는 셈이었으니….

 

결국은 그와 같은 염려로 자신을 더욱 자신 안에 가두고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설마, 했던 이가 우울증과 불안으로 고통당하고 있다. 누구라도 그럴 수 있는데 오늘 말씀은 그리하여 소망이 있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27).” 그러시면서 이 하찮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28).” 하시며 우리의 염려를 꾸짖으신다.

 

이미 다 아시는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30).” 그러므로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1).” 곧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살면서 우리가 주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산다는 일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이며 특혜인지, 베드로는 한 발 더 나아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이는 언제든지 우릴 대적하는 마귀를 상대하는 일이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8-9).”

 

사실 친구나 누구와 신앙을 가지고 대화를 하고 나면 그 여운이 오래도록 간다. 한 말을 곱씹게 되고 저가 가지고 있던 문제나 생각이나 주장을 마음에 두고 기도하게 된다. 나의 영적인 소화능력이 부족하여서인지, 늘 하는 말처럼 감정이입이 과잉으로 이뤄져서 그런지 한 번 누구와의 깊은 대화 후에는 하루 이틀 이를 다시 꺼내어 복귀하느라 곱씹고는 한다. 그 진지함이 깊을수록 그와 같은 생각의 여운도 오래 간다. 염려와는 다른 차원의 재생이다. 그럴 때면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32).” 하는 오늘 주님의 말씀으로 나의 고질적인 생각하기를 그리 이해한다. 그러할 때에 지혜는 일러,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그러므로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2-23).”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다들 천국 가길 바란다면서도 정작은 하나님의 나라는 꺼려한다. 오늘 주님은 이르시기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32).” 이 놀랍고도 아이러니한! 왜 나 같은 죄인을 그처럼 사랑하신 것도 모자라서 그 모든 것을 주시는 데 기뻐하시는 것일까? 문장 서두에 붙은 ‘적은 무리여’ 하심을 주목하게 된다. 모두를 청한다고 해서 전부가 응하는 게 아니었다. 이에 ‘남은 자’ 곧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사 10:21).” 이는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22).” 나머지 대다수는 파멸이 작정되었다.

 

친구의 어려워하던 부분도 ‘예정’과 ‘선택’의 문제였다. 스스로의 선택을 우선하고자 하는 것이야 사람으로 어쩌면 당연한 욕구에 가까운 것이겠으니, 예정하심에 대하여 이를 받아들이는 게 마치 자신의 주권을 빼앗기는 것처럼 여겨져서인지… 한참을 설명하다 이는 성령으로밖에 이해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은 결코 악인이라고 멸망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여 그토록 참고 또 기다리시며 잡아주시려는 것인데,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지는 여러 이유와 사정이 ‘다 일치하였다(눅 14:18).’ 이에,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그러나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 이를 어찌하겠나? 별 수 없는 노릇이다! 하여 오늘 주님은 많은 사람을 앞에 두시고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하신다. 그리고 이르시기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우리가 비록 나중된 자라 해도 먼저 되는 것은 이 은혜가 우리로 더욱 주를 사모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34).”

 

그러니 저마다의 열심으로 산다. 이를 오늘 주님은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하시며 우리의 소망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하여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이르신다(33, 35). 결국은 그게 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34).” 이 놀라운 그러나 분명하고 사실적인… 이것으로 누구는 스스로 못 견디며 목숨을 끊었고, 누구는 죽지 못해 살면서도 손에 잡은 것이 없고, 사는 게 지옥 같은 나날들을 살아간다.

 

오늘 이 한 날의 하루가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44).” 하심의 그 날로 우리가 바로 안다면,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그렇게 하여 나는 친구에게 교회에서 하는 제자훈련을 다음에 한다고 해서 다음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일렀다. 우리의 가장 고질적인 회피는 ‘다음에’ 또는 ‘나중에’ 또는 ‘내가 알아서 할게.’ 하는 따위의 습관적인 말로 우리를 옭아맨다. 하여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8).”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러나 안도하고 비로소 감사함으로,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81:1).

 

왜냐하면,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셀라)

(6-7).

 

우리는 이 놀라운 은혜의 사실을 산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 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9).

 

부디,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또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

(13, 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