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전봉석 2024. 1. 23. 05:35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요 12:40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 105:18-19

 

 

어지러운 세상이다. 때가 가까움을 알 수 있다. 모두가 짐승에게 경배하는 시대다. 실제 한 집 걸러 한 집마다 짐승을 사람보다 귀히 키우고, 저마다 그 짐승의 속성으로 으르렁거린다. 이 때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

 

종일 누구의 전화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뜬금없이 이혼을 운운하며 당장 그리 행할 것처럼 격앙되어 말하였다. 어느 교회에서 주축이 되어 하는 홈스쿨링을 하네마네하다 매학기 드는 비용이 너무 비싸서 그런가 주춤하는 것 같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묻고 대충 어떤 상황인지를 알 것 같았다. 모두가 육신을 따라 삶으로 그 안에 짐승의 형질만 가득한 세상이 되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나의 질문은 저의 이런저런 말이 너무도 감정적이어서였다.

 

우리의 장래 일을 너무 알지 못하는지, 상관도 없이 살고 있는 것인지… 곧 우리가 주의 부르심을 받고 주와 함께 산다는 일은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 22:30).” 하시는 이 놀라운 사역 앞에서 아직도 그 자리를 맴도는 일이었다. 정신과 약을 먹고 안정을 찾든지 우울을 다스리든지, 감정에 휘둘리는 자신들을 인정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제 초등학교 4, 5학년이 되는 아이 또한 부친의 행동을 따라 그 어미를 다그치고 짜증부리다 성질을 부리는가보다. 그런 상황에 이혼까지 다시 거론한 지경이니, 물론 그 속은 오죽해서 그러는 것이겠나만.

 

그때의 아이에게 부모의 정서적 교류와 인격적인 관계가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중요한지. 스스로의 판단이 미숙하다고하나 보고 듣고 느끼는 게 있어서, 그런 가운데 이혼에까지 이르면 지금도 학교 생활에 적응이 어려워서 홈스쿨링으로 아이를 방어하려는 꼴이라, 내 곁의 여러 사연과 실제로 고통당하는 아이들에 대하여 나는 모두 그 부모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

 

어느 가정은 이혼을 안 했을 뿐이지 둘 사이는 붙기만 하면 으르렁거린다. 돈은 많아서 그것으로 어찌 교육을 대신한다고 여겼겠으나, 연대까지 갔던 아이는 결국 우울과 강박에 시달리다 지금은 정신 줄을 놓은 상태로 흐리멍덩하게 살아간다. 어느 가정은 혼자 아이를 키우던 엄마가 더 큰 우울의 늪을 허덕이고 그러는 동안 아이의 지능과 정서적 나이는 퇴화하여 고등학생인데 유치원생 수준으로 확인되었다. 엄마는 한사코 자신은 괜찮다고 하는데 실은 그이가 더 큰 일이라….

 

발이 부러지고, 감기에 걸리고, 두통이 오듯 정신과적인 마음의 병도 대수로울 게 아니다. 인정하고 치료하는 게 우선일 텐데 저마다 팔다리 부러진 것은 내놓고 어려워하면서 마음의 병은 쉬쉬하며 감추기에 급급하다. 어제도 그 두 부부에게 우울증 약은 먹고 감정 조절이 안 되니 치료를 받는가? 하고 물었다. 이런 물음은 열에 아홉은 듣기 싫어한다. 어쩔 수 없다. 아이는 검사를 했나? 하고 대놓고 다시 물었다. 아이도 언제부턴가 제 아비가 하듯 소리치고 윽박지르며 무례하게 구는 것 같은데, 어쩌다 온 가족이 그러고 뒹굴고 있는지… 그러면서 홈스쿨링을 자신한다는 게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기는 하나?

 

나의 질문은 저들이 믿는 자요, 사역자들 부부라 더욱 간절하였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5-17).” 이런 경우 대부분은 자신도 누구보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의지한다고 자부한다. 나의 질문을 불쾌하게 듣는다. 과연 그러한가? 연거푸 물었던 것은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면 스스로의 어쩔 수 없는 형질의 속성을 놓고 주 앞에 씨름한다.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주를 사랑하겠다는 어떤 실행이 모든 고통을 이겨낸다.

 

친구는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면서 어김없이 전화를 했다. 보내온 성경구절을 읽고 풀어 설명하면서 나는 허리가 아파서 누워 등을 지지며 하고 있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런데 저는 나보다 더 심한 상태로 하루 두 번 독한 진통제를 먹고 버티면서 새벽예배를 가고 출근을 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도수치료를 받고 있으나 병원에서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기형적인 몸의 구조는 나이가 들면서 일반적인 경우보다 통증에 취약하였고, 수술이나 어떤 다른 방도가 없으니까 견디면서 사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거기다 추운 날씨에 새벽예배까지 참석하면서 출근길에 오른 저는 설명을 듣다가도 끙, 하고 통증이 신음과 같이 튀어나왔다.

