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눅 19:3-4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시 88:9
저마다 자신의 곤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때의 곤란이 복이다. 차지도 덥지도 않게 미지근한 신앙으로 주를 믿는다고 하는 자의 경우는 적당하여서다. 일곱 교회들 가운데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실 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 하시고,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16).” 하고 엄히 경고하신다.
저들이 미지근하였던 이유는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는 스스로의 적당함으로였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여 자신의 처지와 그 상황을 바로 알지 못하였다(17). 이어 성령의 권고는 어렵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18).” 연단을 사라 하신다. 흰 옷을 사서 입으라고도 하신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세상과 같이 멸망하느니 차라리 죽이심으로 살리신다고 하였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오후께 전화가 와서 고등학생인 딸아이 지능이 63이 나오고, 연령수준은 10살로 보인다고 하였다. 문제는 아이엄마로 저가 더 심한데(그 정도에 대해서는 내가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나) 문제는 자신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 됨을 인정하는 데서 거듭남의 실천은 발동한다. 삭개오는 세리였고, 키가 작았고, 사람들로 막힌 가운데서 예수를 가까이서 보고자하여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3-4).” 이는 남을 의식하고 체면을 생각해야 하는 세리장으로서는 대단한 용기다.
연단을 사고, 흰 옷을 사라 하심은 ‘사서 고생’이란 말처럼 의식적으로 그리 행함이다. 스스로 부요하다 여기며 적당할 때에 누구의 말도 그 귀에 들리지 않는다. 스스로를 인정할 수 없다. 본문의 삭개오는 돈으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는 자였다. 자책을 무마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세리는 ‘허가 받은 도둑’이라 하여 당시 로마의 힘을 등에 입고 세금을 징수하던 자였다. 그것으로 자신의 재산을 불리면서 말이다.
그의 일과 달리 삭개오란 뜻은 ‘깨끗한 사람’을 의미한다. ‘의로운 사람’이란 뜻도 내포한다. 하는 일은 그러하나 그는 늘 양심에 꺼렸던 것 같다. 예수께서 자기 집에 머무실 때에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8).”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저가 스스로 그리 ‘사서’ 직고하며 약속한다. 그동안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은 늘 이르시길,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5:16).”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 우릴 일깨운다. 이에,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시 62:10).
한데 오늘을 살면서 우리도 아는 바와 같이 가진 것으로 그 사람이 어찌 다른가 알 수 있다. 없을 땐 억척스럽고 있으면 음흉하다. 우리는 늘 인색하여서 오늘에 허락하신 것을 두고 감사하지 않는다. 그러할 때 어떤 콤플렉스가 그 영혼을 짓누르며 거짓을 꾸미게 한다. 스스로 인정하기까지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누구의 그러한 사연을 들으며 속수무책이라, 자신이 인정하기까지 저의 문제는 더욱 더 곪을 것이다. 늘 약 때문에도, 우울감 때문에도 누구를 가까이 하기 어려운 처지라, 나로서는 그러한 사연을 듣기만 할 뿐 더는 나설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아이에게 권하였던 글쓰기나 화상으로나마 접촉도 묘연하다. 특히 아이엄마가 스스로를 멀쩡하다, 괜찮다, 하는 상황에서는 어찌 더 할 수 있는 방도가 없다. 거리가 멀다 하나 다른 방법도 있을 텐데 문제는 스스로가 인정하는 일이다. 이는 예수 앞에서의 삭개오와 같이 성령으로 우리의 자발적인 의지로 이루어진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는 데야 저를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좋냐? 하고 묻는 친구에게 ‘네게 맡기신 영혼’으로 받고 주의 마음으로 다가가기를 기도하였다. 우리 마음으로는 가당치 않다. 남의 일이고, 무엇보다 별로 관여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주의 사랑으로 대한다하면 그것부터 깨고 가까이 갈 필요가 있다. 그리 말해주었다. 특히 아이의 경우 20대를 전후하여 ‘그 병’이 오기 쉬운데, 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저들의 사연을 듣고 뭐라 이를 뿐이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우리의 이와 같은 곤고함이 우리로 주의 도우심을 바라게 한다. 앞서 교회처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이는 모든 도우심을 거절한다. 자신을 긍휼히 여김을 받기를 거부한다. 자신을 인정하지 못할 때 죄를 회개할 수 없고, 죄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면 은혜를 간절히 바랄 필요도 알지 못한다. 아,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고 통탄해하는 성경의 한숨이 들리는 것 같다(계 3:17).
