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전봉석 2024. 1. 28. 05:49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3, 22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0:3

 

 

주의 기도 안에 모든 창조와 조성과 역사와 오늘이 목적하는 바를 담고 있다. 아버지께 향하는 말과 마음이 기도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4-15).” 우리로 하나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게 하심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오늘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우리에게 오늘 주님의 기도는 모두를 알리신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 여기서 ‘때가 이르렀다’ 하심은 모든 날의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때이다. 그리하여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곧 하나님의 뜻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자유의지니 개인의 주권이니 하는 말은 사람이 스스로를 높여 그리 부여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거역한 영들이 그리 행하여 천국 밖으로 버림당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의 결과다. 친구는 허리가 너무 아파서 주말에 병원에 가서 허리에 주사를 맞고 물리치료를 하고 돌아가며 전화하였다. 나는 어떤 안타까움으로 우리의 일생을 두고 주를 바랐다. 그런 가운데도 어떤 이의 사정을 두고 그 영혼을 위해 대화한다는 것, 우울증의 특징은 무엇을 권해도 자신이 옳다 하는 것을 따른다. 말해도 소용없어! 하는 친구에게 그냥 하라고 했다. 아이에게 연습용 기타를 사주는데 있어 필요하면 반반씩 부담하자고 했다. 한 가지 운동이나 어떤 취미에 빠지면 좋다. 마침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고 했다. 친구는 ‘그 아이’는 어쩌기로 했냐고 물어서 결국은 홈스쿨링을 한다고 했다고 하니 서로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자기 몸이 괴로워서 병원에 주말 오전을 다 소진하고 고통스러운 주사까지 맞고 나온 사람이 묻고 대화할 내용은 아니었다.

 

이처럼 주님은 기도하신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2).” 서로 하나되게 하려 하심이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서로 하나 된다 함은 주의 뜻에 순종할 때 주의 뜻에 하나 되는 일이다. 하여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5, 17).” 몰라서도 문제지만 알고도 무심한 게 더 큰 문제다.

 

보면 늘 느낄 수 있는 게 안부 정도 묻지 못하는 부류가 있다. 자신의 일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불쑥 무엇을 위해 기도를 부탁한다. 자신의 일에 온통 마음이 쏠려 다른 게 눈길조차 줄 겨를이 없다. 그런 자는 자신의 일도 바로 알지 못한다. 바로 코 박고 그 문제에만 골몰하니 정작 그 문제 좌우 너머의 일들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도 언제든지 그럴 수 있어서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2).” 그리하여 개인의 고통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우리 곁의 더 큰 고통 중에 있는 상한 심령을 돌아본다. 신기하지? 아플 때 아픈 이가 보인다.

 

결국 이 모든 게 우리의 영생을 위한 일이었으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2).” 오늘 주님은 본인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을 바로 하신다. 그 선택의 기준과 방법에 대하여는 우리가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은 그리 선택하셨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로 영생을 얻게 하심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이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이 놀라운 진리가 오늘 우리 이야기, 내 이야기로 와 닿지 않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친구는 묵상에 대해 물었고 나는 이를 으르렁거리며 잡은 것을 놓지지 않고 결국에는 씹어 삼키는 일이라고 말해주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결국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모세가 그러해서, 다윗이 그러했든지, 바울이 그러하든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저들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아니면 그냥 그렇다는 위인전기도 아니고 어디 걸려 있는 명화를 감상하는 것도 아닐 텐데… 나는 친구에게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 하는 의미를 직설적으로 설명하였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오늘 저의 기도에서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단 하나,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3).” 오늘 말씀은 일깨우신다. 고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4-5).” 그러므로 주님은 앞서도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고로 오늘 우리가 주를 알고, 앎으로 우리 일과 상관없는 어떤 이의 어려움을 두고 마음 쓰고 실제 저를 안고 걷는 길이었으니…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6:46).” 우린 누구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믿는다. 믿는다는 것은 주께로부터 왔다는 증거이고, 이 증거는 삶으로 그 마음과 생각으로 그의 일상이 그리 연결되어 흘러간다. 말만 살아서 입으로만 나불거리는 신앙이란 얼마나 공허한가? 더 나아가 자기만 위해 자기 일에 코 박고 그 문제에만 함몰하여 눈이 사시가 된 자도 곁의 일을 알지 못한다. 보고도 보이지 않는다.

