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눅 22:44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시 91:14-15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는 이가 또한 그것으로 주를 바라게 하신다. 주께 생명이 있음을 알고 우린 주 앞에 엎드린다. 예수께서도 그러하셨듯이 모든 사역은 말씀을 성취하는 데 있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눅 22:22).” 모든 게 다 때가 있고 우린 그 때를 위하여 예비되었다. 우리 안에 주를 믿게 하시고 이를 따라 살게 하심이 기이하다.
제자훈련을 다음으로 미루었다던 친구는 우리의 만남 이후 순종하여 이를 따랐다. 이른 아침 출근길에 전화를 하였는데 새벽예배를 다녀오는 길이라고 하였다. 나는 저의 변화에 놀라고 그와 같은 순종으로 더욱 사모하게 하시는 마음 앞에 내가 오히려 은혜를 입는다. 우리 믿는 자는 우연을 필연으로 여겨 주가 이루시는 역사임을 인정한다. 저들 곁에 두시는 두 모녀와 그 이야기로 같이 주 앞에 아뢰게 되는 마음이 새롭다. 친구는 왜 자신은 중보가 어려운지 물었고 나는 이미 그와 같은 갈급함이 성령으로 인한 것임을 설명하였다. 우리에겐 ‘남의 이야기’가 없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살면서 주를 의지한다는 것은 주께 아뢰고 그의 뜻을 따라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도 누구는 주를 팔고 누구는 주를 모른다고 부인한다. 그저 우연으로 여겨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면 그 정도일 뿐이나 이를 주의 뜻으로 되새기면 의미는 새롭다. 단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게 맡기신 한 영혼’으로 받아들일 때 전혀 새로운 국면이 열린다. 나는 이를 복이라 했다.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가는 사람이면 십중팔구 그리 여겨 사사로이 대할 게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기도가 안 나온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 됨을 뼈저리게 인정하지 못해서이고, 내 곁에 두시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어서이다.
그럼에도 결국 제자훈련에 참여하기로 하고 그에 따른 실천의 하나로 월요일 아침 새벽예배를 다녀와서 출근길에 오른다는 데서 나는 놀랐다.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것이 주가 행하심이라,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단지 우리가 바라는 게 이 땅에서의 형통함이라면 굳이 그 대상은 유일신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우리가 하는 일은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큰 일이 된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우리가 누구를 마음에 두고 이를 주께 아뢰며 주의 도우심을 바랄 수 있는 것.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크고 작은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니어서 두신 그 자리에서 맡기신 한 영혼으로 씨름하는 일.
내 일도 아니고 나와 상관도 없는 이를 두고 주 앞에 고하고 바라게 되는 일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다만 의지적으로 자신을 내어드린 것일 뿐 모든 일은 주가 하신다. 눈을 뜨면 이처럼 주 앞에 먼저 나아오는 일, 한파로 추위가 극성인데 출근 전에 새벽예배로 나가는 발걸음, 이와 같은 의지까지도 주가 더하시는 은혜로 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렘 12:3).”
우리가 주를 인정한다는 것, 더러는 내가 원치 않는 일을 두고서도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 6:10).” 곧 우리 곁에 두심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심으로, 저로 인하여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었다. 누굴 위해 기도하는 게 잘 안 된다는 말에 나는 그것이 자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자꾸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이는, 그러는 자신도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두고 주께 아뢰게 되는 일.
얼마 전 교통사고로 머리를 심하게 다쳤고, 이를 곁에서 돌보는 가족들도 힘에 겨워한다며 기도를 부탁하는 내용의 글을 받았다. 어째서 우리에게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으로 주를 찾고 아뢸 수 있는 게 복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늘 어떤 일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은 주가 저를 급히 찾으심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주를 바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 저는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고 ‘돈을 받기로 약속하였다.’ 3년 반 동안 함께 하였던 예수를 유다는 팔려고 한다.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눅 22:4-6).” 어쩌다 저의 마음에 이와 같이 사탄이 들어가게 된 것일까? 저의 열심이 저로 삼켰다. 나름의 확신과 소신으로 예수를 따랐다. 열심당원으로 새로운 변화를 꾀했다. 그러는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지킬 유월절을 준비하게 하신다.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13).”