친구와 통화하고 누구 이야기를 듣고 저녁에 돌아와 가정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요즘 함께 나누는 본문의 말씀이 맞춤하니 지금의 현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9).” 하시며 주는 기다리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20).” 어쩌면 나의 일의 팔 할은 기다림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와 그 엄마의 사연을 듣고 서로 마음 쓰고 있는 게 반 년 가까이 되었다.
앞서 동기내외의 가정사나 저들 각자의 사역을 두고 마음을 어렵게 한 지는 2년이 넘었다. 더는 나서거나 강권할 수 없는 지점에서 나는 마치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는 사람이다. 한데 우리 주님이 문 밖에 서서 기다리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곧 ‘열면’과 ‘사서’의 공통된 의미는 의식적으로 그리 인정하고 참여하기를 말한다. 그러할 때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하시며 주는 포기하지 않으심으로 오늘도 새로운 날을 우리 앞에 두셨다.
이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 그 어떤 수치나 부끄러움을 그리 여기지 않는다. 이는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b).” 설마 누가 그 곤고를 기뻐할 수야 있겠나? 그럼에도 그럴 수 있는 것은 그것으로 주께 의지하고 주의 도우심을 바랄 수 있어서이다.
삭개오가 인정하는 것, 세리나 창녀가 주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 죄 없다 하는 이의 당당함보다 귀하다. 우리가 주 앞에 설 때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용기가 돕는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백날 얘기해봐야 소용없는 것들에 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림이다.
내가 곁길로 나가 어그러져 있을 때 내 곁의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했고, 문 밖에 서서 나의 주님이 그리 참고 또 기다리셨다. 그때는 그 일이 참 성가시고 별난 것 같았는데 오늘에 이르러 나의 일의 팔 할이 기다리는 일이 되었다니! ‘문신한 아이’의 새해 인사와 함께 곧 한 번 찾아오겠다는 말에 나는 주일을 권하고, 예배를 청한다. 저가 듣기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두드린다. 이는,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1-13).”
그러면서도 우리가 주를 바라는 한 가지 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저들이 거절하고 때론 으레 그러려니 하고 무시하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 날 위해 그러고 또 그러면서 내 곁을 지켰던 것처럼 이제 나도 그리한다. 조심스레 아이의 이름을 저장하고 생각날 때마다 주 앞에서 부른다. 이는 내가 어릴 때 우연히 목격한 소경 장로들의 기도모임에서 불려지던 나의 이름 석 자가 각인되어 뚜렷해서다. 나는 늘 사랑에 빚진 자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하여 내가 누구를 생각함은 이처럼 드러낼 것도 아닌 지극히 작은 일이나 어느 가까운 날에 저는 은혜 가운데 알 수 있을 것이다. 더러는 이제 내가 그때의 날 위해 기도하던 이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산다 해도 그때의 저들이 내 곁에서 실존하였던 것과 같이 저들의 기다림으로 불려지던 나의 이름이 오늘 이렇게 주 앞에 나를 세우게 하였다는 사실을 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19:5).”
지금은 전혀 가망이 없을 것 같아서, 친구는 퉁명스럽게 ‘그래 봐야 소용없어!’ 하고 말하였을 때 우리가 끝까지 그의 이름을 불러줄 때 주가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말해주었다. 마치 오늘 친구의 전혀 다른 모습처럼…. 어디냐? 하고 묻자, 금요예배 가려고 교회 앞에서 아내랑 저녁 먹는다는 말에 나는 내심 놀랍고 감사하였다. 그야말로 금요일 저녁, 퇴근 후 아내와 금요예배를 앞두고 교회 앞에서 식사 중이라니! 어찌 설명할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 안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언젠가 저는 그리 권하는 나를 두고 가소로워했다. 이제 저도 드러나고 있는 자신의 사랑의 빚을 알 것이다. 본인도 그러는 자신이 놀라운 모양이다. 나는 은혜 많이 받으라고 인사하고 끊었다. 주님의 사랑은 날로 풍성하여진다. 이런 대화가 자연스러워졌다. 마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그러니 오늘 우리가 어느 가정을 두고 저 두 모녀를 위해 염려함은 하나님으로 인한 근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그러니 외면할 일이 아닌 것은,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11).”
다시 말해 늘 자기 문제로 허덕이며 남을 위한 기도나 관심이나 어떤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 자로 사는 일이다. 믿음이란 그러해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이게 머리로는 이해가 안 돼도 이상하게 그리 마음이 가고, 거기 머물며 저를 기다리게 한다. 이는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겔 34:16).” 하나님의 강한 의지다.
분명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2-13).”
이와 같은 증거다. 하여,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88:1-2).
우리로 주께 기도하게 하시려고,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8-9).
현실은 부정적인 것 같으나 이것으로 복이었다. 그리하여,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