 

이에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 25:15).” 서로 다른 무엇이 아니라, 그것으로 이루는 한 가지 일이다. 두 달란트로는 둘을 다섯 달란트로는 다섯을 그럼 한 달란트로는 하나만 했어도 될 일인데, 서로 견주어 상대적으로 생각하면서 우리는 남들처럼, 남을 의식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려하다 남만 못한 결과로 남겨진다. 이에 내가 내 자리를 지키는 일에서도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중요한 것은 서로 무엇을 하고 어디서 어떻게 다르게 일하는가가 아니라,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곧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나는 이 놀라운 진리를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하다못해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도 모든 것을 하고 있다는 데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거지 나사로가 부자의 집 앞에 버려져 헌데를 개가 와서 핥는데도 그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연명하다 그 생을 다하였다 한들, 저는 엄연히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다. 호의호식하며 얼마나 대단한 일로 그 많은 부와 명예를 누리며 생을 남부럽지 않게 살았는지 모르겠으나 부자는 결국 지옥 불에서 고통 가운데서 영생을 살아야 한다.

 

곧 우리 일은 무엇을 얼마나 남다르게 대단히 잘 하였는가가 아니라, 그 모든 것으로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였는가 하는 데서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6).” 그리하여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3).”

 

나는 이제 확신한다.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이 하며 살고 있는지,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6).” 그로써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7).” 이에 주님은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8).” 하시는 기도로 그 의미를 알게 하신다.

 

고로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3-14).” 그것으로 오늘 내 안에 너의 영혼을 두고, 오늘 네 안에 나의 영혼이 거하면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 되어 주의 일을 향한다. 다시,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1-22).” 내가 언제 내 일 아닌 일에 이처럼 마음을 쓰고 온 신경을 거슬려하며 저의 영혼을 두고 가슴 졸인 적이 있던가?

 

실제 이 일이 싫어서, 남의 일에 끼어들고 하물며 저의 영혼을 운운하는 일이 엄두가 안 나서 주를 멀리하고 신학을 주저하며 꺼려하였던 것인데, 기어이 우리 주님은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9).” 내가 누구 것인지,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10).” 그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계신다. 고로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

 

서로가 하나 된다는 것,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의 영광을 위한다는 일은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13).” 내 안에 이는 어떤 일을 두고 슬퍼하나 또한 기뻐한다. 염려하나 또한 사랑한다. 이 놀라운, 어찌 말로 할 수 없는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14).” 결국 나로 세상에 속하지 않게 하심으로,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15-16).” 하여,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12).”

 

오늘 나의 하루도 성경을 이루려 하심이었으니, 나로 성경이 되게 하심으로 너에게 읽히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고, 냄새가 나는 ‘그리스도의 향기’였으니,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 나의 거룩은 주의 것으로 오직 주만이 그리 하셨음이다. 이를 위해 주가 오셨다고 하니,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18-19).” 궁극적인 우리의 목적은 거룩이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누릴 수 있는 천국의 조건이다.

 

그러므로 주가 기도하신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0-21).” 이를 우리로 믿게 하시기까지 오늘 이 모든 일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었으니,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2).”

 

아, 말씀이 참 귀하고 깊다. 주님의 기도 안에 모든 진리가 다 내포되어 있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23).” 하여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24).” 보잘것없는 나를 위하여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25).” 그러므로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6).” 아멘.

 

주님의 기도에 아멘, 할 수 있는 자리여서 감사하다. 이 이른 아침에 나는 주 앞에서 누굴 생각하고 어떤 일을 두고 아뢰면서, 주의 권능의 날을 생각한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0:3).

 

이 아름답고 황홀한 영광을 위하여,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4). 아멘.