어떠하든지 “때가 이르매” 일은 이루어진다. 성경은 우리로 이를 알게 하신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그러므로 오늘을 무던함으로 지키며 사는 일,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 눈으로 보이는 것을 머리로 아는 데서 가슴으로 느끼기까지, 가슴으로 느끼던 것을 몸으로 행하기까지 저마다 그 시기는 다르겠으나 주가 이루신다.
친구 내외는 저들 모녀와 함께 인천을 한 번 다녀가기로 했다. 내가 무얼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주가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하는 데 주목하기 위해서이다. 설마 내가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서이겠나? 다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것은 머리로만 되는 게 아니다. 생각이야 누군들 못할까? 이를 가슴으로 가져다 느끼며 그와 같은 느낌으로 자신도 어찌 감당이 안 되는 것을 행함으로 삶에 드러내는 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는 어떤 조건에 따른 결과가 아니었다. 아직 죄 가운데 있을 때부터 주는 일하시고 계셨다.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아는 친구여서 더러는 예전의 일로 서로가 부끄러울 따름이나 또한 그와 같은 부끄러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이었으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주가 행하시는 일 앞에서 우리는 서로를 보고 놀란다. 한 시간을 훌쩍 넘기면서 통화하는 내내 서로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주를 바라였다. 그리하게 하심이 주의 은혜인 것을,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주를 사모하는 일이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가능하였다. 하여 우린 주를 먹고 마신다. 성경은 실재이고 우리 삶에서는 한 구절 한 구절이 실제적이다. 막연한 이야기나 어떤 먼 역사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 삶이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 22:28-30).”
우리와 함께 하심은 우리로 주의 일에 동참하게 하려 하심이다.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친절한 타인’으로 살아가는 것으로는 한 몸을 이루는 지체라 할 수 없다. 나는 저들 부부가 그 가정을 두고 씨름하길 바란다. 마음은 자꾸 부대끼고 쓸려서 지레 저 혼자 힘에 겨운 일이 주의 일이다. 상대는 이를 알지도 못하는데 저로 인하여 내가 주께 아뢰고 고하게 되는 것, 그때에 우리를 어지럽히는 것은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31-32).”
우린 스스로 장담할 수 없다. 쉬 환경에 노출되고 휘둘린다. 이를 위하여 주가 날 위해 기도하신다. 내가 결코 친구보다 나은 게 있어서 저에게 이르거나 권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35).” 그러나 “이르시되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36).”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의식적인 참여가 요구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나는 가진 게 없으나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 2:9).”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우리가 가진 모든 것,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그런데 이를 산다. 이로써 살게 하시려고 우리 곁에 한 영혼을 두신다. 저는 때로 성가시고 우리의 길에 걸림돌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해서 주를 바란다는 것,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시 92:5-6).
하나 우리로 알게 하시고 그와 함께 마음을 주사 주를 바라게 하는 일이었으니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3:7-8).” 곧 나는 할 수 없으면서 내가 하려드는 것은 나로 주께서 행하실 것을 알게 하심이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어떤 염려가 늘 먼저 앞서지만 그래서도 더욱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 먼저와 나중을 아는 까닭에 오늘 하루의 일로 족하였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 나는 어려울 때, 오늘까지 혹은 여기까지만… 하면서 주를 따른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그러할 때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그저 믿음으로였다. 주가 하실 것이다. 난들 저들 모녀를 어찌할 수 있을까? 주어진 상황을 어찌 감당이나 할까? 다만,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91:1-3).
어떠하든지 주를 인정하는 일, 내 코가 석 자여서 한 품이 아쉬운 판국에 누굴 위하고 배려하는 것은 행여 주의 뜻이 가려질까 하여서… 또한 오히려 지금의 이 형편이 주를 더욱 가까이 하게 하는 일이었으니,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27:4).
할 때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73:28).
이와 같은 소원을 우리 안에 두시고자 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이를 살면서 느끼면서 배우면서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이와 같을 때,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
(91:7-8).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14-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