 

두 상황을 두고 비교하려는 게 아니라, 은혜란 이런 것이어서 ‘그럼에도’ 누군 주를 더욱 사랑하기를 갈망하였고, ‘그러하여’ 누구는 점점 자신들에게 맡기신 귀한 사역을 가정에서 말아먹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듣다 일 년 전에 들었던 내용이나 그 이전에 들었던 상황에서 하나도 나아진 게 없는 것을 두고 나는 놀랐다. 그러하다면 이혼 그 이상도 답이겠다. 더는 말릴 수도 어찌 수습할 수도 없는 파국인데 그 마저도 다소 또 감정이 가라앉으면 유야무야 덮어두고 살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러한 지경이 언제까지 되풀이 될지 뻔하였다. 아이는 아이대로 서로는 서로대로 알아서 주 앞에 던지고 살 길을 찾기를. 때는 점점 악하여져 가서,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주를 믿고 돌이켜야 한다.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고 있다. 감정에 휘둘리면서 서로는 더 이상 인격적인 대상이 아니다. 존경과 사랑은커녕 환멸과 조소만이 난무하다. 문제는 그 사이에서 아이도 덩달아서 휘둘린다. 두렵고 안타깝지 않니? 하고 물었다. 그런 가운데 모두 버리고 도망쳐 나오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답답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내가 저에게 주를 사랑하는가? 하고 물었던 것은 주께서 자신을 어찌 사랑하셨는지를 알고 있는가? 하는 의도에서였다. 저마다의 고통과 그 마음에 상처가 있다. 뻑하면 어릴 때 겪은 상처를 운운하는데 최소한 그건 목사나 전도사로 주의 일을 하면서 그런 소리로 자신을 두둔할 일이 아니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나는 이 말씀을 들어 저에게 그런 변명 같지 않은 핑계는 오히려 그만큼 하나님과 지금 어떤 관계인지 스스로가 드러내는 것일 뿐이라고 나무랐다. 세상을 살면서 상처 없이 자란 사람이 어딨으며, 누군들 또한 누구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살았겠나? 이를 여전히 앙금으로 남아 앙심을 품듯 하고는 어찌 우리가 주를 사랑하고 섬길 수 있을까?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45:7, 50:20).” 이에,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105:16-19).

 

저는 우리 주님의 예표이면서 동시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걸어가신 길이었으니, 이에 오늘 마리아는 그 길을 예비하듯이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이를 두고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저가 곧 도둑이었다(5). 후에 예수를 팔았던 가룟인 유다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7).” 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 예수님은 함께 하는 저들이 훗날에나 깨달을 것도 알고 계셨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16).”

 

당장의 어떤 일, 그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비인격적인 처우를 받으면서 살고 있는 터에 다시 또 이혼을 운운하며 마치 당장이라도 결행할 것처럼 격앙된 저를 진정시켰다. 문제는 저 역시 이성적인 판단은 물론 영적으로 상한 심령인 것을 알게 하고 싶었다. 무작정 홈스쿨링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그럴 수 있는 가정이 못되고 자신의 정서 또한 불안정한 사실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에 따른 자연스런 반응은 스스로의 경멸이다. ‘내가 그렇죠 뭐!’ 하는 식으로 자신을 비하하고 비꼬았다. 아이가 곁에서 저들 부모의 이 모든 상황에서 같이 뒹굴고 있다는 게 마음 아팠다. 그러니 달리 어떤 대안이 없었다. 하여 나는 우문과 같이 주를 사랑하는가? 하고 되물었던 것이다. 믿기는 믿는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4-25).” 부디 내가 듣는 이 말씀이 저에게도 보였으면 좋겠다. 하여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26).”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저들 부부와 그 아이를 생각하며 주를 바라였다.

 

늘 또 같은 소리 같아서 기껏 전에 다 했던 말과 울음과 억울함인데 아직도 이를 등에 지고 있으니, 거기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섰는 것일까? 그리하여 주님은 괴로워하시는가?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27).” 우리 주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나니,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8).” 오늘 우리에게 더하시는 각각의 어려움과 고통이 부디 주를 더욱 사랑하는 자리가 되어지기를.

 

그리하여 누구는 가정을 박차고 도망치려 하고, 누구는 자신의 일을 일단락 짓고 그 가운데로 들어가려 하는 것인데… 곧 짐승의 때가 이르렀으니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6-8).” 때가 악하다 하는 것은 막연한 실상으로 남의 일이 아니라, 곧 오늘 우리 자신의 일이다.

 

나는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한 후 장판 위에 몸을 지지며 누였었다. 오늘은 그냥 쉬고 싶다 할 때에 친구의 전화가 온 것이다. 출근길에서나마, 전화로나마 말씀을 나누고 묻고 알고자 하여… 그런데 저의 신음소리에 놀라 물으니 나보다 더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새벽에 진통제를 서너 알 먹고, 새벽예배를 드리고 출근을 하는 길이었으니… 주신 삶 가운데서 누구는 저의 고통으로 그 영혼이 상하였고, 누구는 그의 고통으로 더욱 주를 바라면서 주신 상황 속에서 주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 12:36).”

 

‘아직’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다. 빛의 말씀이 있다. 돌이켜 빛의 아들로 살 수 있다. 점점 더 세상은 ‘짐승의 권세와 능력 아래 놓일 것이어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40).” 정작 두려운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마침 어제 저녁에 가정예배로 나누는 말씀에서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계 13:4).” 때가 점점 더 악하고 그 위세가 당당하여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 곧 모든 허다한 사람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그와 같은 현상은 온갖 문화나 유행으로 드러나고 있다. 게임의 대부분이 지옥문을 열고 온갖 악한 세력들을 일으키며, 드라마나 영화, 오락 등 모든 콘텐츠의 주제가 악령들을 주제로 하고 이를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좋아하고 경배한다(8). 실상이 그러한 것을 우리는 과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기는 한 것일까?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 12:44-45).” 그러므로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46).” 그러나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48).” 이에,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

(105:1-2).

 

과연 나는 주를 사랑하는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그의 백성이 즐겁게 나오게 하시며

그의 택한 자는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땅을 그들에게 주시며

민족들이 수고한 것을 소유로 가지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율법을 따르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

(3-4, 43-4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